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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가을 편지

다림영 2009. 6. 1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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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가을 편지 /

 

 


 “오올~해도 과아꽃이 피이었습니다......”
 아버지,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엄마는 늦은 봄 씨앗을 뿌리고 여름내 가녀린 줄기에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색색의 꽃이 피었다며 내게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더니 혼자 보기 아깝다고 하나둘 가게로 가져 나와 창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그 후 가게
에 발을 들여 놓을 때마다 꽃에게 먼저 다가가 사람 대하듯 이야기합니다. 꽃들이 연신 춤
을 추는 것을 보니 화답을 하는 듯합니다. 그러한 것을 무심히 바라보는 나는 아버지의 환
한 얼굴이 문득 떠오르고 과꽃의 노래가 바람 새듯 흘러나옵니다.

 

 

 

 이맘때였습니다. 우리 집 뜰에는 채송화,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 백일홍. 과꽃…….
많은 꽃들이 피었습니다. 어둠이 밀려올 즈음 우리 가족은 평상 위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거
나 고구마나 감자를 쪄서 조촐한 밤참을 즐겼습니다. 상이 물려지면 아버지는 취기어린 눈으
로 나를 빤히 들여다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양념 딸 노래 좀 들어볼까?" 나는 배시시
웃으며 벌떡 일어나 "올해도 과아꽃이 피이었습니다아." 하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잠을 깨고 눈을 비벼댈 무렵이었습니다. 작은 풀벌레들의 울음과 이따금 짖어대는 동
네 개들의 소리는 낮은 화음이 되어주었습니다. 습관처럼 이어지던 아버지의 그러한 주문들
로 나는 많은 친구들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한 나절이나 귀를
 열고 과꽃노래에 젖습니다. 가슴이 뭉클하고 괜스레 눈물이 맺힙니다.

 

 

 

 

 아버지와의 유년의 추억들은 물고기처럼 은빛 물살을 헤치고 눈부시게 튀어 오릅니다.
 양은 주전자를 달강달강 흔드는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높고
파란 하늘아래 논길을 그림처럼 걸었습니다. 노래를 입에 물고 다니던 나는 신이 나서 소리
를 높입니다. 동생들의 걸음엔 가뿐한 리듬이 실립니다. 참으로 그리운 정경입니다. 돌아가
고 싶기만 한 어린 날의 가을입니다.

 

 


 ‘톡톡 톡톡’ 사방으로 도망하는 메뚜기를 놓칠 세라 동생들은 조막만한 손에 두어 마리
씩 움켜쥐고 주전자를 들고 있는 누나를 불러댑니다. 불현듯 내 손안에도 메뚜기가 들어 있
는 듯 간지럽고 어깨춤이 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가을철 간식거리였습니다. 노릇노릇 달
달 볶여진 메뚜기의 고소한 냄새는 건넛집 친구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그 기막힌 맛을 나의
아이들에게 어찌 전해줄까 고민해 봅니다.

 

 

 

 우리가 살던 동네엔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곳의 주변은 우
리에게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었고 아버지의 너른 품처럼 편안한 휴식과 자유를 주었습니다.
 여전히 내 작은 손엔 노란 주전자가 들려 있었습니다. 주전자에 가득하던 우렁이들이 눈에
선합니다. 우렁이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까맣고 조그마한 것들을 잡느라 정신을 놓곤 하였습
니다. 문득 종아리에 달라붙은 붉은 지렁이를 볼라치면 몸은 순식간에 얼음처럼 차가워져서
 숨이 넘어 갈듯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무언가에 몰입하던 아버지는 한걸음에 달려오고 나
는 창백한 얼굴로 언덕배기에 올라가 한동안 마음을 달랬습니다.

 

 


