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옛시 따라가며 지금 세상 바라보기/오여 김창욱

다림영 2009. 10. 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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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히 사는 즐거움

 

사람사는 번잡한 곳에 초막 한 칸 지었는데

오고가는 시끄런 소리 들리질 않구나.

묻노니 그대여, 어찌 그럴 수 있나요?

마음이 멀어지니 땅이 저절로 벗어나더이다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잘 익은 국화를 따며

멀리 남쪽 산을 그윽히 바라보니

으스름 산기운은 한층 더 아름답고

나는 새 짝을 지어 제 집으로 돌아가네.

아, 이 가운데 내 사는 속 맛이 있건마는

이 소식 알리려 하나 설명할 말을 잊었네.

 

 

 

'귀거래사'로 유명한 동진의 처사 도연명의 명품입니다. <문선>에는 '잡시'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으나, <도정절집>에는 '음주'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기도 합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경치 좋고 아늑한 곳에 별장을 짓는다. 주말농장을 만든다 하며 바쁘게 다니지만, 도연명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참다운 즐거움은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만이 얻을 수 있으니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표현하고자 하여도 형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하니까요.'마음이 멀어지니 땅이 저절로 벗어난다'고 한 시인의 경지가 부럽습니다.

 

 

달 밝은 밤에 매화를 노래함

 

고즈넉이 창가에 기대서니

밤 기운 차가운데

 

매화 핀 가지 끝에

아, 둥근 달이 걸렸구나

 

여기 다시 살랑바람

청해서 무엇하랴

 

맑은 향 스스로 피워내어

정원 가득 채웠거늘

 

 

설중매라 하였습니다만, 벌써 이 저기서 매화 핀 소식이 들려 옵니다. 옛부터 선비들은 추위를 무릅쓰고 피어나는 매화의 그 강인하고도 고결한 기품을 사랑하여 매화를 사군자의 으뜸으로 삼아 높이 대접하였지요.

 

북송때의 시인 임보 같은 이는 워낙 매화를 좋아하여 매화를 아내로 삼아 평생 벼슬도 하지 않고 매화나무를 가꾸고 매화시를 쓰며 유유자적 살았다고 합니다만, 우리의 퇴계선생도 임보 못지 않게 매화를 좋아하였던지 매화와 의형제를 맺고선 어디를 가나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며 수십여 수의 매화시를 지었습니다.

 

특히 이 시의 후반부는 도학자로서의 퇴계선생이 후생들에게 주는 은근하고도 간절한 가르침이 감춰져 있는 듯 하여 더욱 소중합니다.

 

매화가 봄바람으로 하여금 향기를 선동케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스스로 향기를 피워내어 온 집안을 청향으로 가득 채우듯이, 학덕이란 의도적으로 선전하고 광고하지 않아도 깊어지고 넓어지면 저절로 널리 널리 소문이 퍼지는 법이니, 서두르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이 행간에 함축되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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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또 들여다 봐도 곳곳에 그윽한 경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옆에 두고 내내 보면 참 좋겠다.

생의 길잡이 되어줄 참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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