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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 /정운

다림영 2009. 5. 2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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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정운

옛날 어느 산골마을에 얼굴이 조그맣고 까만소녀 영이와  철이가 살고 있었답니다. 
철이는 영화에서 보았던 인디안소년같이 날렵하고 말이 없는 조용한 남자아이였지요.  
철이의 달리기는 학교에서 최고였지요. 그누구도 따라올수 없었습니다.
선생님들조차 철이를 이길수 없었답니다.
영이는 철이의 그러한 일들이 자신의 일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누군가 철이의 얘기를 꺼낼때면

어깨에 힘이 부쩍  들어갔답니다.

 


철이와 영이는 한동네에 사는 유일한 친구였어요.그애들이 사는곳은 다른친구들과는 사뭇 달랐지요.

시내를 건너고 야트막한  산길을 오랫동안 걸어야 한답니다.

언제나 함께 할 수 밖에 없었지요.


어느날 두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굉장한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얼굴이 희고 예쁜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전학을 온거예요.

선생님은 그애가 화려한 도시에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그아이의 모든것이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영국신사처럼 멋진 모습을 보이려 애를썼어요. 그 흔적들이 두드러지기 시작 했습니다.

영이가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조그만 여자 아이이지만 금방 알수있는 것이예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이지요.  

적어도 영이가 알고있는 그애들은 그렇게 점잖을 떨거나 아니면 머리에 물을 바르고 다닌다거나 하는등의 행동을 한번도 하질 않았드랬지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영이는 이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생각해 보면 그것은 영이가 하늘만큼  좋아하는 철이 때문이랍니다.  영이도 철이에게 만큼은 언제나 정말 예쁘게 보이고 싶었으니까요.

 

 

 '영이야?  학교가자-'  하고 철이의 목소리가 영이네 집 문을 두드리면 다시 한번 거울을 들여다 본답니다.

 삐죽 나온 머리카락이라도 있을라치면 침이라도 두어번 바른다거나 해서 얌전히 뉘어놓아야 나서는 영이예요.  후후 ....누군가 좋아하게 되면 맞아요.  충분히 그럴수 있을거예요.



초록냄새들이 세상을 온통 뒤흔들던 어느 이른 여름날이었습니다..
전학온 단발머리 아이는 빨간 리본이  매달려 있는 샌들을 신고 학교엘 가고 있었답니다. 

영이는 걸음을 멈추고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어요.  

언제나 그 애가 입는 옷이나 신발은 동화속 공주처럼 예쁘고 근사했지요.

그날따라 신고온 샌들은 영이의 눈으로 성큼  다가왔어요.  공부시간 내내 샌들이 아른거렸습니다.

그뿐이 아니었답니다. 가슴은 콩콩거렸고  풍선처럼 들떴고  볼은 발갛게 물이들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기다려 보세요. 아주 조금만 더 말이지요.



 

"리리 리리 리리리리~"

쉬는시간 종이  울렸습니다. 

친구들은 때를 기다린듯 전학온 아이에게 오르르 몰려갔습니다.
그아이를 둘러싸고 여기저기 걸터앉아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시끄러웠습니다.

마치 참새들 같았습니다.
단발머리 아이가 전학을 오고 나서 친구들은 매일마다 무엇이 그리 궁금하고 궁금한지요
영이는 한번도 그애 곁에 가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냥..그냥말이지요.
친구들은 그애의 곁에서 웃음을 멈출줄 몰랐습니다.

 

그때 영이는 친구들 뒤로  가만가만 밖으로 향했습니다. 문을 열었습니다.귀신도 몰랐을겁니다.

영이에게는 눈길을 주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신발장의 샌들은 도도한 공주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이를 기다렸다는듯 '어서와' 하고 손짓을 하는것처럼 보였습니다.
콩닥거리는 영이의 심장소리만 복도를 울리고 있었습니다.

영이는 할미꽃처럼 등을 낮게 하고 숨을 죽였습니다. 샌들을 손에 바짝 쥐었습니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  냉큼 샌들을 신었습니다.

그 기분을 누가 알수 있을까요?  

작은발을 두어번 구르면 문득 가벼운 새처럼 하늘로 날아 오를것만 같았습니다.

 



처음엔 화장실만 냉큼 들렸다가 번개처럼 돌아오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학교에 들어서면 반갑게 영이를 맞아주던 예쁜 채송화가 떠올랐습니다.
영이는 채송화가 피어있는 화단앞으로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듯 달려갔습니다.

 

작은 손을 허리에 올리고는 꽃들앞에서 요리조리 걸음을 옮기며 신이 났습니다. 마치 춤을 추는듯보였습니다.

그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무어라 했을까요?
혼자 연극을 하는사람처럼   웃음을 떨어뜨리며 시간가는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리리 리리 리리리리~"
이크,  쉬는시간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영이는 기겁을 하고 생쥐처럼 빠르게 달렸습니다.

