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박완서 산문집/주<도서출판 세계사>

다림영 2011. 1. 26.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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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영결식을 뉴스에서 잠깐 보았다 . 가족 친지들 그리고 수녀님의 슬픔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었지만 사진속의 순박한 웃음이 금방이라도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주는듯 보였다.

언제나 수수하고 소박하고 지극히 서민적인 모습이 뇌리에 남아있다.

그분의 글을 읽은지 며칠이 되었나 돌아가셨다는 얘길 전해들었다.  오랫동안 우리 국민의 곁에서 그 소박한 모습으로 어머니처럼 항상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을 전해주실 것 같았는데  ....

도서관에서 다시 그분의 책을 집어들었다. 한결같은 삶의 모습, 항상 그 한색깔의 모습이다. 산문도 소설도 언제나 그런 차분함으로 그분이 걸어왔던 오래된 옛날이야기들은 각별했다.

책에 실린  산문의 배경은 1970년대이다.

 

 

본문중에서

 

노인

 

벌써 10여 년 전쯤부터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진 한 친구는 늘 우리 동네를 부러워했었다 아파트가 편하긴 다 편해서 좋은데 이웃끼리 사귀지를 않고 산다는 거였다. 그때만 해도 우리 동네는 한옥이 밀집한 고풍스러운 동네였고 이웃 간에 친목이 대단했었다.

 

리어카 장수나 광주리 장수한테 물건을 흥정해 놓고 좀 싼 듯하면 골목 안 사람들은 다 불러서 아주 떨이를 해버림으로써 장수는 다 팔아서 좋고 이웃은 싼거리 해서 좋은, '좋은 일'하기를 저마다의 의무로 알았고, 어느 이웃이 어느 장수한테 속았다든가 바가지를 썼다든가 하면 골목 안 식구들이 일제히 그 장수를 배척해서 다신 우리 동네에 발을 못 들여 놓게 했다.

 

 

돌떡이나 고사떡 나누어 먹기, 김장이나 큰일 때 서로 돕기는 당연한 예절이었고, 집집마다 대개 노인네를 모시고 있어 노인네의 생신 때는 골목 안 노인네들을 다 청해다가 며느리, 딸들이 극진히 모시고 갖은 솜씨를 다한 음식 자랑도 했었다.

 

 

내가 처음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만 해도 꼭 시골 인심 비슷한 골목 안 인심에 흔연히 동화됏다기보다는 적이 당혹했었다는 쪽이 옳겠다. 개인 생활을 침해받는 것 같아 불쾌한 느낌조차 들었다. 가을 고추 같은 것도 미리 물어 보지도 않고 뉘집에서든지 100근 200근짜리를 부대째로 사서 마당에 쏟아 놓고는 집집이 다니며 사람을 불러 모아서는 나누어 사자는 데는 뾰지게 싫달 수도 없고, 당장 돈이 없다고 발뺌을 하면 돈을 꾸어 주겠다는 사람까지 나서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참, 할 일도 없으려니와 오지랖도 넓지 하며 속으로 혀를 차면 찼지 안 살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며 그게 요새 한창 유행하는 공동 구입이 아니가 싶다. 내 친구가 이런 우리 동네를 부러워하는 소리를 할 때마다 나는 그냥 웃었지만 속으론 친구의 아파트 살림을 부러워하지 않았던가 싶다.

 

그러나 우리 동네도 이젠 많이 변했다 골목 안에서 우리가 제일 고참이 되었고, 한옥 사이 드문드문 양옥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웃 간에 왕래가 끊긴 지 오래다. 이제 와서 문득 지난날의 인심에 그리움 같은 걸 느끼며 우리가 제일 고참인 점으로 미루어 우리 골목 안의 아름다운 전통이 우리로부터 끊긴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조차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우리 골목의 변모야말로 근래 10여 년 간의 우리 사회의 급속한 근대화가 가져온 수많은 변모의 한 전형일 따름일 것이다. 우선 집이 팔리면 새로 산 사람이 멀쩡한 한옥을 철거한다. 아직도 몇십년을 더 버틸 수 있는 굴도리에 재목이 좋은 한옥이 헐려서 시골로 내려간다. 시골 사람은 이런 한옥을 사다가 그대로 조립하는 식으로 지으면 건축비가 훨씬 덜 든다는 거였다.

