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창의 자리를 잡은 다음 수평을 잡고 흙으로 고정시켰다. 이때는 수평자를 올려두고 작업해야 한다. 흙으로 고정시키다 보면 잡아놓은 수평이 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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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다지도 풍경에 집착하는 것일까. 풍경을 바라보는 일, 마음속 풍경을 바라보는 일도 때로는 지독히 고통스러울 때가 있는데.... 풍경으로부터 무엇을 들으며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보려 하는가. 도대체 풍경이 왜 나를 이토록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일까. 작은 창을 하나 달아놓고 밤늦도록 풍경에 집착하는 내 마음과 싸워야만 했다.
방에 쌓아둔 흙을 모두 썼다. 바닥에 남은 흙 위에 물을 부려 바닥을 편평하게 골랐다. 그 많던 흙도 쓰다보니 바닥을 보게 된다. 쌓여 있던 흙처럼 이제 내 앞에 쌓여 있는 흙처럼 이제 내 앞에 쌓여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나 남아 있을까. 지금까지 내 시간은 무엇을 쌓는 데 썼을까. 지금의 이 시간은 올바르게 쓰고 있는가. 잡념이 잡초처럼 무성해진다. 한 번씩 머리를 흔들며 잡념을 털어버리지만 잡초가 그렇듯 잡념의 생명력은 무섭도록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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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툭하게 닳은 놋수저로 사과를 파 드시는 모습, 어렸을 때부터 봐오던 익숙한 풍경이다. 할머니가 파 드신 사과 껍질에 구멍이 난 것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 할머니가 조금 전 하신 말씀을 잊어버리고, 추억을 잊어버리고, 가족들의 이름을 잊어버리신다. 그렇게 천천히 과거로 되돌아가며 거실에 앉아 졸고 계신다.
이제 내가 오래 남아 있어줄 것 같지 않은 저 풍경, 오랫동안 내게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풍경을 증명해주고 계시지만, 언제고 저 풍경을 추억으로만 보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사랑이 이런것이라면 사랑은 고통이다. 고통을 담보로 나는 지금 아름다운 한때를 , 별이 많이 찾아온 아름다운 밤을 얻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차츰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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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을 만났을 때, 선생은 요즘 아이들에 대해 "빈곤이 빈곤한 세대"라는 말씀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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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란 시간과 공간의 단절이다. 그러나 간절한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은 그 무엇으로도 단절되지 않는다. 어디에 있든 항상 이어져 있다. 죽음 이후까지도 이어질 것이다. 때문에 이별이란 단어는 그저 과장된 관념일 뿐이다. 단지 몸이 떨어져 있다는 것만으로 이별이라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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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송판을 덮다 말고 꽃향기에 취해 잠시 앉아 쉰다. 아카시아는 5월의 향기다. 5월의 한 가운데서 꽃향기에 취해 일하는 것도 잊고 마냥 한가롭게 앉아 있다. 산에, 꽃에 물들어 온 바람이 나를 그 색으로 물들이고 간다. 내게도 바람이 물들어 갈 향기가 있을까. 5월의 한 순간이 영원처럼 길어진다. 이대로 삶이 멈춰도 좋을 것 같다. 행복한 순간은 이처럼 짧아서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는것, 그것은 '경쟁'과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리라. 처음 사람이 모여 살게 된 것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모든 모여 사는 무리들은 서열을 만들게 된다. 그것은 공동체를 유지시키기 위한 필요악이다. '소유'가 행복과 불행의 잣대가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서열은 곧 소유를 결정하는 방법이 되었고, 높은 서열을 얻기 위한 경쟁은 사회를 더욱 물질만능의 세계로 이끌어가게 된 동력이 되었다.
