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을 읽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다.
소설 보다는 사실 그에 대한 업적과 기타 실제 이야기들을 읽고 싶었다.
조그만 도서관엔 이 책 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뒤저보나..소설은 그렇다.
그에 대한 글을 찾아보았다.
퇴계의 가정생활
퇴계는 스물한살에 김해 허씨에게 첫 장가를 들었는데, 허씨 부인은 아들 형제를 남겨놓고 칠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맏아들 준이 다섯살, 둘째아들 채가 겨우 한달된 때였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다시 권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당시 퇴계가 존경하고 있던 화산(花山) 권주(權柱)의 맏자제인 권질이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예안에서 9년째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퇴계는 그런 권질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던 차에 권질이 "자네가 아니면 집안의 참극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딸을 맡길 사람이 없네"라며 유언처럼 부탁하자 퇴계는 권질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권씨 부인을 맞이한 이후로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한번은 일가친척들이 제사를 지내려고 모두들 종가에 모여 제사상을 차려놓았는데, 권씨 부인이 제사도 지내기 전에 상 위에 놓인 음식을 집어먹었다. 일가친척들이 무언중에 퇴계를 힐난하는 빛을 보이자, 퇴계는 "제사도 지내기 전에 며느리가 먼저 음복하는 것은 예절에 벗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조상께서 후손을 귀엽게 여기실 터이니 손자며느리의 행동을 노여워하시지 않을 겁니다."라고 감싸주었다.
또 한번은 상가에 조문을 가려다가 흰색 도포자락이 해어진 것을 보고 그곳을 좀 꿰매 달라고 했더니, 권씨 부인은 흰 도포에 빨강 헝겊을 대어 기워왔다. 퇴계가 그것을 그냥 그대로 입고 갔더니,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며 "흰 도포는 빨강 헝겊으로 기워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예학에 정통한 퇴계가 옷을 그렇게 입고 오자 그것이 예법에 있는 것인지 확인하려 한 것이다. 퇴계는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퇴계가 부인을 소중히 대하고 부족한 부인의 말을 말없이 들어주는 것은 제자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퇴계의 제자 중에 부인과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데, 집으로 찾아뵈러 왔다가 권씨 부인을 보고 "나는 학문이나 인격, 모든 면에서 선생의 발끝에 미치지 못하나 내 부인은 매무새나 음식솜씨, 손님을 대하는 모습 등이 현격히 낫지 않은가. 그런데도 내가 십여 년을 박대해서 아직 자식도 없으니…" 하고 반성했다. 그 제자는 귀향하는 즉시 부인과 다시 조촐한 예를 갖추고 신방을 새롭게 꾸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퇴계가 47세 되던 해 7월에 권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들에게 "너희들은 친어머니가 별세했을 때는 너무 어려서 상주노릇을 못했으니 지금이야 말로 친어머니와 다름없이 상주(喪主)된 도리를 다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생일에 며느리가 버선을 지어 보내자 참빗과 부채를 주어 답례하였고, 손자며느리가 단령과 행건을 지어 보내자 바늘과 분을 주어 답례하였다. 가족들 간에 으레 당연하게 생각하기 쉬운 일에도 그 정성과 마음을 헤아려 정을 표했다.
퇴계가 50세 되던 무렵에 생활이 궁하여 아들을 처가살이시켜놓고 있었을 때는 "나도 너의 처가살이 어려움을 알고 있다. 아비가 궁하여 자식이 궁한 것은 아무 부끄러움이 아니다. 내가 이번에 내려가면 너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마" 하고 아들의 마음을 달래 주기도 하였다. 아들에게조차도 일방적이고 권위적으로 무엇을 명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퇴계가 처가와 친가, 친손과 외손을 똑같이 고르게 돌보고, 아들이 없는 처가의 제사를 받들었던 면모는 오히려 오늘에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볼 만한 점이라고 느껴진다.
퇴계는 누구인가
올해는 퇴계 이황(1501~1570)의 탄신 500주년. 퇴계학연구원과 국제퇴계학회 등에서 그를 추모하고 사상을 계승하려는 행사가 활발히 준비되고 있지만 우리에게 퇴계는 500년의 시간만큼이나 멀리 있다. 본지는 퇴계의 이해를 돕고자 시리즈 ‘퇴계는 누구인가’를 매주 한차례 마련한다. 관련학자들이 일화를 중심으로 퇴계의 인간적인 면모를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2001년, 새천년이 개시되는 올해는 퇴계선생 탄신 5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선생은 지금으로부터 꼭 500년 전 이 땅에 태어나 70평생을 살면서 학문의 위업을 이룩한 것이다.