 

 

철거가 끝나면 철근에 벽돌에 시멘트가 쌓이고 땅을 판다. 양옥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맘때쯤 으레 맞붙은 한옥 주인과 싸움이 붙는다. 지하실을 너무 깊이 파서 집이 기울고 있다든가, 담을 몇 센티미터쯤 내쌓았다든가 하는 일로. 집이 완공될 임시도 또 싸운다. 2층에서 남의 집 안방이 들여다보이니 될 말이냐, 보여도 안 내다보면 될 게 아니냐 하고 어린애들처럼 싸운다.

 

그러나 이런 싸움의 결과란 으레 새 양옥집 주인의 승리다 이렇게 생긴 양옥은 우선 대문이 어머어마하고 담엔 쇠꼬챙이가 솟고, 차는 있건 없건 셔터 내린 차고가지 있어 이웃의 한옥하곤 사뭇 단수가 달라 뵈고 사람까지 달라봬서 상종들을 안하려 든다.

 

 

설사 새로 이사 온 이가 한옥을 헐지 않고 그대로 사는 경우도 대개는 수리를 하는데 그 수리라는 게 또 대단하다 . 방을 추녀 밑으로  또는 집과 집 사이로 내늘리고, 그러자니 자연히 이웃과 또 입씨름이 붙게 된다 한옥도 번들번들 타일이 빛나는 벽이 추녀 끝까지 나와 있고 담에 쇠꼬챙이가 솟고 보니 한옥인지 양옥인지 분간을 못하게 된다. 반양옥이라고나 할까. 한 골목 안에 한옥.양옥. 반양옥이 번갈아 가며 서 있고 서로 그것을 신분의 차이처럼 의식하고 있고 서로 적의조차 품고 있는듯이 보였다.

 

 

나는 가끔 내가 돈이 한 푼도 없는 날 ,100원이나 500원쯤이 급하게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한다. 돈은커녕 광주리 하나 빌릴 만한 이웃이 엇ㅂ다. 그래도 나는 자주 밖에  나가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고 심심할 땐 친구들과 전화도 할 수 있고 책도 읽고 함으로써 별로 외로움을 모르고 살지만, 모시고 있는 시어머님의 경우는 이웃과의 단절의 문제가 사뭇 심각하다.

 

 

심심하면 마을 갔다 오마고 나가시고, 한 바퀴 돌아오시면 동네의 잘다란 소식은 다 모아들이던 어른이 요 몇 년째 가실 데가 없는 것이다. 쇠꼬챙이가 삼엄한 담장, 사나운 개, 인터폰을 통과할 일도 난감하려니와 완강하게 닫힌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일은 더욱 난관인 것이다.

 

앞에서 고물고물 말 상대가 돼주던 손자들은 다 자라 아침 일찍 학교에 가면, 늦게나 돌아와 제각기 제 일이 있고 보니 할머니하고 오순도순 대화할 시간이 없다. 서로 왕래하던 친척의 노인네들도 대부분 별세하시고, 젊은이들은 노인을 찾아뵙는 예절쯤 생략하고 사는 지 오래다. 그래 그런지, 원체가 팔십 고령이라 그러신지, 오새 우리 시어머님 대화에서는 많은 단어를 잊어 버리고 극히 제한된 단어밖에 구사할 줄 모른다.

 

 

'춥다' '덥다'라든가 '배고프다' '맛있다' '맛없다'라든가 하는, 감각과 본능의 욕구에 필요한 범위내로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 가끔 우뚝 솟은 2층집을 바라보면서 "저놈의 집엔 늙은이도 없나"하시더니 요샌 그런 소리도 안하신다. 누웠다 앉았다 장독 뚜껑을 열어 봤다 하시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사고의 범위까지가, 구사할 수 있는 단어의 범위 내로 제한되는 걸까.

 

그렇다면 80년을 산 긴긴 사연은 뇌의 어느 깊은 주름살 속에 영영 사장되고 만 셈인가. 측은하고 서글프다.

내 남편을 낳아 길러주었고, 내 자식을 같이 사랑하고, 같이 병상을 보살피고, 같이 재롱에 웃던 분의 쓸쓸한 노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한가닥 연민뿐이니 그것 또한 서글프다.<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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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픔에도 늘 환했던 그 모습을 존경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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