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산에는 꽃이피네.

다림영 2009. 10. 2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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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가 조용하고, 가끔 뒷골에서는 올빼미나 노루 우는 소리라든가 바람소리가 지나가고, 밤으로는 등잔불 켜고 이렇게 벽에 기대 앉아 등잔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 이런 공간이 나한테 주어졌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쁘게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혼자 거기서 조촐한 삶의 기쁨을 누릴 때가 많다.

 

 

그 전에 불일암에 있을 때도 혼자 사니까 가금 사람들이 와서  홀로 지내기 무섭지 않느냐고 묻곤 했다. 무섭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다. 밤이라고 해도 한낮과 똑같은 것이다. 그 골짜기 , 그 산, 그 나무, 그 바위 그대로 있는데 단지 조명 상태가 어두워진 것일 뿐이다. 그런데 마음이 무서움을 지어낸다.

 

 

내가 세속에 있을 때는 무서움을 많이 탔었다. 특히 시골집이니까 변소에 가려면 곡 할머니를 앞세우고 갔다가는 빨리 튀어나오곤 했다.

그러다가 무서움이 사라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지리산 쌍계사에 있을 때인데 한번은 섣달 그믐날 무슨 일로 밖에 나왔다가 화개장에서 내려 거기서부터 시오리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데 전혀 앞이 안 보였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반은 뛰다시피 하고 갔더니 옷이 전부 땀에 젖어 있었다.

그 뒤로부터는 무서운 생각이 사라졌다.

무서움이란 것이 내 마음 안에서 오는 것임을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다.

 

 

 

사실 혼자 사는 사람들만 외로움을 느기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면 다 외롭기 마련이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무딘 사람이다.

 

 

물론 너무 외로움에 젖어 있어도 문제이지만 때로는 옆구리께를 스쳐가는 외로움 같은 것을 통해서 자기 정화, 자기 삶을 맑힐 수가 있다. 따라서 가끔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

내 경우는 완전히 홀로 살이가 되어 이제는 고독 같은 것도 별로 느끼지 않고, 그저 홀가분하게 지낼 뿐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좀 괴팍할 것이다. 좋게 말하면 개성들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그래서 혼자 살기 마련이다. 그것도 습관인 것 같다. 그러나 나 같은 경우는 홀로 있음으로써 함께 있을 수 있다. 너무 한데 얽혀 함께 지내다 보면 더 불어 살아가는 고마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내가 수도 생활을 하는지 그 의미를 잃게 된다. 또한 자기 개성이나 자기 빛깔 같은 것도 상실된다.

 

 

나는 혼자 살기 때문에 차 타고 어디를 지나가다가도 산자락에 외떨어져 있는 집을 보면 그러헤 반가울 수가 없다. 한번 가보고 싶고, 어떤 사람이 사는가 들여다보고도 싶다.

거창한 집이 아니고, 조그만 오두막 같은 걸 보면 무척 정답고, 가서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기웃거려 보고 싶다.

 

 

이제 어느 곳을 가나 큰 절 주변은 거의 오염되었다 .환경만 오염된 것이 아니고 절 자체도 과소비를 하는 곳이 많다. 생활 환경 자체도 오염되어 절 같지도 않고, 따라서 우리 같은 경우는 절밥을 오래 얻어먹은 습관 때문에 어딜 가면 눈에 띄고 귀에 거슬리는 게 많다.

 

 

이제 홀로 떨어져나와 살게 되니 보지 않고 듣지 않으므로 마음 쓸 일도 없다. 다만 이렇게 살게 되니 보지 않고 듣지 않으므로 마음 쓸 일이 없다. 다만 이렇게 살면서도 과연 수도자로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이런것이 화두처럼 내게 늘 과제로 떠오른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세상이든 다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마음이 진정한 인간의 마음으롯 맑고 투명하다면 그 그림자인 세상도 맑고 투명해진다.  세상에서 온갖 사건, 사고와 비리들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맑고 향기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꼭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자기 존재에 대한 그때 그때의 물음, 나는 누구인가, 어떤 것이 내 온전한 마음인가, 거듭거듭 물음으로써 삶이 조금씩 개선되고 삶의 질도 달라진다.

우리가 너무 외부적인 것, 외향적인 것, 표피적인 것, 이런 데만 관심을 갖다보니까 마음이 황폐해졌다.옛날보다 는 훨씬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마음들은 더 허전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현대 문명의 해독제는 자연밖에 없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기댈 데가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 존재와 격리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크게 보면 우주 자체가 커다란 생명체이며, 자연은 생명체의 본질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자연의 한부분이다. 우리가 커다란 우주 생명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은 함부로 망가뜨릴 수 없다.

동양의 전통적인 생각 속에서는 커다란 산이라도 하나의 생명체로 여겼다. 그래서 등산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꼭 입산 산에 들어간다고 했지 산에 오른다는 말을 감히 하지 않았다.

 

 

자연은 우리가 하나의 수단으로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생명의 근원으로서, 커다란 생명체로 여겨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오늘과 같이 지구의 환경오염이나 과소비 문제가 안 생겼을 것이다.

