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월든/데이빗소로우/강승영옮김

다림영 2009. 9. 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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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카토 양반은 그의 <전원생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이책은 내게는 영농 잡지와도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데, 내가 본 적 있는 유일한 번역본은 이 대목을 엉망으로 해석해 놓았다.

 

"농장을 살 때는 탐을 내서 바로 달려들지말고, 먼저 그것을 머릿속에 넣고 이리저리 굴려보라. 그것을 살펴보는 데에 수고를 아끼지 말 것이며. 한번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만약 그것이 좋은 농장이라면 자주 가서 보면 볼수록 더 마음에 들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어떤 농장을 탐내 바로 달려들어 사지는 않을 것이며, 살아생전 계속 그것을 둘러 볼 생각이다. 그리고 죽어서 거기에 먼저 묻히면 그 땅은 더욱더 내 마음에 들게 될 것이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쫒기듯이 인생을 낭비해가면서 살아야 하는 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어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제때의 한 바늘이 나중에 아홉 바늘의 수고를 막아준다고 하면서 오늘 천 바늘을 꿰매고 있다. 일, 일 하지만 우리는 이렇다 할 중요한 일 하나 하고 있지 않다. 단지 무도병舞蹈病에 걸려 머리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을 뿐이다.

 

 

내가 만약 불이 난 것처럼 지금 교회의 종을 몇 번 치기라도 하면 콩코드 주변의 자기 농장에서 일하는 모든 남자들, 오늘 아침가지만해도 그처럼 여러 가지 일로 바쁘다고 변명하던 이 남자들은 물론 아이들과 여자들까지도 만사를 제쳐두고 종소리를 듣고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 불을 끄려는 것보다는 불구경을 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어차피 타버릴 것이라면, 또 불을 낸 것은 우리가 아니니까 하면서 말이다.

 

 

 

시간은 내가 낚시질 하는 강을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강물을 마신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 모래 바닥을 보고 이 강이 얼마나 얕은가를 깨닫는다. 시간의 얕은 물은 흘러가 버리지만 영원은 남는다. 나는 더 깊은 물을 들이켜고 싶다. 별들이 조약돌처럼 깔린 하늘의 강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 나는 셈을 전혀 할 줄 모른다. 알파벳의 첫글자도 모른다. 나는 태어나던 그날처럼 현명하지 못함을 항상 아쉬워 한다.

지성은 식칼과 같다. 그것은 사물의 비밀을 식별하고 헤쳐 들어간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나의 손을 바쁘게 놀리고 싶지 않다. 나의 머리가 손과 밭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상의 기능이 머릿속에 모여 있음을 느낀다. 어떤 동물이 코와 앞발로 굴을 파듯 나는 내 머리가 굴을 파는 기관임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독서를 잘하는 것,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오늘날의 풍조가 존종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이 드는 운동이다. 그것은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과, 거의 평생에 걸친 꾸준한 자세로 독서를 하려는 마음가짐을 요한다. 책은 처음 쓰여졌을 때처럼 의도족으로 그리고 신중히 읽혀져야 한다.

 

 

대체로 나는 시간이 가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하루는 마치 내가 해야 할 일을 덜어주려는 듯이 지나갔다. 아침이구나 하면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해놓은 일은 없었다. 새처럼 노래 부르는 대신 나는 나의 끝없는 행운에 말없이 미소지었다. 참새가 집앞의 호두나무에 앉아 지저귈 때 나는 혼자서 키득키득 웃었다.

이웃음은 차라리 새처럼 노래 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것으로 참새는 내 둥지에서 나는 그 소리를 들었으리라. 나의 하루하루는 이교도의 신의 이름을 붙인 한 주일의 어느 요일이 아니었으며, 또 24시간으로 쪼개져 시계의 재깍재깍 하는 소리에 먹혀들어가는 그런 하루도 아니었다. 나는 푸리족 인디언처럼 살았다. 그들에 관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로 나타내는 데에 한 가지 말밖에 없다. 그래서 어제를 의미할 대는 등뒤를 가리키고, 내 일은 자기 앞을, 그리고 오늘은 머리위를 가리켜서 뜻의 차이를 나타낸다."

