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안톤 쉬낙

다림영 2010. 5. 15.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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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 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세여. 네 너를 사랑하노라...." 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씌어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씌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

가를 왔다 갔다 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휠덜린<1770-1843:독일 서정시인의 시> 시, 아이헨도르프<1788-1857:독일 낭만파 민요시인>의 가곡.

 

옛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 누구인가 모래 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회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하고 많은 날을 도회 都會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교과서 .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 대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 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가극단의 여배우들. 세번재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루트 함순'<1859-1952:노르웨이 작가. 1920년 노벨문학상 수상. 가난, 방랑, 노동이 그의 작품의 주제다>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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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빌려 읽었다.

슬프게 하는것들이 천지에 널려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슬픔은 이런 아름다운 슬픔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다.

오래전  더 가난하고 가진것이 없었던 그 시절에는 모든이의 마음이 순수하고 욕심에 물이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슬픔도 순수했고 별처럼 빛났다.

하늘에 별이 사라진 지금 우리의 가슴에도 별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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