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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 그리운 추억/
내 나이 열네 살이던 1974년 8월이었다. 나는 안양과 인접한 변두리 조그만 동네에서 살았
다. 우리 마을엔 중학교가 없어 안양으로 천안 발 서울행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하곤 하였다.
기차는 자주 연착을 하였으므로 새벽 다섯 시 쯤 안개 자욱한 길을 헤치며 일찍 집을 나서
야 했다. 그러던 중학 일학년 여름, 전철이 혜성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 기대
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확한 시간과 깨끗한 공간 그 빠른 속도....
버스를 타면 안양까지 사 십 분이상이 걸렸고 기차로도 이 십 오 분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
다. 그 시간마저 대부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던 시절 전철은 그야 말로 꿈의 통학차량으로
등장한 것이다. 말이 중학생이었지 나는 그때까지 어린아이 티를 벗어나지 못했고 전철의
칸칸을 누비며 수선을 피우며 지나다녔다. 삼십초 안에 내려야 한다는 소리에 바짝 긴장해
후다닥 뛰어 내린 후 가슴을 쓸어내리곤 하였다.
문득 손을 꼽아보니 전철의 나이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겼다. 1974년 그때 안양역에는 영부
인 육영수여사가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 역사 주변은 온통 꽃향기로 출렁거렸고 색색의 플래
카드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행사준비로 사람들을 온통 들뜨고 분주하였다. 그런데 광복절 행
사도중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서거를 하셨다. 수업 중에 소식을 들은 어린소녀들은 너나
없이 책상에 엎드려 울었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가난하고 추웠던 청춘의 시기, 나는 社內연애를 하게 되었다. 첫눈에 반해버린 남자가 있었
다. 어찌어찌 그와 연결되었는데 그는 인천방향의 역곡에 살았고 나는 수원방향의 부곡에 살
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인연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항상 늦은 퇴근시간이어서 데이트를 즐
길 시간이 별로 없던 평일엔 언제나 남영역 전철 홈에서 서로를 기다리며 앉아 있곤 하였
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사내 연애를 하는지라 섣불리 회사로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막연히 그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어느 때엔 두 시간도 기다린 적이 있었다.
오랜 시간 기다리다 계단 저 아래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르는 날렵한 그를 발견하면, 추위에
떨던 몸은 순식간에 녹아버렸고 그의 손을 잡고 아랫녘으로 가는 전철에 얼른 몸을 싣고는 하였다.
그와 내가 헤어져야만 하는 구로역에 도착하면 우리는 함께 내렸다. 오십 원짜리 커피한잔을 뽑아
나누어 마시면서 달아나는 시간을 아쉬워하였고 그 늦은 시각, 간혹 눈길을 주는 사람들의
시선을 비켜가며 짧은 입맞춤도 서슴지 않았다.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며 혀를 차기도 하였
을 것이다.
언젠가 그와 헤어지고 수원행 막차에 올랐을 때이다. 구로역을 떠나 정거장 두개를 지나면서
잠시 졸았던 모양이었다. 방송 소리에 눈을 뜨니 부곡역을 막 지나는 것이었다. 택시를 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칠흑 같은 밤, 찻길을 따라 용케 걸어온 것이다. 어둡고
아득하던 그 길, 두려움에 떨며 어찌 걸어왔는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생각만
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그 다음부터는 막차를 타게 되면 자리에 앉질 않고 한 귀퉁이에 몸
을 기대고 꼬박 서서가곤 하였다.
그와의 데이트는 칠 년 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해 찔레꽃이 흐드러지던 6월, 나는 기나긴 연
애의 종지부를 찍고 드디어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의 부모님과 동생이 기거하던 역곡의 집
으로 거취를 옮기게 되었다. 그때 나는 서울영등포에서 조그만 선물가게를 꾸려나가고 있었
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많았으므로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매일 전철에 오르거나 내리
는 일을 지속해야 했다.
목공예에 심취하던 시절이었다. 날마다 그 도구들을 가방에 잔뜩 넣어 가지고 다녔다. 그러
던 어느 날 아침 출근길 전철 속에서 일이 생겨 버렸다. 전철역에 내려서도 가방이 찢겨진
사실을 몰랐다. 장사 준비를 마치고 가방 속의 목공예 도구들을 꺼내려는데 나의 크고 묵직
한 검은 가방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찢겨져 있었다.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 어떠한
걱정보다 웃음부터 쏟아졌다. 날치기 범은 얼마나 놀랬을까. 내 가방 속엔 모양이 다른 각각
의 칼들로 꽉 차 있었다. 어쩌면 그가 손을 집어넣다가 베이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가끔 그 일들이 생각나면 웃음이 새어나오곤 한다.
휴일에 전철에 오르면 평일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여기저기 남을 배
려하지 않는 중년여인들의 소리 높은 대화들, 각양각색의 핸드폰벨소리와 통화소리....
오래 전 일본 여행 때 그들의 낮은 소리들과 옆 사람을 배려하는 작은 움직임, 전철 안의 잔
잔한 풍경들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우리의 일상화 된 모습 속에서 간간
이 보이는 외국인들 앞에 나는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그러던 어느 휴일의 전철 안, 내가 좋아하던 팝송이 은은히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그뿐 아
니라 남자의 깊이 있는 목소리가 좌중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그 옛날 음악다방의 디제이를
방불케 하는 그윽한 음성으로 노래에 대한 설명까지 곁들이며 중년의 상인이 장사를 하고 있
었다. 나는 잠시 시끄럽던 공간에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지자 눈까지 젖어 들면서 추억에
잠기게 되었다. 그때 창 밖에는 흰 눈이 풀풀 날리고 있었고 짧은 시간 고단한 삶은 노래로
하여금 위안이 되어주고도 남았다.
전철을 내리면서 전철 안에 잔잔한 음악이 흘렀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 지치고 각박한 세
상 저마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사람과 사람사이 물처럼 길을 트고, 유유히 음악을 흐르게
한다면, 하루의 시작과 마치는 그 순간들은 사뭇 유순함으로 채색될 것이다.
작년, 안양 역 전철 플랫홈에서 모차르트의 엘비라마디간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음악 속에
서 차를 기다리며 수많은 사유에 젖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불현듯 자취를 감추어 버린 음악
이 그립기만하다. 차가운 바람만 드나드는 플랫 홈, 황량한 벌판의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전
철을 기다린다.
Vivaldi / And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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