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소래섭
1973년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졸업.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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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을 수료할 무렵, 미니홈피 프로필을 적기 위해 백석의 시를 패러디해본 적이 있다. 재미삼아 끼적거려본 것이었지만 , 어쩌면 그때 운명이란 것을 직감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들을, 좋아하도록 태어났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그래서라도 웃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하늘이 보라고 웃어야 하는것이다. 흑점투성이 태양과 타조와 톰과 제리가 그러하듯이. 니체와 장자와 이주일과 찰리 채플린이 그러하듯이."
본문 중에서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위에 곱돌탕관에 약이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六味湯)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탕약>
<탕약>은 <국수>의 축소판과 같은 시다. 눈이 오는 배경묘사로 시작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과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감각적 즐거움을 나열하고, 그것을 다시 정신적인 차원에서 재졍의하는 구성이 <국수>와 동일하다.
"달큰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에는 미각과 후각이 어우러져 있다. 또 약이 끓는 소리와 "하이얀 약사발"에 담긴 까만 탕약은 청각과 시각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렇듯 미각 경험은 흔히 다른 감각들과 함께 어우러져 '공감각'의 상태로 경험되는 것이 보통이다.
화자는 까만 탕약에 "만년 옛적"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역사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 백석은 "아득하니 까만"빛깔로 탕약을 묘사하고 있다. 화자는 약을 내던 옛 사람들을 생각한다. 탕약이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약을 내는 사람들도 엣 사람들과 더불어 존재한다.
<국수>의 화자가 자신의 감각을 마을이라는 공동체에 귀속시키듯, <탕약>의 화자는 자신의 감각을 시공을 초월해 음식 혹은 약물을 준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것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이때 음식과 미각경험은 다시 정신적인 차원으로 상승한다. 탕약에서 느끼는 감각적 경험은 '즐거웁기도' 한 차원을 넘어서, '고요하고 맑은'마음의 영역에 도달하고 있다.
미각은 맛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세계까지도 탐지해낸다. 이렇게 달인 탕약이 몸에만 좋을 리 없다. 한 그릇만 마셔도 마음까지 맑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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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맛이 아닌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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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순간으로 정확하게 돌아갈 수 없는 한, 과거의 그 맛을 다시 느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흔히 우리는 고향요리를 맛보며 유년시절의 추억에 젖거나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말하지만, 그때에도 과거에 맛보았던 것과 똑같은 맛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백석또한 맛과 미각 경험을 통해 오래된 과거와 대면한다. 때로 그것은 자신의 유년 시절 같은 개인적 경험인 경우도 있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오랜 역사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백석은 우상병과는 달리 과거의 그맛을 다시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백석이 특별히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일가? 아니면 미각 경험과 기억 사이에 '우상병'과 <식객>의 제작자들이 모르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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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국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에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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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음식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시로 표현했다.
시를 잘모르지만 한가지를 먹어도 그에 한 생각은 깊고 할 이야기가 많으셨던 모양이다.
배움이 짦아 어찌 모든 것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일수 있을까만
국문학자께서 풀어주신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보고, 책을 다 읽고도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수 없으니
수십번은 읽어야 한마디라도 벙긋 거리겠다.
다시금 뒤적여본다.
시가 어떻고 문학이 어떻고 이런것은 두고 지극히 빈한하던 시절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쌀 밥 몇수저의 맛을
어디에서도 맛볼수 없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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