퇴계 이황,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 인간과 학문의 규모에 비추어 답이 결코 간단하게 나올 물음은 아니다. 그 사람 됨됨이에 대해 혹시 묻는다면 나는 얼른 할 말이 있다. ‘겸허’라는 두 글자이다. 그는 평생을 잘난 척하거나 자기를 과시하는 법이 없었던 것 같다. 겸허는 그의 행동뿐 아니고 글 속에 찬찬히 배어 있다. 죽음에 임해서도 그는 “장례를 아무쪼록 간소하게 치를 것이요, 묘비는 조그만 돌에 ‘退陶 晩隱 眞城 李公之墓’라고만 새기라”는 유언을 한다. 임금 선조까지 그를 극진히 대하여, 관작을 굳이 마다하고 돌아가는 데도 번번이 불러서 그는 지위가 높이 올라 있었다. 그럼에도 조촐하게 고향 산천에 은거한 사람이란 뜻만을 나타낸 것이다.
또 퇴계는 어떻게 해서 그토록 학문을 대성할
수 있었는가 묻는다면 나는 ‘문학공부’ 네 글자로 평생을 정진한 결과라고 대답하겠다. 율곡은 퇴계를 정암, 조광조에 견주어 “재주와 그릇은 정암에 못미치지만 의리를 깊이 궁구하여 정미를 다한 데 이르러서는 정암이 못미친다” 하였다. 퇴계학은 그 자신이 구도자적 자세로써 진리탐구에 혼신의 노고를 바쳐서 쌓은 ‘공든 탑’이다.
그가 투철히 찾아 묻고 배워 알고자 했던 진리의 길은 어떤 길인가? 앞서 공자가 열어놓았고 뒤에 주자가 나서서 닦은 그 길이다. 이 길을 두고 퇴계는 “고인을 못봐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고?”(‘도산십이곡’)라 노래하였던 것이다. 성현이 닦아놓은 길이기에 그대로 따라가면 될 터이다. 하지만, 그 길은 지극히 쉽고도 지극히 어려운 길이었다.
“우부도 알며 하거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 다 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성현의 가르침은 인간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만민이 다 실천할 수 있거니와, 기실은 성인도 미처 다 실천하지 못했던 어렵고 머나먼 길이다. 이 길을 똑바로 걷기 위해 퇴계는 ‘묻고 배우는 공부’로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퇴계학은 유학, 주자학의 적통이 되었으니, 일본의 한 유학자도 “백세의 뒤에 주자의 도통을 이은 사람은 오직 퇴계다”라고 평한 바 있다.
그런데, 인간에 있어 참다운 겸허는 내실에서 우러나는 자세이다. 자신의 내면이 튼실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겸허는 비굴로 될 밖에 없는 것이다. 주체의 확립은 퇴계에 있어 관건적 과제였으니 ‘묻고 배우는 공부’ 자체가 마음공부에 다름 아니며, 진리탐구는 먼저 자신의 마음 속에 확충·각인되기를 요망한다. 이 마음은 확 트여 있어야만 확충이 가능할 터이요, 맑고 깨끗해야만 각인이 선명하게 되리라. 때문에 그의 마음은 항시 자연으로 향해 열린 한편, 시와 음악을 애호하는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 이에 학문과 함께 고도의 성취를 보인 자연시의 아름다운 경지가 퇴계의 정신세계에 펼쳐질 수 있었다.
퇴계의 시대로부터 50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예던 길’ 그대로 따라갈 수 없음은 물론이다. 상전벽해라는 옛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른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변했더라도, 아니 너무 변했기에 견지하고 회복해야 할 문제는 오히려 절실하다. 퇴계 이후 대학자로는 다산이 손꼽힐 터인데 다산부터 이미 퇴계의 ‘예던 길’을 따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산은 퇴계를 마음 깊이 존경하여 ‘도산사숙록’이란 저작을 남긴다. 다산은 이 저작의 종결부에서 공언과 공청을 강조하였다. 퇴계가 자기 앞의 여러 훌륭한 선학들에 대해 비판적 지적을 가하고 있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그것은 모두 대공지정의 마음에서 나온 ‘공언’이라 한다. 이 공언은 편견과 사심에 끌리지 않고 듣는 ‘공청’의 풍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나 또한 다산의 이 말씀에 기대서 우리의 당면 급무는 공청병관임을 역설한다.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퇴율(退栗)로 더 잘 알려진 두 사람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훌륭한 교육자이다. 성공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분명 비범한 인간이었지만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황과 이이의 삶과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지폐에 새겨서 기릴 정도의 위대한 인물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위인’의 무게를 걷고 그들이 성취하려 했던 삶의 지표를 되짚어 볼 때 이황과 이이의 진면목에 다가설 수 있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중에서).