 

..

..나의 생활은 그 자체가 오락이었으며 끝없는 신기로움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집안일은 즐거운 소일거리였다. 마루가 더러워지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와 침대보를 짐 하나로 싸는 식으로 해서 모든 가구들을 집 밖의 풀밭위에다 옮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마룻바닥에 물을 끼얹고 호수에서 가져온 흰 모래를 그 위에 뿌리고는 마루가 개끗하고 하얗게 될 때까지 대걸레로 북북 문질렀다.  마을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끝낼 무렵이면 집 안은 아침 햇볕으로 충분히 말랐으므로 나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명상을 계속 할 수 있었다.

 

 

늦은 밤, 나는 마차들이 덜커덕거리며 다리를 건너는 소리(밤에는 이 소리가 어떤 소리보다도 멀리까지 들린다)와 개들의 짖는 소리, 그리고 때로는 멀리 있는 어느 외양간의 앞마당 에서 들려오는 암소의 구슬픈 음매 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는 동안 호숫가는 온통 황소개구리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찬다. 호수에 수초는 별로 없어도 개구리들은 있었던 것이다.

 

 

조용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대 자연 속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속에, 또 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모든 경치 속에 너무나도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그것은 나를 지탱해주는 공기 그 자체처럼 무한하고도 설명 할 수 없는 우호적인 감정이었다.

 

 

 

 

사색을 함으로서 우리는 건전한 의미의 열광 속에 빠질 수 있다. 마음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우리는 행위들과 그 결과들로부터 초연하게 서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만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격류처럼 우리의 옆을 지나치게 된다.

우리는 자연 속에 전적으로 몰입되어 있지는 않다. 나는 시냇물에 흘러가는 나무토막일 수도 있고, 또는 하늘에서 그 나무토막을 내려다 보고 있는 인드라 신 일수도 있다. 나는 어떤 연극공연에 감동을 받을 수도 있지만, 반면에 나와 훨씬 더 이해관계가 있을지 모르는 실제 사건에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인간적 실재로서만, 다시 말하면 여러가지 사고와 감정의 장소로서만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물로 나 자신으로 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어떤 이중성을 느끼고 있다.

 

 

 

 

어떤 때는 한 쌍의 솔개가 하늘을 날면서 높이 치솟았다가는 내려오고, 서로 가까이 갔다가는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나 자신의 생각을 구현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또 산비둘기들이 이쪽 숲에서 저쪽 숲으로 약간 떨리는 듯한 날갯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긴급히 전해야 할 통신문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썩은 나무 그루터기 밑을 괭이로 파헤치던 중에 둔중한 몸집을 한 이국적인 점들이 박힌 도롱뇽이 나오기도 했다. 이집트와 나일 강 냄새가 물씬 나는 이놈은 실은 우리와 같은 시대 생물이다.

내가 일을 멈추고 괭이에 기대어 서 있노라면 밭고랑 어느 곳이었건 간에 이러한 소리들과 광경들을 듣거나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이 땅이 제공하는 무궁무진한 여흥의 일부였던 것이다.

 

 

 

어떤 때 나는 그날의 김매기 작업이 끝나면 아침부터 호수에서 성급한 마음으로 낚시질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로 가서 어울렸다. 그는 물 위에 떠있는 오리나 나뭇잎처럼 아무 말 없이 미동도 하지 않고 오직 낚시에만 몰두해 있었는데, 내가 그에게 갈 때쯤이면 이 철학, 저 철학을 실천해본 끝에 자신은 수도승의 한사람이라는 신념을 굳히고 있었다.

 

 

 

내게 월든 호수는 누가 미리 파놓은 우물과도 같았다. 연중 항상 맑은 이 호수의 물은 그중 4개월간은 차갑기까지 한 것이다. 그때의 호숫물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가장 좋은 물은 아닐지라도 최상급의 물중의 하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겨울에 대기중에 드러난 물들은 대기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샘물이나 우물물보다 차갑다.