 

 

자연을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문제가 생겼다. 산에서 살다보면 자연처럼 위대한 교사가 없다.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 그것은 관념적이고 피상적인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얻어듣는 것. 그것이야말로 근본적인 것이고 그때그때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또 자연은, 태양과 물과 바람과 나무는 ,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무상으로 준다. 우리는 그걸 감사하게 받아쓰면서 활용해야 하는데, 그것을 허물고 더럽히는 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생명의 근원을 우리가 자꾸 허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음을 맑게 하고 자연 속에서 많은 생명체들과 교감하며 나누면서 사는 기쁨, 그것을 내가 낱낱이 다 알리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또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

사람은 어떤 묵은 데 갇혀 있으면  안된다. 꽃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꽃이라면 어제 핀 꽃하고 오늘 핀 꽃은 다르다. 새로운 향기와 새로운 빛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자기가 살던 집을 훌쩍 나오라는 소리가 아니다. 낡은 생각에서 낡은 생활 습관에서 떨치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눌러앉아서 세상 흐름대로 따르다 보면 자기 빛깔도 없어지고 자기 삶도 없어진다. 자주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남의 장단에 의해서 , 마치 어떤 흐름에 의해서 삶에 표류당하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 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생명은 늘 새롭다. 생명은 늘 흐르는 강물처럼 새롭다. 그런데 틀에 갇히면, 늪에 갇히면, 그것이 상하고 만다. 거듭거듭 둘레에 에워싼 제방을 무너뜨리고라도 늘 흐르는 쪽으로 살아야 한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일단 새롭게 살기가 누구보다도 손쉬울 것이다. 나는 이렇게 묻는다. 진짜 어떻게 사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늘 스스로 묻는다. 그러면서 똑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싶진 않다. 늘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가령 서울에 오면 가끔 큰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데, 나하고는 전혀 상관도 없는, 내 전공분야하고는 상관도 없는 책들을 고르기도 한다. 그것들을 읽어 보면 거기서 얻을 게 많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는 시오노 나나미 라는 일본 작가의 책을 읽어봤더니 매력 있는 남성에 대한 이론이 있었다.

 

 

자기 빛깔을 지니고, 세속에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매력 있는 남성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 책을 통해서 과연 나는 남으로부터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삶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돌아볼 수 있다. 내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내 전공과는 상관없는 책이나 사상을 접하곤 한다. 나는 그렇게 늘 새롭게 살고 싶다.

 

 

내가 전에 살던 불일암에는 서너 달에 한 번식 가끔 가다 들른다. 요즘 강원도에 살면서 거처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전기도 안 들어 오고 전화도 없는데, 그전 내 성격 같아서는 기를 쓰고라도 전기를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사는 의미가 없다. 어딜 가나 전기는 있다.

 

 

또 일단 전기가 들어와 보라. 이제 냉장고다, 텔레비전이다, 오디오다, 비디오다, 그밖에 무슨 빵 굽는 기계다. 세탁기다. 이게 다 곁들여 올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그런 산중에서 사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요즘에 와서는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몰라도 주어진 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대로 수용하는 것으로 돌아가고 있다.

 

 

 불편하다는 것, 그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가 너무 편리하게 살다 보니까 잠시라도 전기가 나가고 전화가 끊어지면 안절부절 못하고 모든 기능이 정지된다. 그러나 내가 사는 곳에는 그런 것들이 아예 없고, 또한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 땅에 살면서도 전기세와 수도세를 내지 않는다. 따라서 내 자신의 어떤 잠재력,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잠재력이 마음껏 드러난다.

지난 해 내가 변소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전에는 변소가 없었다. 사람들이 들으면 조금 언짢은 소리겠지만, 비 오는 날은 우산을 쓰고 밭에 가서 구덩이를 파 가지고, 거기서 동물 처럼 배설하고는 덮어 버렸다.

 

 

그런데 비가많이 오거나 눈이 내리면  그것도 불편했다. 그래서 개울가에서 막돌을 주워다가 쌓아 올리고 굴피로 지붕을 덮어 뒷간을 하나 만들었다.

혼자 하니까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 달 가까이 걸렸는데 좀 불편하지만 최소한 내가 노력해서 그런 건조물을 짓고 나니까 훨씬 흐뭇하고 보람이 있었다.

 

 

 

우리가 너무 편리한 문명의 이기에만 의존하다 보니까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자꾸만 소멸되어 간다. 그리하여 문명의 노예처럼, 조금만 문명의 장치가 고장나도 옴짝 못할 정도가 되었다.

 

 

내가 사는 곳에는 다행이 전기가 안들어오기 때문에 불편이야 하지만 마음은 더 편하다.

전에는 촛불을 켰는데 겨울에는 외풍에 초가 팔락거려서 요샌 램프를 켠다. 저녁 예불 끝에 램프를 켜고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월이 고개를 넘는 것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만일 전기가 들어오고 여러가지 편리한 장치가 있다면 그걸 누리지 못할 것이다.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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