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폭풍의 한가운데/윈스턴 처질수상록

다림영 2009. 6. 1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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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순간에는 누구든지 투쟁의 식지않은 격정과 열기로 인해서 차분한 정책을 수행해 나간다는 자체가 힘든 법이다. 하지만 적과의 투쟁은 끝이 났다.

 

남아 있는 문제는 자신과의 투쟁뿐이다. 그러나 자신과이 투쟁만큼 어려운 싸움도 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역사는 때때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이 바로 눈앞에 열려 있는 데도 불구하고, 훨씬 더 나아 보이는 해결책은 그대로 버려둔채, 그토록 느린 속도로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겪어가면서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 본성의 두가지 상반된 모습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항상 문제다.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자가 평화를 제안하기는 힘들며, 평화를 제안하는 자는 영원히 승리할 수 없다.  우리가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생생하게 체험한 진리가 바로 이것 아니던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끝을 알 수 없는 물질적인 진보와 확대되어 가기만 하는 인간의 능력조차도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자각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상천외한 계획들,엄청난 물리적인 파괴력, 생활의 안락함, 각종 편의, 쾌락, 이 모든 것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물질적인 현상을 초월하는 이상을 갖고 있지 못할 경우, 그들의 가슴은 고통으로 찢어질 것이고 그들의 인생은 삭막해질 것이다.

 

희망과 능력과  더 불어, 인간의 지식수준이나 정신력, 또는 제도의 효율성에 걸맞은 위험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

 

 

 

 

"변화가 바로 해결의 열쇠이다. 사람이 입고 있는 상의 팔꿈치 부분을 계속 문지르면 그 부분이 해지듯이, 인간의 정신도 특정 분야의 신경을 집중적으로 사용할 때, 그 부분의 피로가 누적되면서 탈이 나게 되어 있는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의 뇌세포와 생명이 없는 옷감과는 사뭇다르다. 팔꿈치대신 옷소매나 어깨부분을 아무리 비벼보아야 다 해진 팔꿈치 대신 옷소매나 어깨부분을 아무리 비벼보아야 다 해진 팔꿈치가 수선될리 없지만, 정신의 피로한 부분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휴식이외에도 정신의 다른 부분을 활성화 함으로써만이 제대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피로를 느끼는 부분의 전원을 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새로운 흥미를 가동시켜야만 제대로 원기가 회복된다는 이야기이다. 잔뜩 피로를 느끼고 있는 '정신 근육'-만약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에게 "충분히 휴식을 취하겠다"라든지 "산책을 다녀오겠다"라거나 "누워서 아무 생각도 안하겠다"라고 아무리 이야기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마음은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태 무엇을 지지고 볶고 있었다면, 아무리 그런 말들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지지고 볶고 있을 것이며, 걱정을 하고 있었으면 계속 걱정을 할 것이다.

 

 

안도와 휴식과 기분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세포들이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여, 지금까지의 정신세계의 축이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 저명한 미국의 심리학자는 "걱정은 감정에 경련이 일어난 상태이다. 마음은 무언가를 꼭 붙들고서 절대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마음과 다투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걱정을 제거하려는 의지가 강렬 할 수록 더욱 헤어나기만 힘들어질 뿐이다.

 

 

이때에는 오로지 감정의 격정적인 손아귀에 다른 어떤 것을 슬쩍 쥐어주는 수밖에 없다. 만약 제대로 된 것을 쥐어주었을 경우, 새로운 분야의 흥미가 제대로 가동되기만 하면 점차적으로, 때로는 아주 신속하게 이전까지 꼭 쥐고 있던 마음의 손을 풀고서, 본격적인 회복과 손상된 부분의 치료가 시작되는 것이다.

 

..

 

무릇 진정으로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려면 적어도 두 세가지의 취미는 갖고 있어야 하며, 그것도 가식이 아닌 아주 진솔한 것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

 

가장 흔한 기분전환의 방법은 독서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광활하고 변화무상한 세계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다. 살마들은 도서관을 찾으면 으레 공소해지기 마련이다. '약간의 책'- 이것은 5000권 미만의 책에 대한 몰리 경의 정의다- 은 안락한 기분을 느끼도록 해주며, 심지어 어떤 충족감마저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규모가 별로 크지 않은 도서관이라 하더라도 도서관에서 하루만 지내보면 그러한 감상적인 환상은 금방 깨지고 만다. 서가에서 이책 저책 꺼내어 훑어보다 보면, 그동안 인류가 축적해 온 갖가지 관심분에에 관한 엄청난 규모의 지식과 지혜의 무게에 짓눌려서, 너무나 왜소하게만 느껴지는 자신에 대한 서글픈 자각과 더불어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자존심 마저 말끔히 지워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평생을 바치더라도 모두 맛보기는 커녕, 감탄만 하기데도 벅찰 정도로 방대한 양의 현인과 성자, 역사가, 과학자, 시인, 철학자들의 업적 앞에서, 삶의 기간이 잛다는 자각만이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얼마나 많은 멋진 이야기가, 그것도 아주 근사하게 표현된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하는 지 우리는 도저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우리가 꿈도 꾸지 못햇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사항들에 관하여 얼마나 많은, 집요한 탐구가 이루어졌던가? 우리를 환희에 들 뜨게 만들기도, 때로는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 사상들은 어떠한가?