복도의 창너머로 아이들의 소란스런 움직임이 얼핏 보였습니다.

갑자기 몸이 움츠려 들었습니다.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꼭 쥐고 복도로 들어섰습니다.

아이들의 차가운 눈빛이 영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소소 소름이  있는대로 돋아나고 말았습니다. 
무언가 영이는 얘길 해야 했습니다. 단발머리 그 아이의 신발을 신고 나간 이유를 말입니다.



"그냥...너무 예뻐서...한번....."
영이의 아주 조그만 말들이 채 끝나지도 않았답니다.  불현듯 다가온 단발머리아이는 샌들을 냉큼 빼앗았습니다.  아주 화가 났나 봅니다.  그아이의 목소리는 유달리 높았습니다 . 잘 알아들을수도 없이 빠르게  영이에게 무어라 쏟아냈습니다.  나쁜주문을 함부로 쏟아내는 마귀할멈같기도 했습니다.



영이는 순간 홍당무의 얼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애의 마법에라도 걸린듯 개미처럼 너무나 조그만 몸이 되어버린것만 같았습니다.  미안하다고 네번이나 말했습니다.  정말 조그만개미가 얘기하는것처럼 아주 작은소리였습니다. 여간귀를 기울여야 들을수 있는 그러한 소리였습니다.

 

 

영이는 부끄럽고 창피하기 이를데 없었답니다. 모든친구들이 보는앞이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잘못을 한것이거든요. 더군다나 아이들 사이로 저만큼 떨어져 보고 있던 철이가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철이가 지켜보고 있었던거지요. 고개를 푹 숙이고 교실로 들어가는 철이였습니다.

 



오후수업내내 영이는  여른한낮 물한모금 얻어먹지 못한  강아지 같았습니다. 누군가 툭 하고 슬쩍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쓰러지기라도 할것 같았습니다.  참으로 측은한 모습이었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영이의 머리위로 벌처럼 웅웅거리며 달려드는것만 같았고  어지럼증까지 느끼게 되었답니다.

 


좀체로 흘러가지 않을것 같은 기나긴 시간들이 지나갔습니다. 어느덧 수업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모두 함께하는 청소시간이었지만 철이의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고  운동장을 지나면서도  영이는 철이를 찾느라 두리번 거렸습니다. 

 그늘진 우물가에도, 미루나무가 서있는 미끄럼틀 옆에도, 굴밤나무 밑 회전그네 뒤에도 , 그어느곳에도 철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이는 교문 한 귀퉁이에 몸을 기대어 막연히 철이를 기다렸습니다. 흰구름이 학교 앞산을 넘어 논길을지나고 또 너른 들판으로 사라질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철이는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영이를 보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리며 지나쳤습니다. '잘가-'  혹은 '안녕-' 하는 그 조그만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습니다.  마치 물건을 훔치기나 한  그런 사람처럼 수근거리고 벌레보듯 흘끔거렸답니다.

 

 얼마나 영이가 슬펐을까요?   남의 신발을 허락을 받지 않고 신은것은 잘못이예요.  그렇지만 영이는 서러운생각만 파도처럼 밀려들었답니다. 그렇게 사과를 했는데도 말이예요....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운동장엔  쓸쓸한 바람만이 소리를 내며 오고갔습니다. 바람은 영이의 이마에 내려온 까만머리카락을 가만 내버려두질 않았습니다. 머리카락을 몇번 쓸어올리던 영이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냥 서 있다보면 어쩌면 눈물이 비처럼 마구 쏟아질것 같았습니다. 엉엉 울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영이는 철이를 기다리는 일을 포기하고 교문을 뒤로한채 집으로 향했습니다.  마치 땅속이라도 기어들어갈듯한 모습이었답니다.  아! 그모습을 차마 마주할수없겠군요. 얼른  누군가 달려가 꼭 안아주고 등을 두드려주어야 할것 같았습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돌멩이들을 툭 툭 차대며 걸었습니다. 그러다 그만 커다란 돌멩이에  영이의 엄지 발가락이 채여버렸습니다.  너무 아파 눈물이 찔끔  새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영이는 낡고 오래된 까만운동화를  멀리 휙 던져버렸습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정말 펑펑 울고싶었습니다.   엄마도 밉고 오빠도 밉고 언니도 밉고 혼자 가버린 철이까지 모두  미웠습니다.

 



언니오빠가 신던 신발이었습니다.   막내인 영이는 언제나 그런것을 신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신발을 사달라고 엄마에게 조르지 않았습니다. 영이는  투정쟁이는 아니였습니다. 

영이가 착한것은 동네사람들이 다 알고 있답니다.   간혹 엄마가 도시에 나가 늦게 돌아오면 영이는 밥도 지어놓는 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걸레질도 하고 마당도 쓸고 하물며 빨래도 걷어서 차곡차곡 얌전하게 갤 줄도 알지요.  