경쟁은 발전의 토양이지만, 발전의 열매가 극소수에게 몰리는 상황은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물질적 소외감을 안겨다 주었다. 절대빈곤층이 늘어가고 절대부유층이 더욱더 부유해지고 견고해지는 사회. 계층 간 이동이 불가능하고 계층 세습이 굳어지는 사회.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철학을 잃고 물질의 행복에만 매달리게 되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을 떠나 투발하지만 자신이 직접 지은 집에서 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에 칠해진 물질주의의 화장을 씻어버린 인간, 그 본래의 모습.자연 속에서 자연을 해치지 않으며 자연이 주는 열매를 먹으며 살아가려는 것은 물질이라는 마약을 끊으려는 몸부림이다.
물질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만 물질로 얻은 행복은 물질이 사라지면 같이 사라진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결국 마음에서 솟아난다. 그것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서 그것을 얻기 위해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물질이 주는 행복에만 매달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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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꿀을 따느라 부모님이 벌과의 전쟁을 벌이고 계신다. 벌들은 갑자기 자신의 집을 해체하는 적을 향해 공격을 해대지만, 마른 쑥 연기에 최면이 걸려 얌전해지거나, 모기장을 뒤집어쓴 것 같은 벌옷에 매달려 소용없는 공격만 해댈 뿐이다. 부지런히 퍼다나른 꿀을 고스란히 인간에게 빼앗기고도 다시 꽃을 향해 날아가는 꿀벌들. 빼앗기면 되찾으려 하지 않고 다시 꿀을 모으는 꿀벌들에게서 무엇을 배우는가. 무엇을 슬퍼하는가. 무엇을 체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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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안개라는 이미지는 사람의 본래 마음을 가리는 욕망이나 집착같은 것이 아닐까. 조금씩 자신을 보여주지만 보여준 만큼 또 가려버리는 그런 인간의 마음을 비유하기에 적절한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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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앉은 마을을 보기 위해 산책에 나섰다. 안개가 들꽃위로 작은 물방울을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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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워 보이는 저 풍경 속에도 생존의 법칙은 냉혹하게 존재한다. 저 평온해 보이는 한순간을 얻기 위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생존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한순간의 행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쟁하며 보내고 있는가.
삶은 투쟁 그 자체로 행복을 주기도 하고 의미와 보람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다른 어떤 본래의 행복을 얻기 위해 감내의 시간이 아닐까. 나 또한 오랫동안 나를 지배하던 안전한 일상을 버리고 가족과 오랜 기간 떨어져 있을 각오를 하고 흙집을 짓고 있는 것은 내가 바라는 더 크고 소중한 추억과 행복의 순간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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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막아야 하는 것과 들여야 하는 것을 잘 구분해야 한다. 빛을 들여 어둠을 막고, 햇볕을 들여 곰팡이를 막고, 바람을 들여 더위를 막고, 불을 들여 냉기를 막아야 한다. 들어와야 하는 것과 들어오지 않아야 하는 것이 분명해야 좋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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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좋게 한다고 망치로 두들기다 보면 동판이 상한다. 한번 상한 동판은 되돌릴 수 없다. 이 집 자체가 어떤 규칙에 따라 지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실수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그대로 놔두면 그것이 집의 규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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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스스로 하는 일마저 일이 된다면 도대체 무엇이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유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자유란 결국 하나의 관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나의 자유다. 나를 억압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선택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 자유든 억압이든 결국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어린시절 시골에서 자랐다고 해서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다시 시골로 돌아가 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우선 시골에는 쇼핑센터가 없다. 그나마 도시가 가까운 시골이면 다행이지만, 여기처럼 두메산골인 경우에는 생활습관을 통째로 바꾸어야 한다. 또 병원이 없다. 가까운 보건소가 있기는 하지만 보건의는 없고 간호사만 있는 경우도 종종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래 사귄 이웃이 없어 외롭다. 해가 지면 도시는 다시 밤 생활이 시작되지만, 시골은 밤이 되면 그것으로 하루가 긑난다. 같이 고향에 내려와 사는 친구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시골의 밤은 참으로 적막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진실로 스스로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 단지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냐, 아니면 고향의 추억으로 돌아가는 것이냐를 물어야 한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먼 훗날 돌아갈 고향에는 마음에 지니고 살던 고향은 없다. 단지 고향 땅이 있을 뿐이다. 어린시절을 채웠던 그 고향은 없다.
