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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言>에 대하여

다림영 2009. 6. 1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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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言>에 대하여




"얘, 너 왜 그렇게 늙은 거니? 어머 세상에, 목에 주름 좀 봐”

비수에 찔린 아픈 심정이 희고 작은 얼굴에 낱낱이 퍼져갔다. 몇 해가 지났지만 그녀 의 모
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보고 싶어 하던 친구를 이십 오 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 대뜸 한다
는 나의 첫 인사가 그랬다. 친구는 그 밤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불쑥 뱉어 놓고 얼마나 후회를 했던지…….
그때의 말 한마디는 이제껏 살면서 가장 주워 담고 싶은 미안하기 이를 데 없는 말 이 되었
다. 그런 일이 있고 한참 후에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숙희야 그 동안 넌 눈이 참 깊어 졌다!”
그녀의 말에는 격이 있었다. 사는 것에 급급하여 사방으로 냉기가 흐르던 나였다. 그 말 을
듣는 순간 마음 저 깊은 곳까지 몇 날 며칠 행복함으로 출렁거렸다. 아이 같은 마음으로 정
말 내 눈이 깊어 진 걸까 하며 거울을 자꾸만 들여다보았다. 사실 내 눈은 깊어지지는 않았
을 것이다. 마음 기울여 꺼낸 작은 말 한마디가 정말 천 냥 의 빚이라도 갚겠구나 하는 것
을 실감하던 나날이었다.

 

 



 삼십 대 후반정도 보이는 여자 손님이 구경 좀 하겠다며 내 가게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는
부담 갖지 말고 사지 않아도 되니 마음 편히 보라했다. 그녀는 이것저것 몇 차례 만지고
끼 어보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것도 없고……, 별로 예쁜 것도 없고 …….”
괘씸한 말은 꿀꺽 삼키고 잘 가라는 인사를 했지만 작은 답례도 없이 언제 보았냐 는 듯이
총총 사라진다. 말에 예의 가 없으니 행동 또한 바르게 이어지질 않는 것이리라. 하루 종일
그 손님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은 내 심기를 종일 불편하게 만들었다.

 

 



 변변한 옷 하나 없는 장롱을 몇 며칠 뒤적거렸다. 아무것도 아닐 옷 때문에 우울하게 시작
되는 아침이곤 했다. 결국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가벼운 여름 티 하나를 마음먹고 장만
했다. 아이처럼 들떠 몇 번씩이나 창에 몸을 비추어보며 아침을 열었다. 그런데 옆집여자
가 처음 보는 옷일 텐데 어떠한 인사조차 없는 것이다. 종일 낯설게 쳐다보더니 저녁에 내
옷에 대한 말문을 열었다.
“거지같다, 무슨 그런 옷을 입고 다닌 데, 사장님이…….”
그 기막힌 소리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어때서” 하고 간신히 말을 되받았지만
그녀의 그 말은 납작한 가슴에 대못이 되어 박혀버렸다. 얼마나 괘씸하던지 옷 사는데 네가
돈 보태준 일 있냐 하며 머리끄덩이라도 붙잡고 싸우고 싶은 심정이 순간 용솟음쳤다.
“그런 데로 괜찮아요, 그런데 이젠 나이와 신분에 맞는 것을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런가 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대뜸 다짜고짜 상대방의 마
음은 살피지 않고 던지는 말은 상처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
을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낯익은 선배님이 웃으며 지나시기에 그저 목례만 건넸다. 그러나 저쪽 에서
날아오는 소리,
“행복하시죠?”
생각지도 못했던 그 멋진 인사는 행복하지 않던 나에게 오랫동안 조그만 행복을 가져다주었
다. 그 말만 생각하면 괜스레 즐거워지는 것이다. 나도 사람들에게 각별하고 품격 있는 인사
를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선배님처럼 자연스럽게 입에 붙이질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나는 “안녕 하세요” 에 익숙해있었고 그 인사가 편안하기만 한 것이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손에 무언가 잔뜩 든 장사꾼 한 명이 들어왔다. 이천 원짜리 수세미 하
나를 샀다. 고된 삶으로 지치고 굳어있던 그의 얼굴이 금세 박꽃 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장님 어려운 사람 도와주셔서 틀림없이 복 많이 받으실 거예요, 복, 정말 많이 받으세
요.”
내가 베푼 너무나 미미한 것에 대한 그의 답례는 크고 고마운 말이었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
이 들었다.
마침 불쑥 들어오던 앞집 여자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생각 없는 말을 내 뱉는다.
“사장님은 참 돈도 많아”
어디 내가 돈이 많아 수세미 이 천 원짜리를 산 것인가. 나에게 쓸 돈들은 천 원 한 장도
몇 번을 생각하고 사는 나날이다. 어찌 말을 함부로 내뱉는가 말이다.
나는 그녀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려 했으나 마음에 담아 덮어두었다.

