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기억에 남는 명법문<법보신문>,월간<불광>공동기획/불광출판사

다림영 2010. 11. 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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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스님들의 명법문에 눈을 비볐다. 가끔 졸음도 왔으나 그것은 어젯밤 잠을 설쳤기 때문이었다. 좋지 않은 일들이 몇가지 일어났다. 그러나 다 버린다. 좋은마음 빈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본문중에서

 

화성신흥사주지  성일스님

복은 지어야 받는다

<백유경>에 보면 놀부 심보를 가진 장자가 이웃에 사는 착한 장자에게 복을 빼앗아오기 위해서 갔습니다. 가서 보니가 닭 벼슬 위에 복이 올라앉아 있어요. 그래서 "여보게, 저 닭을 나한테 선물로 주면 좋겠네."

하니까, 착한 장자가 순순히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받는 순간에 그 복이 싹 날아가서 착한 장자의 지팡이로 가서 붙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악덕 장자가 착한 장자에게 다시 그 지팡이를 선물로 달라고 요청해, 지팡이를 딱 받는 그 순간에 그 복이 날아가서 항아리로 올라가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또다시 항아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아,그런데 항아리를 딱 받으려는 순간, 그 복이 또 날아서 장자 머리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악덕 장자가 '복이라는 것은 정말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 공짤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교신자는 복을 많이 받고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제일 부자로 살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 성인들 중에서 부처님처럼 복 많은 분이 안 계세요.

 

 

그런데 전생담에 보면 부처님이 전생에 설산 동자로 있을 때, 진리한 구절을 듣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어요.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랑이가 새기를 낳았는데 먹을 게 없어, 새끼 대여섯 마리도 같이 죽게 생겼어요. 그때 전생에 왕자였던 부처님께서는 호랑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절벽 밑에 떨어뜨려서 호랑이가 잡아먹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전생 500생을 살면서 500번을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공짜로 이루어진 복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 부처님처럼 복 많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보시를 한 결과로 우리 부처님은 한량없는 복을 성취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처님처럼은 못 하더라도 복 짓는 방법을 배워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복을 많이 지어놓으면 누가 빼앗아가려 해도 못빼앗아가는 거예요. 없어지지도 않아요.

 

..

 

베풀고 또 베풀라

 

복 짓는 행이 육바라밀행입니다. 육바라밀 첫째가 뭐예요. 보시<布施>입니다. 그 중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법보시<法布施>입니다. 법을 전하려면, 우선 자신부터 자구 경전을 읽어야 합니다. 지혜를 열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많이 읽어야 되고, 또한 불교서적을 사서 많은 사람에게 읽히도록 선물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설법 들었잖아요. 딱 한가지라도 기억해서  남에게 일러줘야 돼요. 그러면 지혜가 자꾸 자꾸 생기고 발달하는 거예요. 스님들도 중생들을 위해서 뭘 해야겠단 생각하니까. 자꾸 머리가 열리는 거예요. 여러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혜가 열린 거예요.

 

 

그 다음에 무외<無畏>보시. 만일 누군가 아주 두렵고 괜히 불안해 하고 두려워 할 때는 좋은 말로 위로를 해서 두려운 마음, 불안한 마음, 슬픈 마음을 없게 해줘야 합니다. 남이 힘들고 어려울 때, 곱고 부드럽고 진실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덕담을 해서 힘을 실어주고, 희망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이 좋은 일 하면 따라서 기뻐해주고 칭찬해줘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공덕을 성취하느냐 하면, 수희공덕<隨喜功德>을 성취해요. 이렇게 하다보면 남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전 송광사 주지 현봉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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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겨울이 춥습니까? 여름이 따뜻한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춥습니다.영하 60도에서 피는 꽃도 있고, 용광로 600도에서 살아가는 바이러스도 있답니다. 상대적인 관계 때문에 우리가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의 반대는 즐거움인데, 그 고락의 씨앗까지 다 포함하여 일체가 고통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온도 차이가 없는 곳에서는 춥고 더움을 못느끼지만 조금이라도 높고 낮음의 차이가 생기면 그때부터 분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거기서부터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상대적인 모든 것을 다 아울러서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은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이 언젠가는 좋은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봄이 오더라도 언젠가는 봄꽃이 다 흩어지고, 낙엽이 지며, 다시 찬바람이 몰아치는 계절이 옵니다. 그런 가운데도 다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것이 윤회입니다. 이렇게 윤회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청계산 정토산 주지 보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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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은 마음을 고용히 하는 것이요, 생각이 많은 것은 도가 아니다'

한 가지에 일념하는 것이 도입니다. 도라는 것을 우리말로 이야기하면 오직 할 뿐, '뿐'입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을 뿐, 밥먹으면서 신문 보지 않고, 밥 머기으면서 애들문제로 싸우지 않고 밥만 먹는 것입니다. 위빠사나라는 것은 오직 할 뿐입니다. 밥 먹을 뿐, 잠잘 뿐, 법문 들을 뿐이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도를 닦는 사람은 생각이 많으면 안 됩니다. 생각이 많으면 그것이 번뇌입니다.

'도법은 지혜요, 어리석음은 도가 아니다.'

지혜라는 것은 연기법을 잘 아는 것입니다.

 

 

 

전 조계종 포교원장 정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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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푼다는 것은 <금강경>에 나오는 것처럼 무주상으로 보시하고, 베풀고도 교만하지 않아 상대방을 배려하며, 더 나아가서는 주었다는 생각도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무주상으로 보시해야 받는 사람이 빚이 안 됩니다. 내생까지라도 갚을 일이 없어지니 빚이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아무리 내가 베풀며 살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빚쟁이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금생에 빚 짊어지고 내생에 그것 갚느라고 큰 고통을 받게 하면 잘 하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무주상으로 보시한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그 마음 자체가 바꾸어져야 해요. 베푸는 것이 복이고 , 무주상으로 베푸는 것이 더 큰 복이라는 것을 자기가 듣는 이 순간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다더라고 해서는 실천에 옮겨지지를 않아요. 베푼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당장 실천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순간에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떠올라요.

 

 

 

 

고운사 조실 근일 스님 .

..

여러분은 이런 원력을 세워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나에게 모든 진리가 있으니 여러분은 스스로의 그릇을 크게 키워야 합니다. 그릇을 크게 키우려면 믿음이 돈독해야 하고, 그러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힘은 버림으로부터 나옵니다. 나라는 생각, 안다는 생각을 다 버리면 됩니다.

다 버리고 무엇을 하던 일념으로 하면 정이 됩니다. 염불을 하더라도 처음에 비록 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깊어지면 삼매가 됩니다. 그러니 염불을 해도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지, 모이면 남 이야기 하고 남 탓하지 마세요. 남 원망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것과 같습니다. 밥 먹고, 잠자고 공부만 하면 누구나 충분히 깨칩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백년 미만에 다 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정말 할 것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죄를 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오직 주의해야 할 것은 말이니, 말을 적게 하고 비록 말을 하더라도 좋은 말만 할지언정 나쁜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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