동네 사람들은 영이가 이젠 시집가도 되겠다고 웃으며  얘기하곤 했습니다. 생각하고보면 부끄러운일이지만 그것은 칭찬이었습니다.  영이는 그런아이였습니다. 아주착하고 예쁜아이였답니다.

 



전학 온 단발머리 여자 아이를 생각하니 불끈 화가났습니다. 영이는 혼자  씩씩거렸습니다.   그아이가 오기전엔 신발에 대해서 별 특별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영이의 마음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산길을 걷는 내내 영이는 자기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그저 그 아이가 밉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습니다.  교실문을 밀고 들어가던 철이모습이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습니다.  철이의 모습은 아른거리며 사라질줄을 몰랐답니다.


 


어느덧 냇가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무리지어 흔들리는 갈대의 사각이는 소리조차  영이의 마음엔 슬픈듯이 다가왔어요. 언제나 가위바위보를 하기도 하고 물놀이도 하며 신나게  건너가던 철이와 영이였지요.   영이는 집으로 돌아올때 한번도 혼자 냇물을 건넌적이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제일 먼곳에 살던 철이와 영이였습니다. 오늘은 징검다리가 왜 그렇게 길게도 느껴지던지 영이의 긴숨들이 '후우욱 후우욱-'  건널때마다 냇물로 떨어져 내렸답니다.

 



건너편에 거의 다다를 즈음이었어요. 조금은 헐겁기도하던 신발이 그만 벗겨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힘찬물살에 쏜살같이 떠밀려가고 있었어요. 그러나 멀어만가는 신발을 영이는 남의 일처럼 서서 지켜만 보고 있었어요. 그냥 그렇게 나무처럼 말이지요 .  아무런 행동도 하고 싶질 않았답니다. 

그때였습니다. 어디선가  후다다닥 날렵한움직임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마치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같기도 했습니다.  



영이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소리나는곳으로 향했답니다.

....

철이였습니다.
마치  낮게 날고있는 커다란 새 같았습니다. 철이는 갈대를 헤치고 달려나왔습니다.

급하고 빠른 물살등에 업혀 미친듯이 도망하는 영이의 운동화를  향해 마구 달렸습니다.

그리고는 냇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철이의 옷은 있는대로 다 젖었습니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오는 철이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영이는 바라보았어요. 철이의 이마와 머리에선 작은별들이 수를 놓은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 멋진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정말 동화속 왕자님이 따로 없었지요. 그저 누구에게든 서운하여 젖어있던 영이의 무거운 마음은 어느사이 기분좋은 바람에 말라버린 보송한 이불같았습니다. 가볍고 따뜻해졌습니다.  그리고 철이의 빛나는 모습만 환하게 보였습니다.

 



철이는 이마를 훔쳐대며 영이에게 말없이 다가왔습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신발을 몇번씩이나 털어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쑤욱 건넸지요.

"바보같이 신발을 물에 떨어뜨리면 어떡해"

철이는 마치 영이의 오빠같았습니다.


영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반짝이는 철이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았어요.
아무도 영이가 그럴줄 몰랐지요. 구름도 너무 놀라 살짝 숨어버렸어요.
바람도 숨을 멈추었드랬어요.  놀란 철이는 뒤로 물러서다 그만  징검다리에서 미끄러져 풍-덩 물속으로 넘어지고 말았답니다.  미안한 영이였지만 봇물터지듯 까르르  웃음이 쏟아져나오고 말았지요. 철이는 벌떡 일어나 영이에게 마구 물장구를 쳐야 했습니다. 그냥..그냥 말입니다. 그러고 나니 부끄럽던 마음을 지울수 있었습니다.



영이도 물세례를 받고만 있을수는 없었지요.  아이들은 서로 질세라 젖먹던 힘까지 모두 쏟아내었어요.  그애들은 입은 옷 뿐만아니라 얼굴, 머리까지  모두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머리에서 코에서 귀에서... 여기저기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누군가 보았다면 그랬을거예요.   "꼭 물에 빠진 생쥐같구나"....
서로의 모습을 문득 바라보며 마구 웃어댔지요.  
정말 웃음이 났어요.  얼마나 웃어댔는지 나중엔 웃다가 지쳐서  배까지 저렸습니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바람을 타고  살풋이 내려왔습니다.  
영이와 철이의  다정하고 즐거운모습에 샘이나기도 했을꺼예요.  끼어들고 싶어 다른때보다 빨리 다가왔나봅니다.  영이와 철이의 웃음소리는 냇물을 타고 어디론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저녁은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노을은  냇물을  붉게 물들이고 두 아이들의 얼굴까지 예쁘게 색칠하고 있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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