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길상사에 나갔더니 내게 온 우편물 속에 '노인교통수당 안내문'이 들어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노인 복지법 제 26조<경로 우대>에 의거 만 65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일정액의 교통수당을 정기적으로 지급하고 있습니다. 귀하도 주민등록상 만 65세가 되어 교통수당 지급 대상자임을 알려드리오니 아래 기간 중에 교통수당 지급신청서를 제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교통수당은 신청자에 한하여 지급함>"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 2동장 명의로 된 이 안내문을 펼쳐보고 나는 기분이 아주 미묘했다. 성북2동은 연락상 편리해서 옮겨 놓은 길상사의 내 주소지이다.
평소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지내다가 이런 안내문을 받아 볼 때면 나는 새삼스레 움찔 놀란다. 어느덧 세월의 뒷모습이 저만치 빠져나간 것이다. 문득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쇼"의 묘비명이 떠올랐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자신의 묘비명에 남기고 싶은 말도 많았을 텐데 그는 덧없는 인간사를 이렇듯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다.
그 어떤 남기는 말보다도 진솔하고 울림이 크다. 누구나 삶의 종점에 이르면 허세를 벗어 버리고 알몸을 드러내듯 솔직해질 것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우물쭈물하면서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는 묘비명이다.
물론 나는 그 교통수당 지급신청서를 휴지통에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시주의 무거운 은혜 속에 살아온 처지에 국민의 혈세까지 축내게 할 수는 없었다.
겨울거처가 산자락에 단칸방으로 된 흩집이라 세상은 몇 년 만의 따뜻한 겨울이라고들 하지만 내게는 코가 시리고 귀가 시린 그런 겨울이엇다. 서까래가 드러난 높은 천장에다 양쪽 문이 홑문이므로 새벽녘이면 방한장비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어서어서 개울에 얼음이 풀리기만을 꽃소식처럼 기다리는 요즘이다.
서양에서 수도원다운 수도원을 최초로 세운 성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을 지난겨울 이 거처에서 다시 펼쳐 보면서 많은 위로와 각성의 기회를 가졌다.
15년전 로마에 들렀을 때 장익 주교님의 친절한 배려로 베네딕도 성인이 초기에 3년간 은수생활을 한 수비아꼬에 있는 '거룩한 동굴'을 찾았던 때의 감회가 새로웠다.
외부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가파른 절벽 가운데 있는 동굴인데, 주위 환경이 마치 우리나라의 산천 경관과 아주 비슷햇다. 앞은 천 길 낭떠러지인 깊은 골짝에 큰 개울물이 흐르고 개울 건너에는 든든하고 덕스런 산이 있다. 그 분은 한 수도자하고만 접촉을 가졌는데, 그것도 밧줄에 바구니를 달아 빵을 전해 주는 간접적인 접촉이었다.
성베네딕도는 뒷날 몬떼 까시노에 수도원을 세워 보다 나은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다. 그중에 몇 가지를 추려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으면 한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말라.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지 말라.
자신의 행동을 항상 살피라.
하느님이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라.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공허한 말, 남을 웃기려는 말을 하지 말라.
다툼이 있었으면 해가 지기 전에 바로 화해하라.
법정<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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