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세기를 넘나든 조선의 사랑/권현정

다림영 2009. 7. 29.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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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동안 이어진 우정

 

"불후의 천재, 시대를 잘못 만난 이단아, 구습에 얽매인 조선을 바꾸고 싶어한 혁명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기인...허균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그러나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천재나 혁명가로 평가받은 것은 사실 현대에 와서다. 살아생전 그는 행실이 경박하고 음란하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그 때문에 몇 차례 파직을 당했다. 실록은 허균을 무시무시한 저주의 문장들로 묘사하고 있다.

 

성품이 사남고, 행실이 개돼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며 ,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으로서 도리가 전연 없었다. 윤기를 멸시하고 상례를 폐지하여 스스로 자식의 도리를 끊었다.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라고 표현할 만큼 당시에는 허균을 증오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허균이라는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참 어렵다. 그에게는 그만큼 복잡한 요소들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

 

자유롭고 거침없었으나 철저하게 유교를 떠받들던 조선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남자. 이 자유분방한 천재는 그가 교류했던 기생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과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부안의 명기 매창이었다. 허균은 자신의 글에서 매창에 대해 이런 총평을 내렸다.

 

 

계생<매창>은 부안의 기녀다. 시에 밝고 글을 알았으며 노래와 거문고에도 능하다. 절개가 높아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막역하게 사귀었다. 비록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지만, 결코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이어질 수 있었다.

 

 

 

 

매창과 허균이 우정을 쌓은지 9년째 되는 해의 일이다. 그무렵 매창도 잘 알고 지내던 부윤이라는 수령이 있었는데 그가 떠난 후 고을 사람들은 부윤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매창이 선정을 베푼 부윤을 생각하면서 비석옆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떠나버린 허균을 원망했다'는 소문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 소문을 접한 허균이 매창에게 편지를 띄웠다.

 

 

계량<매창>에게

 

그대가 달을 바라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바로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그대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할 따름이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기유년<1609>정월 허균

 

 

매창을 잊지 못하던 허균은 그해 가을 또 한통의 편지를 보낸다.

 

 

계량<매창>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그대는 분명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며 웃을 거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동안이나 돈독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제 와서야 진회해<秦淮海>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겠고, 선관<禪觀>을 하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는 것을 알겠소.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있을런지.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기유년 <1609>9월 허균

 

 

 

10년동안 한결같은 우정을 나누고, 불법과 참선의 세계를 알려준 허균의 영향 때문일까. 첫사랑 유희경을 못 잊어 가슴을 쥐어뜯던, 그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고통에 몸부림치며 한 맺힌 시를 써 내려갔던 매창은 점차 도교적인 사상이 물씬 풍기는 시들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고독과 절망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매창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듯한 시를 짓는다.

 

 

새장에 한 번 갇히니 다시는 못 나가오

곤륜산 높은 낭풍봉이 어디에 있소

푸르른 들에 해가 저물어 하늘이 어둡고

구령산에 밝은 달이 꿈속의 넋마저 괴로워라

야윈 모습으로 홀로 수심 깊어 서 있는데

황혼에 까마귀 나무 가득 지저귀고

긴 털과 병든 날개 죽을 때를 재촉하니

구슬피 울며 해마다 깊은 못을 생각하네

 

 

..

'어차피 목숨을 받고 태어난 이상 소멸은 정해진 이치다.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지만, 세상에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처량하고 슬플 뿐이다. 어차피 온전하게 기댈장소도, 또 기댈 사람도 없다면...혼자서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렇게 믿었던 매창은 바닷가 움집으로 홀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해여름, 움집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은 한양에 있는 허균의 귀에도 들어갔다. 두사람이 만난지 꼭 10년 째 10년 지기였다면 20년, 30년이 넘는 세월도 벗으로 지낼 수 있었으리라. 허균은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면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펼친 듯하고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흩어버리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더니

선약을 훔쳐서 인간세상을 떠나버렸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에 등불은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에는 향내 아직 남아 있어

이듬해 작은 복사꽃이 피어날 때쯤이면

그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아오리요

 

 

처절하구나, 반첩여의 부채여

서글프구나, 탁문군의 거문고여.

꽃잎 흩날릴 때 한이 쌓이고

난초가 시들 때 상심 쌓이네

봉래섬에 구름, 흔적없이 사라져버리고

푸르는 바다에 달도 이미 잠기었구나

앞으로는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앙상한 버들이 그늘을 만들지 못하겠구려.

 

 

 

매창은 죽어 부안읍 남쪽 봉덕리에 묻혔다. 정확히 누가 그녀를 묻었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부안의 기생들이었거나 그녀를 사모했던 어떤 사람이 눈물을 뿌리며 묻어주었을지도 모른다. 장례에 대해서는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매창의 시신이 묻힐 때 평생 동안 그녀와 동거동락했던 거문고글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매창은 살아 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욱 전설이 된 사람이다.

 

 

매창과 10년 우정을 쌓았던 허균. 그의 최후는 매창보다 더 비극적이었다. 매창이 죽은지 8년만에 허균은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역모죄 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역모에 대한 신문을 받을 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자복을 했지만 허균은 끝까지 역모를 부인했다.

..

..

 

기생이었지만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매창, 그녀는 당시 최고의 문인이었던 유희경과 허균을 운명적으로 만나 교류했다.후대 사람들은 매창에 대해 어리석지만 원초적인 궁금증을 던진다. 매창이 남긴 애절한 시들의 주인공은 정말 유희경 한사람 뿐이었을까. 매창과 허균이 지낸 10년 세월을 그냥 우정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

 

 

 

권현정

한국에서 국문학 전공했고, 일본에서 사회학 공부했다.1991년부터 지금까지 방송현장을 떠나지 않고 교양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중이다.

<인간극장><추적60분><역사스페셜><일요스페셜><병원24시><기동취재현장>등을 집필했다.

저서로는 <살라말리쿰타니아><백일 먼저 온 선물><수다로 푸는 방송작가로 가는길>(공저)일본어문집<지금 일본의 하늘 아래서는>등이 있다.

 

 

"왜 조선의 여인들을 기억할 때 현모양처나 열녀, 아니면 구중궁궐에서 암투를 벌이던 여인들만을 떠올려야 할까? 아무리 여자들에게 불합리했던 시대라고는 하나, 자신의 '사랑'에 가장 솔직하고 충실했던 여인들은 과연 없었을까?

그 의문을 품고 새로운 눈으로 기록을 뒤진 것이 이 책의 출발이었다.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그녀들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들었지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아홉가지 사랑만 추렸다. 시대도, 운명도 , 죽음마저도 막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작가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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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목숨과도 바꿀 기막힌 사랑의 길을 다녀왔다.

이틀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도저히 인정받을 수 없던 시대에 굉장한 사랑이 있었다.

영혼을 넘나들며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었다.

 

 

 

 우물처럼 깊은 마음 안에서 '사랑' 이라는 말을 퍼올리면 

 '사랑'은  바람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것 같아 나는 입에 올리지 않는다.

 

 

삼십일이니 백일이니 하면서 저마다 제사랑에 들떠있는 요즘이다.

그 사랑의 얘기는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짧기만 하다.

사랑은 헤프고 진정한 우정은 찾아보기 쉽지 않은 시절이다.

허균과 매창의 진주빛 우정을  오래도록 생각하며 떠올릴 것 같다.

 

7월의 뜨거운 볕이 한낮을 데우고 있다.

그러나 오랜 옛날옛적 아름다운이들의  열정의 온도 그 반도 미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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