 

 

 

그토록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이루어온 보물들을 우리는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감상에 빠져 있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요한 정적이 찾아든다.

 

 

경건하기까지 한 실망의 쓸쓸한 감상으로부터 보다 현실적인 자각으로, 다시 새로 충전된 열정으로 무장한 채, 현실의 가벼운 허영의 세계로 자연스레 되돌아오는 순환의 쾌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 많은 책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원래의  질문이었다. "읽어라" 라는 대답이 질문자의 정신을 번득 들게 만든다. 이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만지기라도 해라. 쓰다듬고, 쳐다보기라도 하라.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아무거나 눈에 띄는 구절부터 읽기 시작하는 거다.

 

 

그러다가 도 다음으로 넘어가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마치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새로운 해도를 작성하는기분이 되어보라.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책을 서가에 꽂는 습관을 키우고, 자신만의 구상을 가지고 서가를 정리하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 책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책이 어디 있는 지는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책과 친구가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 알고는 지내는 것이 좋다. 책이 당신 삶의 내부로 침투해 들어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 서로 알고 지낸다는 표시의 눈인사마저 거부하면서 살지는 말아라. "

 

 

 

제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몽고메리 원수가 언젠가 처칠에게 "저는 술 담배를 일체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그것이 제가 항상 건강을 100퍼센트 유지하는 비결이지요" 라고 은근히 비꼬자 그는 즉각 "나는 술을 무척 즐기고 담배도 아주 좋아하지, 그래서 항상 200퍼센트이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네"하고응수했다고 한다.

 

 

********

 

나는 그를 참 좋아한다.

이책은 그야말로 그의 일대기이다.

금방 읽고 나서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역사들...

그러나 그의 글은 나를 인도했다. 그의 글이 참 좋다. 세계적인일들이 그 역사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다른 글을 자꾸만 읽고 싶어진다. 

 

그는 유머있고 재치있고 사람스럽고 참 재미있는 좋은사람 같다.

 

 

그는 또한 사십이 넘어 그림을 그렸다.

 

나도 그림을 그린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어갈 수 없는 나의 형편이었다. 그림은 돈이 따라야 할수 있는 취미생활이겠지만 책은 얼마든지 도서관에서 빌릴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나에겐 굉장한 행운인 것이다.

그는 무작정 화구를 챙겨 그림을 그려보라 했지만 그것은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느 일요일 , 어린이용 물감상자를 둘러매고 야외로 나가 시골풍경을 몇번 습작하고 난 바로 다음 날 아침 나는 유화용화구 일습을 장만했다.

물감, 이젤, 캔버스가 갖춰지니까 남은 일이라곤 바로 시작하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엇부터 손을 댄다?팔래트는 색채의 구슬들로 번쩍거리고 캔버스는 희고 반듯하니 서 있는데, 그림붓은 운명의 무게를 감당못한채 소신없이 공중에 떠 있는 듯 햇다.

 

 

조용한 거부감이 내 손을 타고 흘러 꼼짝 못하게 묶어 놓았다. 그러나 어쨌든 하늘은 파랬고, 당시에는 옅은 푸른색이엇다. 파란 물감에 흰 물감을 섞어서 캔버스 위쪽에 칠하면 되는 것 아니겠나? 이것을 알기 위해 꼭 화가 수업을 받아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 누구나 여기까지는 다 할 수 잇는, 말하자면 출발선 상에 선것이다.

 

 

드디어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가느다란 붓을 꺼내 팔레트 위에서 파란 물감을 갠후, 앞에 딱 버티고 서 있는 순백의 방패에 극진한 예의를 다해서 콩알만하게 칠해 보았다. 이거야 말로 도전, 그것도 아주 정밀한 도전이었다. 하도 긴장이 돼서 숨이 다 막히고 근육이 다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가까이 다가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는데, 차에서 경쾌하게 내리는 이는 다름아닌 존래버리 경의 부인이었다. 대단한 재원이었던 부인은 다가와서 "오 그림 그리세요! 그런데 지금 무얼 망설이세요? 붓 좀 줘보세요, 아주 큰 걸로요"하고는 붓을 받아 쥐자 바로 테레빈유에 척ㄹ프덕 담그더니 곧장 팔레트 위를 파란색과 흰색의 광란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리고 나서 잔뜩 겁에 질려 웅크리고  서 잇는 캔버스를 향해 난폭한 기세로 몇 차례 커다랗게 붓을 휘둘러 파란칠을 해 나갔다.

 

 

 

누가 보더라도 캔버스가 반격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저토록 쾌활하게 휘두르는 폭력을 어떻게 당할 수 잇겠는가. 캔버스는 내가 보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주술이 깨진 것이다. 병적인 거부감이 사라진 것이다. 제일 큰 붓을 움켜쥔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제물을 향해 미친듯이 분노를 토해냈다. 그 순간 이후 다시는 캔버스 앞에서 위축된 적이 없다."

 

 

 

.......

 

생각만 해도 즐겁다. 그림 그리는 이야기는... 새벽을 훌쩍 넘기기가 일쑤였던 나의 그시절 .. 그렇게 푹 무엇엔가 빠져 산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다. 그런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처칠은 노벨문학상을 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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