내가 떠났듯이 모두들 그렇게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면, 마치 모든 것이 예전 그모습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느낌일 뿐이다. 친구는 버려놓은 집을 찾아오지 않는다. 명절에도 오지 않는다. 쓰러져 가는 친구의 집 마루엔 남겨놓고 간 사진들과 졸업장 등이 버려진듯 한구석에 쌓여있다.
어쩌면 버려두고 간 모든 빈집들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추억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인지도 모른다. 추억을 지키느라 고단한 몸이 보살핌도 없이 쓰러지고 있는 중이다. 집에게 미안한 주인은 집을 볼 낯이 없다. 그래도 그 지루한 추억 지키기를 면해주지 않는다. 주인은 명령의 증표로 몇가지 살림살이를 남겨두고 갔다. 집은 증표를 안고 오늘도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마당엔 잡초가 자라고, 심지도 않은 호박이 자라고, 강냉이가 자라고, 대나무가 자란다. 아무도 푸지 않는 샘물은 넘쳐 물이끼와 물풀이 머리카락처럼 너울거린다. 새가 살다가기도 하고, 고양이가 새끼를 낳기도 하고, 뱀이 개구리를 쫒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저 황폐한 풍경이 주인의 마음속에서는 찬란한 과거에 산다. 그때 그모습 그대로 산다. 소를 몰고 산에 오르고, 나무를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장에가신 아버지가 소 잔등에 과자를 싣고 고개를 넘어 오시고, 지친 소가 개울에서 물을 마시는 중이다.
좁은 골목에서는 자치기 막대기가 하늘로 솟구치는 중이다. 집집마다 저녁 연기가 오르고, 들어와 밥먹으라고 어머니가 소리치시는 중이다. 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중이다. 그때 저녁을 먹으러 간 친구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집이란 결국 자연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곳이다. 자연을 들이고 막는 데 자연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을 이용해 자연의 유익한 힘만을 취하는 지혜다. 보잘것없고 약해 보이는 흙집이 오히려 자연의 유익한 것을 취하는 지혜의 산물이다. 이제 나는 세상의 모든 흙집을 경배한다.
포악한 시간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우리는 현재를 살지만 현재에만 사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시간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지만 우리는 현재에만 갇혀 사는 것이 아니다. 지나온 시간으로 마음껏 되돌아 갈 수 있다. 단지 지나온 시간을 현재로 바꿀 수가 없을 뿐, 과거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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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낡아가게 마련이다. 낡아가며서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새로운 아름다움을 얻기도 한다. 아니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며 낡아간다고 하는게 옳다.
골동품처럼 낡은 것에 더 가치를 두는 것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 "물건은 낡으면 골동품이 되어 새로운 가치가 생기는데, 인간은 늙으면 오히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구나"라고 탄식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시간이 만들어주는 아름다움을 얻지 못하는 존재라면, 늙어가는 것을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시간을 통과해가는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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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메우는 작업은 마치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처럼 몰입하게 된다. 생각과 생각이 수없이 마음을 지나가도, 슬픈 일이나 즐거웠던 순간들, 지금은 볼 수없는 많은 얼굴들이 지나가고, 그들의 말과 표정이 마음속을 지나갔다. 잊고 지내던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가고, 갑자기 사무치도록 보고 싶은 사람이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를 취흔들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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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열기 위해 있는 것인가, 닫기 위해 있는 것인가. 물론 열기 위해 있기도 하고 닫기 위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문'이라고 불렀을 때 받는 느낌은 닫히는 것일까, 열리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문은 어떤 느낌인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말한다면 내게 문은 닫히는 이미지다. 외부로부터, 위협으로 부터 ,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닫아버리는 이미지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이 두려워, 열고 나갔던 세상이 두려워 고향으로 되돌아온 것일까, 세상에서 되돌아와 문을 닫고 숨기에 나는 너무 젊지 않은가. 