 

..

또 월든 호수는 여름에는 그 깊이 때문에 햇빛이 드러나 있는 대부분의 물처럼 따뜻해지는 일이 없다. 아주 더운 날에는 나는 늘 한통의 물을 길어서는 지하 저장실에 넣어두곤 했는데 , 밤 사이에 차가워져서는 그 다음 날 낮 동안에도 시원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샘의 물을 길어오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호숫물은 일주일이 지나도 길어온 날과 물맛이 같았으며 펌프 냄새도 나지 않았다.

 

 

 

 

만약 우리의 낮과 밤이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면, 우리의 인생이 꽃이나 방향초처럼 향기가 난다면, 또 우리의 인생이 좀 더 탄력적이 되며, 좀더 별처럼 빛나고, 좀더 불멸에 가까운 것이 된다면, 우리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그때 자연 전체가 우리를 축하할 것이며 우리는 스스로를 시시각각으로 축복할 이유를 갖는다.

 

 

 

 어쩌면 우리는 그의 마음의 깊이와 감추어진 바닥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의 호수가 어떻게 기울고 있으며, 그 인접 지역이나 환경이 어떠한지를 알기만 해도 될 것이다. 만약 그의 호수가 고산준봉과  아킬레우스의 고향처럼 험준한 기슭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 산봉우리들이 그의 가슴 위에 우뚝 서서 그의 가슴에 모습을 비추고 있다면, 그것은 그의 내부에도 이에 상응하는 깊이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낮고 평평한 기슭은 그가 그 면에서 깊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우리의 신체에서도 대담하게 불숙 나온 이마는 그것에 상응하는 생각의 깊이를 표시한다. 우리 내부에 있는 각기의 작은 만들, 즉 각개의 성향의 입구에는 모래톱이 하나씩 있다. 그 모래톱은 어느 기간동안 우리의 항구역할을 하며 우리는 그 속에 갇히게 되고 부분적으로 물과 차단이 된다.

 

 

 

 

이런 성향은 대체로 어떤 변덕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고 그 형태와 크기와 방향은 고대로부터의 융기의 축인 갑에 의하여 결정된다. ...

 

 

각개인이 성인이 되어 세상에 나갈 무렵이 되면 그러한 모래톱이 어디선가 수면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실이지 우리의 항해 기술은 서툴기 짝이 없기 대문에 우리의 사상은 흔히  항구가 없는 해안가에서 방황하거나 시라는 이름의 얕은 만에서 배회하기가 일쑤인 것이다. ..

 

 

 

 

 

해가지면 모래도 흐름을 멈춘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흐름은 다시 시작되며, 갈라지고 또 갈라져 수많은 흐름으로 나뉜다. 혈관의 형성 과정도 아마 비슷한 것이리라.

 

 

인간이란 것이 얼었다가 녹고 있는 진흙의 덩어리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사람의 손가락 끝은 진흙의 방울이 응결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얼었다가 녹고 있는 육신의 덩치에서 그 한  한계점까지 흘러 나간 것이 바로 손가락과 발가락이다. 보다 온화한 환경 아래에서는 인간의 육체가 어디까지 확장되어 흘러갈지 그 누가 알겠는가? 손은 열편과 엽맥을 가진 종려나무 잎이 아닌가? 귀는 상상의 날개를 편다면 귓볼 또는 방울을 가지고 있으면서 머리 옆에 붙어 있는 나무 이끼라고 할 수 있으리라. 입술은 동굴같은 입의 위아래로 비어져 나와 처져 있다.

 

 

코는 분명히 응결된 진흙의 방울이나 종유석이다. 턱은 좀더 커다란 진흙의 방울이며. 얼굴전체에서 흘러내린 것이 만난 곳이다.

