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열하일기,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그린비

다림영 2011. 1. 1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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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중에서

연암은 타고난 '집시'<vagabond> 였다. 과거를 포기한 뒤로, 서로는 평양과 묘향산, 남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화양동과 단양 등 여러 명승지를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다. 과거를 포기한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 유람말고는 달리 없었던 것이다.

 

1756년 가을 금강산 유람 때의 일이다. 유언호와 신광온이 나란히 말을 타고 금강산 유람을 제의하자, 연암은 부모님께서 계시니 마음대로 멀리 갈 수가 없다고 거절햇다. 두 친구가 먼저 떠난 뒤, 연암의 조부가 "명산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젊을 적에 한번 유람하는게 좋다"고 허락햇다. 하지만 노자가 없었다. 그 때 한 지인이 들렀다 나귀 살 돈 100냥을 쾌척하여 돈은 마련되었는데, 데리고 갈 하인이 없었다. 이에 어린 여종으로 하여금 골목에가 이렇게 소리치게 했다.

 

"우리집 작은 서방님 이불짐과 책상자를 지고 금강산에 따라갈 사람없나요?" 마침 응하는 사람이 몇명 있었고 이에 새벽에 출발해 의정부 가는 길에 있는 다락원에 이르러 먼저 떠난 두 벗을 만났다. 뛸 듯이 기뻐하는 친구들. 그의 빼어난 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가 이때 지어졌다.

 

그가 연암골을 발견한 것도 전국을 정처없이 유람하던 이 즈음이었다. 협객 백동수와 합류한 어느 날 백동수는 그를 이끌고 개성에서 멀지 않은 금천군 연암으로 향했다. 연암골은 황해도 금천군에 속해 있었고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두메 산골이었다. '연암'은 제비바위라는 뜻으로 평계<平溪>주위에 있는 바위 절벽에 제비 둥지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 화장사華藏寺에 올라 동쪽으로 아침 해를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 듯했다. 시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기이한 땅이 있었는데, 언덕은 평평하고 산기슭은 수려했으며 바위는 희고 모래는 깨끗했다.

검푸른 절벽이 깎아지를 듯 마치 그림 병풍을 펼쳐 놓은 듯했다 고려시대에는 목은牧隱 이색과 익재益齋 이제현 등 쟁쟁한 명망가들이 그곳에 살았지만 당시에는 황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두 친구가 찾았을 때는 화전민들만 약초를 캐고 숯을 구우며 살고 있었다.

 

둘은 갈대 숲 가운데서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배기를 구획지으면서 말했다.
"저기라면 울타리를 치고 뽕나무를 심을 수 있겠군. 갈대에 불을 질러 밭을 갈면, 한 해에 조를 천 석은 거둘 수 있겠네"

시험삼아 쇠鐵를 쳐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으니 , 궝은 깍깍대며 놀라 날고, 새끼 노루가 앞으로 달아났다. 팔뚝을 부르걷고 이를 쫒다가 시내에 막혀 돌아왔다. 둘은 서로 돌아보며 웃으며 말하였다.

"백년도 못 되는 인생을 어찌 답답하게 목석같이 살면서 조나 꿩, 토끼르 먹으며 지낼 수 있겠는가?"

 

하기야 어찌 서글프지 않으랴, 아무리 풍광이 빼어난 곳일지언정, 젊은 날부터 뒷날 물러나 생계를 구릴 터전을 마련해 놓아야 하다니. 하지만 연암은 '연암골'이 마음에 꼭 들었다. 마침내 이곳에 은거하길 마음을 정하고 '연암'을 자신의 호號로 삼는다.

 

..

부에 대한 연암의 메시지는 이렇다. "원하건데 천하의 인사들은 돈이 있다하여 꼭 기뻐할 것도 아니요, 없다고 하여 슬퍼할 것도 아니다. 아무런 까닭없이 갑자기 돈이 앞에 닥칠 때는 천둥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무서워하여 풀섶에서 뱀을 만난 듯이 머리끝이 오싹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복권이나 증권으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운을 부러워하기 바쁘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절대 행복이 아니다. 가정파탄에 섹스와 마약, 대부분이 이 코스를 밟아나간다. 그것은 바로 자본 자체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연암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느닷없이 돈이 굴러올 땐 뱀을 만난 듯이 조심하라' 가히 부귀를 달관한 자만이 설파할 수 있는 '잠언'이 아닌가.

..

 

강을 건너며 그는 말한다.

"자네, 길을 아는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을."

"이 강을 바로 저와 우리와의 경계로서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지. 무릇 세상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은 마치 이 물이 언덕에 제際함과 같으니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곧 그 '사이'에 있는 것이네."<도강록>

 

물과 언덕에 길이 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렇다고 그 중간은 더더욱 아닌 경계. 그것은 그 어느 것에도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때와 더불어'변화하는 어떤 지점일 터이다.

오해해선 안 될 것은 이 사이는 '중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양극단의 '가운데 눈금'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제 3의 길, 그것이 바로 '사이'의 특이성이다. 장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장차 재才와 부재不才. 쓸모있음과 쓸모 없음의 사이에 처하려네.

 

기림도 없고 헐뜯음도 없으며, 한 번은 용이 되고 한 번은 뱀이 되어 때와 더불어 함께 변화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만 하기를 즐기지 않을 것이요.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가서 조화로움을 법도로 삼아 만물의 근원에서 떠다니며 노닐어 사물로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부림을 받지 않을 터이니 어찌 폐단이 될 수 있겠는가?"<산목山木>

 

여기서 사이에 처한다는 것은 때론 용이 되고, 때론 뱀이 되는 변이의 능력, 만물과 더불어 조화하는 힘. 사물에 부림을 받지 않는 자유등을 의미한다.

 

연암이 말하는 사이의 사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고정된 표상의 말뚝에서 벗어나 인연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하면서 만물의 근원에서 노닐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그가 제시하고자 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길은 하나가 아니다. 방향도, 목적도  없이 뻗어나가면서 무수한 차이들이 생성되는,말하자면 '가는곳마다 길이되는' 그런것이다.

 

"말은 반드시 거창할 것이 없으니. 도는 호리<豪釐:저울 눈의 호와 리로 매우 적은 분량을 뜻함>에서 나누어진다" 고 할 때의 그 '호리'의 차이! 물론 그 '호리의 차이는 천리의 어긋남을 빗는다'는 점에서 폭발적 잠재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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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렵다.

쉽지 않았다.

글에 대한 설명을 재차 읽고 읽었으나 글에 대한 설명이 더 어려운 것 같은것은 아마도 나의 모자란 배움때문이다. 다시 뒤적이며 정리를 해보나 역시 어렵고 연암 박지원은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각별한 분이다. 그분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요즘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실지..

어쨌거나 도중하차 하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는 것에 박수를..

먼저번에는 중도하차 했었는데..

언젠가 새카맣게 잊고 또 다시 꺼내들게 될 그러한 책이고 몇번을 읽어도 내겐 어려우리라. 그러나 언젠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책을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문학에 대해서 철학에 대해서 온갖 세상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배움 또한 턱없이 모자라니 그냥 읽고 또 읽을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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