 

 



골목을 지나며 흰 교복을 입은 소녀가 친구에게 소리를 지른다.
“꺼져, 이년아”
소녀는 좀 더 성숙해 지면 멋진 애인도 사귀게 될 것이고 아내도 될 것이고 엄마도 될 것이
다. 입에 담지 못할 소녀의 그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유리창이 흔들린다.

 

 


“한 푼만 보태줍쇼”
어인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 기가 막혔다. 제아무리 살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뜨거운
피를 가진 젊은 청년의 입에서 나올 말이던가. 나는 일어서지도 않았다. 희고 오목한 그릇
을 두 손 에 들었다. 아예 거지가 되기로 작정했나보다. 안경을 쓴 얼굴은 표정이 묻어나지
않는다. 무슨 사연인가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멀쩡해 보였다.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
니 이내 등을 보이고 앞집으로 향한다.
“한 푼 줍쇼.”
그는 오늘 과연 몇 푼의 돈을 그릇에 담아 돌아갈 것인가.
일말의 젊음이 남아 있어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정히 구걸을 해야 할 처지라면  "선은 이렇
고 후는 이렇게 되었으니 다만 이 젊은 사람을 안타깝게 여겨 ……."
이러한 몇 마디 자신을 포장하는 말과 함께 방문하였더라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생각은 달
라졌을 것이다.

 



 글씨는 그 사람의 얼굴이고 말은 그 사람의 인품이고 덧붙여 인사는 돈을 들이지 않고 쌓
을 수 있는 재산이라 하였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눠 보면 상대방의 사람됨을 대충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야 하리라.
상대방에게 잘 보일 수 있도록 말을 잘 하는 것도 나의 살뜰한 재산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
렇다고 거짓되고 꾸밈 있는 말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드러나기도 할 말, 꽃밭을 가꾸듯 잡초를 구별하여 세상에 내 보내
야 하리라. 한 번 뱉은 말은 쏟아버린 물과 같다. 그 담을 수 없는 한마디의 말로 싸움의 발
단이 되기도 하고 그 사건은 어떤 상황을 불러올지 모르는 것이다.

 

 


 소설가 신경숙은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얼마나 대단한 말 한마디의 위력인가.
그런 사람을 보았다. 늘 그의 입에선 이런 말이 흘러 다녔다. “그래 되는 일이 없어, 부도
난다…….” 장난처럼 하는 말 이었다. 그 사람은 그때 사실 그 반대의 상황이었으며 잘 되
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그를 보았다. 그는 늘 하던 그의 말대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
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 하였다. 정녕 나쁘고 부정적인 말은 삼가야 할 것이다.
만사가 안개처럼 희미하다.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펼쳐지지 않는 인생사이다. 나도 어디엔
가 대고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고 욕이라도 하고 싶은 나날이고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보
면 마음속에 있는 말 다 꺼내고 싶기도 하다. 그러면 답답하고 꽉 막혀버린 무엇이 시원하
게 뚫릴 것인가.
며칠 전 스님께 다녀왔다. 좋은 말, 고운 말, 예쁜 말, 조용한 말 을 하라 하신다. 그래야
모든 생활도 그렇게 풀려나가고 사람도 바뀌어 갈 것이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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