뺨은 이마에서 얼굴의 골짜기로 미끄러져 내려오다 광대뼈에 부딪혀 퍼진 것이다. 나뭇잎이나 풀잎의 둥그런 열편도 크든 작든 잠시 망설이고 있는 두툼한 방울들이라고 할 수 잇다. 이 열편들은 잎의 손가락들이 열편의 수효만큼 잎은 여러 방향으로 흐르려는 경향을 가지고있다.

..

이리하여 이 언덕 비탈 하나가 대자연의 모든 움직임의 원칙을 보여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땅속에서 스며 나와 흐르는 시냇물처럼 풀잎은 차분하게 자란다. 사실 풀잎과 시냇물은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6월의 한창 때에 시냇물이 마르면 풀잎이 물을 공급하는 수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축들은 이 영원한 푸른 시내에서 물을 마시며, 풀 베는 사람들은 여기서 일찌감치 그들의 겨울 채비를 해 놓는다. 사람의 생명도 풀잎과 다름없다. 목숨 자체는 시들어 버리지만 뿌리는 살아남아 영원을 향하여 그 푸른 잎을 내 뻗는 것이다.

 

 

 

물가의 선을 따라 굽이치는 저 얼음 가장자리의 매끄러운 곡선은 얼마나 보기 좋은가! 호수의 얼음은 때 아닌 강추위 때문에 아직도 꽤 단단하며 물에 촉촉이 젖어 있다. 물결무늬를 띤 모습이 마치 궁전의 마루와도 같이 보인다. 그 불투명한 표면 위로 동풍이 불어 지나가지만 얼음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러나 그 너머는 살아 있는 물의 표면이다. 이 리본처럼 길게 뻗어 있는 호숫물이 햇빛 속에서 반짝이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부여하는 어떠한 표면도 진실만큼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오직 진실만이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 대체로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거짓된 입장에 있다. 천성의 어떤 약함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사정을 지레짐작하고 우리를 그 속에 맞추어 넣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시에 두 가지 사정에 처해 있으며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두 배나 어려운 것이다.

 

 

 

정신이 온전할 때 우리는 사실만을, 즉 실제로 존재하는 사정만을 응시한다. 당신의 의무감으로 느끼는 것을 말하지 말고 진실로 내부에서 느끼는 것을 말하라. 어떤 진실도 거짓보다는 낫다.

 

 

 

당신의 인생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그것을 똑바로 맞이해서 살아나가라. 그것을 피한다든가 욕하지는 마라. 그것은 당신 자신만큼 나쁘지는 않다. 당신이 가장 부유 할 때 당신의 삶은 가장 빈곤하게 보인다. 흠을 잡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흠을 잡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당신이 비록 구빈원의 신세를 지고 있더라도 그곳에서 유쾌하고 고무적이며 멋진 시간들을 가질 수 있다.

 

 

지는해는  부자의 저택이나 마찬가지로 양로원의 창에도 밝게 비친다. 봄이 오면 양로원 문앞의 눈도 역시 녹는다. 인생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곳에 살더라도 마치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한 마음과 유쾌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감기는 빛은 우리에겐 어두움에 불과하다.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날만이 동이트는 것이다. 동이 틀 날은 또 있다. 동이 틀 날은 또 있다. 태양은 단지 아침에 뜨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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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일주일을  들고 있던 책이다.

페이지도 만만치 않았고 글 내용도 쉽지 않았다.

자연을 얘기하는 책이었는데 왜그렇게 힘들게 읽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살펴 보니 왜 그렇게 읽었을까 싶다.

아무래도 많은 페이지에 부담을 가졌던 것이고 빨리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을 테고

너무나도 사소하고 평범한 이야기 여서인지도 모른다.

그 평범속에 진리와 지혜가 숨어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말이다.

다시 돌아가 체크해놓은 것을 읽고 쓰고 하다보니 이렇게 마음에 들어올 수가 없는 것을 .

언젠가 여유가 된다면 책을 사서 옆에 두고 한번씩 이곳 저곳 뒤적여야 하겠다.

자연과 인간과 그리고 사소한 삶의 이야기를 귀하게 가슴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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