책 만권을 읽으면..

가을여자/오정희/랜덤하우스

다림영 2011. 1. 31.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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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꽃핀날

 

괘종소리에 맞춰 눈을 뜨고도 나는 시계를 보며 오 분만, 십 분만, 하고 늑장을 부렸다. 새벽밥 짓는 게 여러 해째전만 매번 일어나기 싫어 구물대는 버릇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직  십 분 정도는 게으름을 부려도 된다. 나는 예의 '갖고 싶은것'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근 일주일 전부터 내게 물건이든 휴가든 원하는 대로 해주겠으니 정말 원하는 것 한 가지만 말하라면서 대답을 채근하는 터였다.

 

결혼 20주년 기념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름 붙은 날은 여느 때처럼 그냥 넘기다가는 날로 사나워져 가는 아내에게 당할 후한이 만만치 않겠다거나 연년이 입시생 뒷바라지에 시드는 모양이 안스러워 큰맘을 쓰는 것이겠지만 평소 무심한 편인 남편의, 새삼스런 결혼기념일 타령이 늙어간다는 징조인가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했다

 

꼭 갖고 시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난데없이 요술램프에서 튀어나온 거인의 제의를 받은 듯 말문이 막힌게 사실이었다. 원하는 게 너무 많아서라기보다 나의 나날이, 눈앞에 부닥치는 것 외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없이 타성적이고 습관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갖고 싶은 것 꼭  한가지란 참으로 막연한 얘기였다.

 

대학생이 된 딸에게 물으니 딸은 가볍게 대꾸했다. 필요하신 게 많으실 텐데요. 필요한 것이라면 많다마다. 새벽밥 지으러 일어날 때마다 수면부족으로 휘청거리며, 쌀을 안치고 시간만 맞춰 놓으면 지시한 시각에 밥이 다 되어 있다는 타이머 밥솥을 사야지 벼르고, 외출할 때마다 머리부터 발긑까지 갖춰진 게 없다고 불평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보다 넓고 편리한 집.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필요한 것과 갖고 싶은 것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리라. 곡 갖고 싶은 한 가지가 밥솥이나 옷 따위, 돈만 가지면 누구든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전지 억울하고 손해보는 듯하지 않은가. 마음속의 소원이 물질로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인생은 얼마나 시시한가. 우리의 생에는 눈에 보이고 손에 쥐어지는것 이상의 가치와 목표가 있다고 배워온 교육 탓인지 자신의 낭만적 성향 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살아지는 대로 의지 없이 살겠다고 작정한 것이 아닌 이상 간절히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어릴 때는 프릴 달린 예쁜 원피스, 눕히면 진짜  눈 감는 인형이 갖고 싶어 울었고 자라면서는 잠글 수 있는 서랍 달린 책상, 나만의 방, 사랑하는 사람, 자신의 일, 자유, 고독 등을 원했다.

 

그것들은 때로 몸과 마음을 태울 만큼 뜨겁고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런데 이제 기껏 생각은 눈이 닿는 곳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남편이 제 아무리 전능자처럼 '무엇이든'이라고 큰소리를 쳐도 그것이, 우러급봉투째 내맡기는 그에게 어쩌다 생긴 약간의 가욋돈을 근거로 한 선심일 뿐임을 아는 탓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갖고 싶은 것을 필요한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왠지 비겁한 타협 같고 스스로를 낮추는 짓처럼 생각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갖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은 생애의 열정이 사그라졌다는 뜻인가.

이런저런 부질없는 생각을 굴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나보았다. 눈 감은 기억도 없는데 이십 분이 훌쩍 지났다. 후다닥 부엌으로 나가 쌀을 안쳤다. 여간 서두르지 않으면 식구들 아침밥을 굶길 지경이었다. 콩 튀듯 튀며 국을 끓이고 생선을 구웠다.

 

'아직 한밤중인 줄 아나 봐' 급한 마음에 성마른 소리를 내뱉으며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 동동걸음을 치던 나는 아, 얕은 비명을 질렀다. 거실 유리문 너머 한 귀퉁이가 온통 눈 내린 듯 새하앴다. 어제까지 붓끝처럼 단단히 뭉쳐 있던 목련의 꽃망울이 밤새 함성처럼 터진 것이다.

 

잎없이 피는 꽃이라 보이지 않는 바람에 흐르는, 허공에 띄워 놓은 등처럼 도시 이승의 것 같지 않은 정경이었다. 봄의 이른 아침, 혼자 바라보는 흰빛은 슬프고 화려하고 예감처럼 비밀스러웠다. 오래전에 꾼 꿈처럼 내용은 기억나지 않으나 너무도 친숙하고 익숙한  이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가. 그 쓸쓸한 흰빛이 물처럼 온몸을 적셔와 한숨을 내쉬며 나는 보았다.

 

미처 덜 핀 꽃 한 송이가 고속촬영의 필름에서처럼 서서히 벌어지며 피어나는 것을. 맑고 투명한 탄성으로 터지는 것을. 나는 숨이 막히는 듯한 전율에 몸을 떨며 외쳤다.

꽃이....

"이게 무슨 냄새야? 밥 태우잖아."

 

나의 외침은 방에서 나오며 코를 킁킁대는 남편의 말에 지지눌려 쑥 들어갔다. 가스레인지는 흘러넘친 밥물로 흥건하고 솥에는 생쌀만 오르르 남아 새까맣게 타버렸다. 뒤적거려봐야 소용없었다. 식구들의 아침밥을 굶기게 된 주부의 꼴처럼 비루한 모양도 드물 것이다.

 

출근과 등굣길이 바쁜 남편과 아이들은 뻣뻣한 식빵을 한 조각 베물다 말고 찬 우유 한 컵씩만 마신 채 부루퉁한 낯으로 집을 나갔다.

집안은 갑자기 가위눌린 듯 조용해졌다. 솥 안에 새까맣게 눌어 붙은 밥을 숟가락으로 긁어내다가 난데없이 후룩 눈물이 떨어졌다. 슬프다거나 참담하다거나 따위 자극적인 감정의 작용이 없는데도 그랬다. 눈물이 어린 눈에 환시처럼, 착시현상처럼 피어오르던 목련이 떠올랐다.

 

아마 굳이 그 꽃을 찾아보려 해도 다른 것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꽃이 피어나는 그 운명적인  시간이 내 존재의 한순간과 만나 섬광처럼 부딪치고 사라졌다. 인생에의 꿈이나 그리움이라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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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글은 참 잘읽혀진다. 오랜만에 그분의 글을 읽게 되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가을여자'를 과감히 빼어들고 읽으며 즐거웠다. 그분의 글은 간결하고 맛있다. 언제쯤이면 나도 단편 한번 써 볼 수 있을까 싶다. 그분의 글을 지속적으로 다시 읽어보아야 하겠다. 잘 안돼더라도 한번 도전을 해 보아야 하겠다. 아주 짧막하더라도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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