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에라스무스 격언집/김남우옮김 김태권그림/아모르문디

다림영 2011. 1. 2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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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9-1536>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어린시절 부모를 잃고 수도원에서 자랐다. 스무살 무렵 수도사로서 서원하였고, 1495년 부터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했으며 1499년에는 영국에 머물며 희랍어를 공부했다. 최초의 희랍어<신약성경>비평판<1516>을 편집하여 출간하였고, 이는 독일어와 영어 성경 번역의 저본으로 사용되었다. 당대 가톨릭교회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유럽 전역을 떠돌며 세계시민을 자처하였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예 연구에 몰두하며 '보다 인간적인 학문과 예술'을 추구하는 인문주의 운동을 주창하였다. 저서에는 라틴어로 쓴 신학적인 작품이 많으며, 당대 유럽 사회에 널리 읽히며 많은 영향을 미친 <격언집>(1500)>우신예찬(1511)<대화집(1518)<자유의지론(1524)등이 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에라스무스가 평생을 바친 고전 강독의 결실은 <격언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보기에는 단순히 격언을 모아놓은 선집이지만, <격언집>의 모태가 에라스무스의 초기저작<야만에 대항함Antibarbari>이라는 사실은 이책의 성격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즉 <격언집>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를 돌아보게 만들며, 이로써 자기 안과 밖에 자리잡은 야만들을 잘라버리게끔 만듦으로써 인문주의의 토대를 놓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고 한다. "나는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다Concedo nulli"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509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에라스무스에게 알렉산더 스튜어트Alexander Sruart가 젊은 신이 새겨진 반지를 선물하였다. 골동품상은 젊은 신이 테르미누스Terminus라고 알려 주었고, 에라스무스는 "Concedo nulli"라는 말을 덧붙여 자신의 문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1528년 이 문장으로 인해 에라스무스는 구설수에 휘말렸고, 이에 관한 해명의 편지<Epistola apologetica dtermini sui inscriptione concedo  nulli>를 작성한다.

 

거기에서 에라스무스는 "나는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테르미누스 신의 말이며, 남들이 비방하듯 오만한 태도와는 무관하고, 자신은 이 말에서 늘 죽음을 염두에 두라는 경계의 뜻을 찾는다고 변명하고 있다. 즉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바, 죽음의 신은 결코 양보하지 않기때문이다.

 

 

 

로마의 고대 신 테르미스와 "나는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도시의 경계선을 상징하는 테르미누스 신은 카피톨리노 언덕에 모셔져 있었는데, 유피테르 신이 도입되면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유피테르 신전을 세우려 하였다. 이를 위해 테르미누스 신을 옮겨야 했으나 테르미누스 신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이 테르미누스 신을 그대로 놓아둔 채,그의 주위를 둘러 유피테르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이런 신화는 겔리우스가 지은 <아티카의 밤>에 수수께끼 형태로 전해진다. 물음은 아마도 '그는 누구일까?'정도일 것이며, 그 답은 당연히 '테르미누스Ter-minus'이다. 장난스러운 어원 분석대로라면 테르미누스는 '세 번ter-'의 '미누스'이다.

 

서문중에서

격언이란 무엇인가?

격언paroimta은 도나투스에 따르면 "어떤 사태와 시기에 어울리는 말이다. 디오메데스는 격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격언이란 시중에 널리 쓰이는 말이며, 어떤 사태와 시기에 들어맞는 말로서, 글자 그대로의 말과는 다른 속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의 여러 작가들에게서 우리는 여타의 정의를 찾을 수 있다. 어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격언은 세상을 살아가는 좋은 지침이며 꽤나 불분명하면서도 실로 상당히 유익하다." 또 어떤 작가는 이렇게 적었다."격언은 모호한 글자의 표피 속에 오롯이 진리를 감추고 있는 말이다."

이외에도 격언이라는 단어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를 희랍이나 라틴 문학 작품 가운데 찾을 수 있으나 이 자리에서 그 모두를 열거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선 나는 가능한 한 이 저작 에서나마 호라티우스가 가르친 바, 선생에게 요구되는 간결함의 원칙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정의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격언의 의미나 영향력을 드러냄에 있어 불필요한 사족을 덧붙이고 있지 않으며 그 중요성을 손상시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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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피타고라스의 격언"친구들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I,i,1)심사숙고 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인간의 행복 모두가 이 한마디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플라톤이 그 많은 책을 지어 밝혀보려고 했던 삶의 공동체, 그것을 만들어내는 요소는, 다시 말해 우정이 아니겠는가?

 

 

본문 중에서

신발장이는 신발을 넘어서지 마라

 

앞서 우리가 보았던 격언과 매우 비슷한 것이다. 신발을 넘어선 것에 관하여 신발장이는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자신의 기술이나 직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일에 관하여 누구도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

이 격언은 저 유명한 화가 아펠레스에서 연유한다. 플리니우스는 그의 책 제 35권10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펠레스는 완성된 작품들을 거리의 행인들이 볼 수 있도록 상점에 내다 거는 한편, 자신은 그 그림 뒤에 몰래 숨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나 엿들었다고 한다. 그는 광장의 대중이 바로 예술 평론가라 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한번은 길을 지나가던 신발장이가 멈추어 서더니 비판하기를 , 그림에서 신발 끈을 넣을 구멍을 너무 작게 그려놓았다고 하였다.

 

다음날 그 신발장이가 그림 옆을 지나가다 보았더니 어제 자신이 나무랐던 잘못이 고쳐진 것을 보고 기분이 좋고 우쭐하여 이번에는 발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자 옆에 숨어 있는 아펠레스가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나타내어 신발장이에게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발장이면 신발에만 왈가왈부할 일이다. 이 일에서 격언이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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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격언들은 한쪽에 만화같은 그림과 함께 상세한 이야기로 나열되어 있다. 아주 쉬운 풀이로 되어 있고,  흔히 늘 들어오기도 했던 그러한 말씀들이다. 그러나 신화속이나 그 오래전 옛 철학자들의 주장들은 무조건 쉽지 않게 느껴진다. 철학은 언제나 멀리 있고 철학과 생활과 생각은 다른 것으로 구분해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곧 철학이고 철학속에 삶이 녹아 있는 것... 유식한 말을 들어 설명할 수 없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겠다. 수많은 신화속 인물들을 빌어 철학자들의 주장도 나오고 그러한 것이 내게 무슨 보탬이 되겠냐만 살면서 어떠한 일을 그르치고 돌아서보면 격언은 언제나 우리의 삶속에 내밀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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