오늘도 자책의 별이 밤하늘 가득 반짝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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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믿는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방법을 찾기 위해 돌진 할 것이다. 때론 무모하게, 때론 열정적으로, 때론 정확하게 답을 향해 가는 그런 힘이 내겐 있다. 이런 무모한 믿음은 때로 뜻하지 않은 성과를 가져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 시행착오가 되고 만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시행착오의 단계들은 머릿속 상상만으로 끝내버린다. 그러나 나는 허점보다 약간의 가능성을 보고 바로 행동해버린다. 이런 시행착오는 여기저기를 돌고 돌아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한다. 인내심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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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하고 매캐한 연애의 추억들, 철없이 사랑했던 몇 명의 여자들, 불현듯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들의 안부를 물을 자격이 있을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어떤 선택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무모했던 연애들. 그이들에게도 원망과 후회와 사랑, 뭐 그런것들이 남아 있을까. 나처럼 어쩌다 한번씩은 가슴을 휘몰아쳐 가는 후회와 아쉬움 , 미련이나 원망 같은 것들이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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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주는 아름다움은 견고함에 기초한다. 불규칙한 돌의 모양은 오히려 불규칙한 것들끼리의 조합이 얼마나 훌륭한 규칙을 만들 수 있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그 불규칙의 규칙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의 단점을 보완해주면서 더불어 견고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흙집이라는 낭만적인 이미지에는 여러가지 복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연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그 재료를 쓰고 있는 다른 생물들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인위적으로 막기보다 자연의 생리를 이용해 막아야 합니다. 지네를 약으로 잡다보면 그 약에 사람이 다치기도 하고, 약발이 떨어지면 지네는 다시 올것입니다. 지네가 다닐 만한 길을 막고 습한 곳을 없애면 지네는 자연스럽게 흙집을 나갈 것입니다.
MEMO
전남 화순- 목천 흙집 연구소.
전남진
1966년 경북 칠곡군기산면 봉산리 산골마을 가시마을에서 태어났다.
1985년 동국대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동국문학회'에 가입해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문단에 나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1991년 봄, 처음으로 문예지 신인상 최종심에 올랐으나 다음해부터 시작된 직장생활로 시가 쓰여지지 않는 세월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는 삶의 이유이자 의미였다.
1997년부터 접었던 습작을 다시 시작했다.
근무시간에 몰래 시를 썼다.
그리고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다시 문학공부를 시작했다.
1999년<문학동네>문예 공모에 당선되면서 늦은 등단을 하게 되었다.
2002년 그간썼던 작품들을 모아 첫 시집 <나는 궁금하다><문학동네>를 냈다.
그리고 2002년 2월 ,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일을 결행하기 위해 회사를 떠났다.
이책은 도시 생활을 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시골에 대한 동경이 동경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고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발간하게 되었다.
이 책이 시골에 가기 위해 도시를 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작은 힌트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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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 또한 즐겁게 넘겼다.
모든 것을 다 접고 그렇게 흙으로 집 짓는 일에 뛰어든다는 것은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가 시를 배웠고 시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이어서 가능했을것이다.
공정 하나하나 사진을 들여다 보며 그의 길을 따라가 보았다.
굉장한 사람이다.
누구말처럼 꼭 황토방 같은데 그 흙집 하나 짓는 데 들이는 공이란 모르는 이들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 즐거웠다.
오후에 나의 그에게 전화를 할 것 같다.
"당신의 시골에 있던 다 쓰러져 가는 그 집 혹 부모님것은 아닌지?" 하고 ..
아닐 확률이 90%일 것이겠지만 그냥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 허름한 시골집 앞은 내가 흐르고 뒤에는 산이 있었는데...
사실 너무 심심 산골이다.
후....
이렇게 나는 책을 빌릴때마다 자연과 친구하는 사람들을 어느날 부터 만나고 있다.
어떤 의미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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