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검은설탕이 녹는동안/전경린

다림영 2008. 10. 4.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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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면 간단 할 것이었다. 이십년이나 지난 시간을 굳이 돌이킬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피하지 않기로 했다.

약속은 사흘 뒤 점심시간 지나 차 마실 시간으로 잡았다. 그가 당황해하는 느낌이 역력했지만 그런 식으로 가볍게 비켜가고싶었다.

 

가방을 현관에 세워 둔 채 전화기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쟁쟁거리는 외침이 신경의 어느 부분을 포크같은 것으로 심술궂게 꼭꼭 찌르는 듯 이 불쾌했다.

한동안 주인이 부재했던 하잘것 없는 빈빕의 적요와 시차의 허방속에서 내 몸은 건반이 숭숭 빠져나간 망가진 피아노처럼 놓여 있었다.

 

익숙한 아픔이었다. 먼 여행지에서는 늘 내 부엌과 방, 나만이 사용하는 커피잔과 냄비와 잘 드는 부엌칼과 발닦개와 내 거울과 내 창가의 풍경이 그립지만 돌아오면 그것들이 나를 붙들어주기에는 또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다시 천막을 치는 유목민처럼, 며칠동안은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지 못하고 약속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낯가람인지 반감인지 혹은 역겨움일지도 모른다.그리우면서도 역겨운 것, 소중하면서도 하찮은 것, 결국 누구나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서

살아간다는 허무한 깨달음, 평생을 그렇게 살 수도 있다는 초월과도 같은 담대함..."

 

 

"새하얀 머리를 뒤로 묶고 개량한복을 입엇으며 이마엔 세가닥 주름이 깊이 패어 있었다. 검고 단단했던 눈빛은 흐리고 표정엔 불안정한

고집이 서려 있었다. 무엇보다 얼굴이 전보다 커졌다.  마치 깊은 지하에 묻어두고 감자를 키우듯 조금씩 키워버린 것 같은 얼굴...

이사람이 정말 그인가...

같은 사람이라고 알은테하는 것이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단정하게 마주 앉았다.

"많이 변하셨어요.."

내 음성은 힐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많이 변한 것이 나쁜 짓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십년이라는 시간이 그와 나 사이에 엄연한 구조물처럼 비좁게 자리잡고 서로를 밀쳐내는 듯 했다. "

 

"나는 그를 빤히 쳐다 보았다. 경멸의 표정이 실렸을 것이다. 그는 많은 말을 삼키는 표정으로 한동안 차를 마셨다. 그를 만난 첫날 멍같이

푸르던 차맛이 되살아 났다."

 

*

 

세번 읽은 책이다.

그녀의 묘사력에 빠져서..

그런데 아직 '검은설탕이 녹는동안'..

이것의 의미를 찾지 못했고

다만 그녀의 글을 읽을 때는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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