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침묵을 고수하기로 했다.
휴일의 한 낮, 다른때 같으면 산의 정상에서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텅빈 집에서 고독과 친구가 되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어느새 오후 1시가 넘어가고 있다. 어쨌거나 점심은 챙겨야 하는 것 , 서너숟가락 의 밥과 고추장, 시금치 그리고 김을 바짝 구워 부숴 넣고 가볍게 비볐다. 참기름 대신 올리브유를 넣었는데 괜찮았다. 아니 맛있었다.
화는 화일 뿐이지,그래 ... 건강을 제일로 생각하는 나는 굶거나 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사과도 큰 것 한 개를 다 먹어치우고 브루콜리도 살짝 데쳐 먹는다. 무슨수가 있어도 과일과 야채는 빠뜨리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도 무언가 부족하다. 식탁위에 삶은 계란이 보였다. 어제 좋은교회 꼬맹이들이 전해준 것이었다.
삶은계란....
눈웃음이 기가막히고 입술이 붉던 희자가 떠올랐다. 남학생들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던 아이였고 고등학교때 매일마다 화음을 맞추며 노래하던 친구다.가끔 그녀와 함께 학교 앞 분식센터에 들리곤 했다. 그때 그애는 꼭 삶은계란을 집어들었는데 소금에 살짝 찍어 먹던 우리와는 먹는 방법이 사뭇 달랐다. 일단 계란을 반을 자른다음 노른자를 덜어낸다. 그리고 움푹한 자리에 케찹을 가득 넣고는 덥썩 베어먹는 것이었다. 얼마나 생경하던지 강산이 몇번 바뀐 지금에도 희자의 계란먹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계란을 반으로 가르고 노른자를 빼내었고 동그란 공간에 케첩을 한가득 넣었다. 그때의 희자처럼 입을 크게 벌려 한웅큼 먹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맛이다.
'친구야, 맛있지?'...
그애의 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희자와의 추억들이 줄을 잇는다.
수원 팔달산 아래인가 클래식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사람이 그다지 많이 드나들지 않았고 조명은 아주 어두웠다. 영화관 같기도 했다. 우리는 줄곧 블랙커피를 조용히 시켰다. 웅장하게 울리던 베에토벤의 음악에 짐짓 모든 것을 다 안다는듯 의자에 깊숙히 앉아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하고는 긴시간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입에 맞지 않은 쓴커피를 들었다 놓았다 를 반복하던 우리.... 그냥 커피를 먹으면 어때서 그 쓴 커피를 시키곤 했는지 웃음이 난다. 누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말이다.
그때의 나는 참 순진했다. 남자에 관해선 아는 것이 정말 없었다. 그애의 눈은 언제나 촉촉히 젖어 있었다. 불현듯 낮아지는 그애의 목소리에 귀를 바짝 대고는 했는데 아마도 S오빠 이거나 Y남학생 얘기 였을 것이다. 그런 그애가 나는 굉장히 부러웠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봄바람이 마구 밀려든다. 조그만 벛꽃잎들이 눈처럼 하얗게 흩날린다. 너무나 조그맣고 가벼워서 도무지 땅에 내려올것 같지 않다. 아주 오래된 버드나무아래 나무 벤취가 보인다. 제맘대로 이야기를 꾸며대는 동화속 귀여운 한나가 떠오른다. "희고 조그만 꽃들이 눈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끝이 나던가? 봄의 풍경이 책속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눈부시기만 하다.
자전거 여행중인 큰녀석은 어제 제주도를 떠나 부산을 돌고 있다. 어느새 내 핸드폰엔 부산의 봄 바다가 날아와 있다. 좋겠다 녀석은. 어른이 되어도 혼자 떠나는 여행은 쉽지 않은일 일 것이다. 선뜻 자전거를 싣고 배에 오른 녀석이 남자답고 내 아들 같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아이의 단면만 보았던 것이다. 녀석이 세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떠나 보내면서 엄마인 내가 먼저 깨닫고 있다.
무엇을 하기에도 무엇을 끝마치기에도 애매하다는 오후 3시가 되어간다.
버스가 쾌속 질주를 한다. 마치 그의 목적지는 바닷가라도 되는듯하다.
얼른 일어나야지. 절에 다녀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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