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스물 다섯을 마악 넘었다.
큰 회사 건물 일층 로비 서너평 남짓한 자리에 '담배,우표,각종 선물용품을 취급하는 가게를 열게되었다.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6년간 모은돈으로 시작했던 그 자리는 나를 이제껏 상인으로 머물게 한 것이다.
장사라는 직종은 보통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닌 정말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이 하는 것인줄로만 알던 나였다.
그런데 운명은 나를 이끌고 전혀 모르던 세상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사무실에서 종일 서류를 만지고 주야장창 계산기를 두드리던 것이 전부였다.
매일아침 손님을 만나 셈을 하고 내 잇속을 챙겨야한다는 사실이 내겐 버겁기만 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는 것이 인간의 얇팍한 속셈이 보이는것같아 서둘러 고개를 숙이지 못했다.
시골뜨기 나는 스물다섯이 넘어도 성숙하지 못하여 어떠한 이유인지 눈물을 쏟는 때가 많았다.
낯설던 시간은 더디게 흘렀지만 용케도 나는 흔들리던 그 다리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차츰 물건의 가지수도 늘리게 되었고 어떠한 요령도 생겼다.
나는 득이 되는 그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싶었다.
드디어 레코드판을 들여 놓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때 부터 내게 있어서 음악이란 없어선 안될 그 무엇이었다.
하루의 시작도 음악이었고 그 끝도 음악이었던 것이다.
꽃이 흐드러지는 봄날이면 꽃때문에, 그어느 여름 비가쏟아지면 비로하여, 가을이 찾아오고 그 가을이 떠날때
면 괜스레 감정에 복받쳐서, 그리고 눈이 오면 또 ....
내 기분의 높낮이는 평범하지 못했다. 늘 가파랐다. 그에 따라 음악 또한 몹시 흔들렸다.
1층로비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어떠한 장사, 그 일 보다도 친구와도 같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는것에 삶은
치중되어 있었다.
가게 맞은편 벽에는 위층 다방에서 운영하는 커피자판기가 놓여 있었고 때마다 사무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내려와
커피를 나누곤 했다. 커피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낯선사람과도 그 향기 하나만으로도 금새 웃음을 주고 받게
되는 것이니 나는 때마다 그들과 이어질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곳을 직장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은 오래된 친구
처럼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면 나애겐 나만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 빈 시간엔 기타연습으로 일과를 보내기도 하였다.
근사한 그곳 청년들과의 만남 속에서 속을 끓이기도 했던 시간들...
돌아보니 내 인생의 황금기는 그때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정운씨 이 음악 제목이 뭐지요?" 하고 물을 때마다 장황한 설명속에 싹트는 우정 혹은 알수 없는 묘한 감정들.
말강물처럼 그마음 위로 때로 멈추고 흐르던 수많은 음악들...
세월은 다정한 사연들을 아무일도 없었던듯 어느사이 다 묻어버리고 이십년이란 시간 건너편에 훌쩍 나를
데려다 놓았다.
저녁마다 기타반주와 함께 노래를 함께 부르던 사람들..
이른아침 출근하여 밝은 인사를 나누며 커피한잔을 나누던 사람들...
그득한 점심을 하고 가볍고 환한 얘기속에 웃음을 던지던 사람 사람들..
이제 저마다 오십을 바라보거나 혹은 넘기고 희끗한 머리카락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자식과 아내와 남편을 중심으로 두고 그들은 어디에서 나를 추억해 줄것인가 생각하니 생이 무상하기만
한 것이다.
제럴드 졸링의 노래는 가볍고 기분좋은 아침이면 아이처럼 청소를 하며 종종 올려 놓던 곡이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청소한 후의 그 말끔함처럼 몸과 마음의 찌든때는 사라지고 환기가 되곤 하였던 것이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둘러 출근하는 다정한 이들의 풋풋함...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는1층로비에는 그들의 걸음을 한층 가볍게 이끌어주던 레코드점이 있었다.
성큼 다가와 제맘대로 악수를 해대고 윙크를 슬쩍 던지거나 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도 그 반가움이 모자라
다시 또 돌아보며 머리를 긁적이며 층계를 헛디디며 올라가던...
싱그런 비누냄새가 퍼지던 소중한 사람들이 한때 내게 있었다.
그 시절이 나를 두고 가버렸듯이 지금 이순간들 또한 바삐 나를 지나가고 있다.
어느새 오후가 서둘러 떠나버리고 어제와는 다른 저녁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나는 또 언젠가 이 시절들을 떠올리며 막연한 그리움으로 생의 무상함에 젖으리라.
한순간 어떤 음악으로 소소한 사연들과 정다운 사람들을 기억해 내리라.
모든이의 가슴한자락엔 추억의 아련한 방이 있을 것이다.
어느날 문득 오롯이 삶을 돌아보며 가슴의 먼지를 툭툭 털어 내고 숨은보석같은 그리운 얼굴들을 찾아낼 것이다.
그 사람들 속에 내가 반짝거리며 숨을 쉬고 있었으면 참 좋겠다.
잊혀지지 않는, 잊을 수 없는, 그런 눈부신 사람으로 남을수 있다면 내 인생은 그래도 성공한 삶이겠다.
각별한 휴일이다. 얼어붙은 빈 거리를 바라보며 종일 제럴드 음악속에 나는 파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