 우렁이와 같이 잡아온 것들을 엄마가 삶아내는 동안 맏이인 나는 아버지의 술심부름을 다녀
와야 했습니다. 양은주전자를 요란스럽게 흔들며 내처 달려갑니다. 쥐 알 만한 손님을 맞이
하는 가게 언니의 웃음은 꽃처럼 화사했습니다. 언니의 물음이 무엇이었는지 귓전으로 흘렸
고 동생들이 그것들을 다 먹을까 하는 마음만 바빠 자빠지거나 엎어지고 하였습니다. 간간
이 지나던 버스가 방금 다녀갔는지 신작로엔 뿌연 먼지가 구름처럼 일었고 넘치는 술이 아까
워 뛰지도 못했습니다. 몇 번씩 주전자의 주둥이를 입으로 가져가 홀짝홀짝 마셔댔습니다.
그렇게 먹다보니 얼마쯤은 먹은 것 같았고 새처럼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술의
힘이라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해가 기울고 아버지 이른 퇴근을 하시면 우리는 모두 마당으로 불려 나갑니다. 그때엔 굳
이 그것을 운동이니 하는 말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놀이였던 것입니다. 엄마
와 아버지의 편을 가르고 어둠이 다가와 흰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드민턴을 쳤습니다.
환한 그 소리들은 싸리나무 울타리를 뛰어넘고 너른 길로 나가 지나는 이들의 걸음을 멈추게
도 하였습니다. 고단한 어깨로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가족의 정겨운 한 때를 그들
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저 만치서 들리는 듯합니다. 저녁마다 아버지는 많은 형제 중 맏이
인 제 이름만을 고집하셨습니다. "숙이야아." 현관문이 덜컹 밀리면 모두 총알처럼 달려 나
가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합창하듯 소리를 높였던 우
리였습니다. 아버지의 피곤함은 순식간에 어디 론가로 날아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제비나 칼국수로 끼니를 해결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저녁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침을 꼴깍 삼키는 동생들의 표정들이 떠오릅니다. 아버지의 밥그릇엔 늘 밥이 남
아 있었습니다. 일부러 남기신 밥인 줄 이제 압니다. 한 숟가락 혹은 두 숟가락씩 달게 먹
던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맛나던 밥이었습니다. 그 후 어디에서도 달
디 단 그 밥맛은 찾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어떠한 마음일 때 붓을 드셨는지요? 아버지가 붓을 들 때면 서로 다가들
어 먹을 갈겠다 하였고 어린 우리들이 모르는 고요함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줄곧 우
리에게 신념에 대한 글귀를 써서 각별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한 가지 뜻을 가지고 그 길을 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
 그 길을 가라"……. 지금도 동생들과 아버지를 추억할 때면 너도나도 물 새듯 흘러나오는
 글귀입니다.

 이른 아침이면 싸리비질 소리가 열린 문틈으로 들려왔습니다. 골목 저 위 까지 올라가며 비
질을 하시는 아버지, 문득 허리를 펴고 어떠한 생각으로 안개 자욱한 먼 길을 바라보고 계셨
을까 짚어봅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틀어놓으신 독경소리에 산새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이불
을 목 위로 바짝 끌어올리고 고요하고 깊은 산 속의 기운이 엄습하는 듯 어린 나는 알 수 없
던 무엇으로 휩싸여 뒤척이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간혹 절에 다녀오고 이른 아침마다 산
을 찾고 회심곡과 같은 것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모두 아버지의 지대한 영향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신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의 그 신념은 남루한 벽에서 반듯
하게 자리를 잡고 오랫동안 우리를 지켜주었습니다. 하루하루 가난하게 성숙하는 우리를 아
침저녁으로 내려다보았습니다. 형제들 저마다 나름대로 제 일을 가지고 한 길을 가는 것을
 보면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의 힘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가르침이 없어도 부모의 바른 모습을 보고 배우며 자라나는 아이들이라 하였습니
다. 남편은 잘 풀리지 않는 사업으로 자신의 위안이 될 무엇들만 찾아 집을 나섭니다. 날마
다 늦은 귀가를 합니다. 그의 고통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아이들을 너무도
등한히 하는 것을 보면 야속하기만 합니다. 내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힙니다.

 

 


 아버지, 아버지도 가장으로서 왜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밥을 삼키지 못하던 엄마의 긴 한
숨과 그늘진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날이
면 맏이인 나의 꿈속은 온통 어지럽고 아득한 벼랑이 느닷없이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주말이면 아버지는 영화를 보시고 느지막이 집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유일한 삶
의 탈출구였으리라 짐작합니다. 여러 행복하지 못한 요소들 속에서 견디어 나가는 그때의 아
버지가 영화를 보고 삶의 고단함을 털어 내었듯, 그 시절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버린 나는 지
치고 힘겨운 날들 속에서, 책을 벗 삼으며 번잡한 마음 비워내려 안간힘을 씁니다.

 

 

 

 

 아버지, 9월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과꽃처럼 흔들리고 괜스레 아무도 없는 혼자
인양 외로워합니다. 동구 밖 그 어디쯤 가을이 서성이는지 왠지 모를 허무함에 젖어듭니다.
아버지도 그러하셨던 지요? 아버지, 삼십엔 몰랐던 고달픔 들이 사십을 훌쩍 넘기며 사슬이
 되어 나를 묶는 듯합니다. 가족의 아침을 준비하면서 열어놓은 베란다로 경비실 아저씨의
비질 소리가 종종 들려옵니다. 가을이면 길어지고 깊어지는 아버지 생각입니다.

 어제는 행복의 메타포라는 안병욱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중요한 시험문제의 답안인양 줄을
그으며 읽었습니다. 그저 불만스럽던 내가 꼭 기억해야 할 글이었습니다.

 

 


 여행을 떠난다는 행복한 친구가 전화를 주었습니다. 그가 문득 내게 잘 되냐고 물었습니
다. 사실 난 잘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잘 될 거야" 하며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듣는 그도 마음이 가볍고 나도 금세 잘 될 것만 같았습니다.
 안병욱님의 글에서 언급한 <사람은 자기의 결심하는 만큼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링컨의 말
과 <행복의 조건을 못 갖추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만
<마음의 문제>라는 지은이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깁니다. 우물 같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아
이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지워봅니다. 가을을 실어오는 바람으로 흔들리는 과꽃을 바라봅
니다. 과꽃의 노래를 따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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