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는 시간
우리처럼 한평생 산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산은 곧 커다란 생명체요,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 속이다.
산에는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일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가 벽돌과 시멘트로 된 교실에서가 아니라, 때묻지 ㅇ낳은 자연의 숲속에서 움텄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법정스님 수상집 (물소리 바람소리) 중에서>
얼마전 존경하는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님을 만났더니 이런 일화를 들려주셨다. 그분이 한 여름에 법정 스님을 찾아 뵌 적이 있어다고 한다. 불일암으로 난 오솔길을 오르는데 날은 덥고 주위에 매미소리가 요란했다. 그래서 이런 날은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이나 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불일암에 도착하니 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낮잠을 주무시는 게 아닌가 하고 오두막 가까이 가서 스님을 부르자, 먼 뒤꼍에서 걸어나오시는 것이어다. 그래서 '스님, 이 무더운 날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하고 묻자 스님게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졸음에 빠지지 않으려고 칼로 대나무를 깎고 있었습니다' 졸지 않기 위해 그 일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칼도 날카롭고 대나무도 날카로우니 깜박 졸아다간 위험하다. 한여름에 그것도 혼자 지내는 거처이니 낮잠을 즐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졸지 않고 활짝 깨어 있기 위해 칼로 뾰족한 대나무를 깎고 있었다니.
나는 그동안 인도와 미국 등지를 다니며 여러 명상법을 배웠다. 이땅에도 오늘날 많은 새로운 수행법들이 유입되고 있음을 본다. 어떤 이는 남방불교의 위파사나를 들고 와 그것이야 말로 개달음의 지름길이라 역설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냥 졸음에 빠져 삶을 무가치하게 보내는 것이 방편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매순간 자신을 점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세상과 타협하는 일보다 더 경계해야할 일은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라고 나는 들었다.
스님의 그 대나무 깎는 일화는 두고두고 내게 졍책이 되었다. 대나무만 보면 그 일화가 생각났다. 스님은 홀로 사는 즐거움을 말씀하시지만, 그것이 얼마만큼이나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해야 하는 일인가를 이 일화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 중국의 선승 앙산은 깨달음을 얻은 뒤에서 부엌에서 계속 일을 했다고 하지 않은가. 그 이유를 묻는 스승에게 앙산은 대답하고 있다.
'저는 지금 소가 채소밭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고 있는 중입니다.'
진정한 자유가 내적 절제에 있음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법정스님의 대나무 깎는 일화도 그것과 마찬가지 속뜻으로 내 귀에 들린다.
스님은 또 어느 사석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줄곧 혼자 살고 있다. 그러니 내가 나를 감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행이 되겠는가. 홀로 살면서도 나는 아침 저녁 예불을 빼놓지 않는다.
하루를 거르면 한 달을 거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삶 자체가 흐트러져 버린다.
명상과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유의 획득에 이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진정한 내적 자유를 품기 위해서는 거듭된 자기 점검이 필요함을. '도끼로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와야 하는'스님의 홀로 사는 삶이 일깨우고 있다.
<엮은이>
홀로 있는 시간
내가 사는 곳은 겨울이면 영하 20도를 오르내린다. 지대가 높고 또 개울가라 무척 춥다. 대관령이 영하 몇 도라고 일기예보가 나가는 걸 보면 내가 사는 곳이 대개 4.5도 더 낮은 듯하다. 얼음이 두꺼워 개울에서 물을 길어올 대는 도기로 얼음을 깨야만 한다. 깨고 나면 도 금방 얼어 붙는다.
추운지는 별로 모르겠지만 숨을 쉬면 코가 찡찡해지고 눈이 어릿어릿하다. 긎 ㅓㅇ도인데 견딜 만은 하다. 이보다 더 추운 지방에서도 사람이 살지 않는가. 계절이라는 게 추울 땐 추워야 하고 더울 땐 더워야 한다.
산중은 사실 여름보다는 겨울이 더 지내기 좋다. 여름도 내가 사는 곳은 지대가 높아 모기나 파리가 없기 때문에 아주 쾌적하지만, 산중이라는 곳이 다 그렇듯 겨울이 차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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