‘고산(高山) 구곡담(九曲潭)을 살람이 몰으든이/ 주모(誅茅) 복거(卜居)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즙어 무이(武夷)를 상상(想象)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 (율곡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중에서).
이황이 따르겠다는 고인은 누구일까? 요순, 공자와 같은 유가의 성인이다. 이이가 해주에서 은거를 계획하며 배우고자 한 대상은 무이정사(武夷精舍)에서 제자들을 교육했던 주자였다. 이황과 이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이상으로 삼던 유학자였으며, 주체의 정신적 완성을 통해 성인의 길을 가고자 했다. 다만 입지(立志)에서 성도(成道)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그 선택은 동일하지 않았으며 문학에 대한 입장, 시의 세계도 달랐다.
이이의 천재성을 염려한 이황
현실에 환멸 느끼고 수양·교육 택해 사유와 결합한 상상력으로 구도 1501년(연산군 7년)에 태어나 1570년(선조 3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퇴계(退溪). 28세에 진사 회시에 급제했고 43세에 은거를 결심한 후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 이후 도산서당에서 교육과 저술에 전념했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계몽전의(啓蒙傳疑)'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
이황과 이이가 처음 만난 때는 이황이 58세, 이이가 23세인 1558년(명종 13년) 이른 봄이다. 이이는 성주목사였던 장인 노경린을 뵙고 강릉 외가로 가는 길에 예안(禮安) 도산(陶山)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이황은 50세인 1550년 2월, 처음으로 퇴계의 서쪽에 거처를 정하고 한서암(寒栖庵)을 지었다. 도산서당이 낙성된 것은 60세인 1560년 11월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삶의 여러 굴곡을 거친 노학자와 방황의 시간을 마치고 거친 세상으로 두려움 없이 나아가려는 청년의 해후였다. 35세라는 나이 차이만큼이나 두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옛날부터 이 학문, 세상이 놀라고 의심하였네(從來此學世驚疑)/ 이익을 위해 경서 읽는다면 도에서 더욱 멀어지리(射利窮經道益離)/ 감격스러워라! 그대만이 홀로 깊이 뜻 이룰 수 있어(感子獨能深致意)/ 사람들 그대 말 듣고 새로운 앎 얻으리(令人聞語發新知)’ ( ‘퇴계집 권2’ 에서).
‘도를 배우면 어떤 사람도 의혹이 없어지게 될까(學道何人到不疑)/ 병폐의 근원, 아! 내게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네(病根嗟我未全離)/ 접대에 응하여 차가운 계곡의 물 마시니(想應捧飮寒溪水)/ 마음과 몸, 시원해짐을 알겠네(冷澈心肝只自知)’ (‘율곡전서 권14’에서).
이황은 이이를 ‘문장을 지나치게 숭상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첫 눈에 이이의 지식과 견문을 알아 본 이황은 일부러 시를 주고받는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사대부가 만나면 으레 시문으로 속내를 드러내던 당대의 관행을 무시한 것이다. 이황은 이이의 천부적인 영민함, 넘치는 문학적 재능이 도학자로 대성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을 염려했다. 이미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수양과 교육의 길을 선택한 노성한 학자에게 험한 파도 앞에 선 젊은이의 모습은 위태롭고 안타까운 것이었다.
별시 장원하며 현실 참여 택한 이이
"뜻을 펴기 위해선 현실 정칙 속으로" 일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녹아있어 1536년(중종 31년)에 나서 1584년(선조 17년)에 타계했다. 본관은 덕수(德水), 호는 율곡(栗谷)이다.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아홉 차례 과거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렸다.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이 전한다. |
떠나던 날 아침 눈이 내려 시를 짓게 하니 이이는 그 자리에서 두어 편 시를 지었다고 한다. 위의 작품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이이는 금강산생활과 그 후에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정신적 방황을 고백하고 자문을 구했다.
그는 학문을 통해 깊은 삶의 의혹을 풀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한 청년이었다. 만남 직후 강릉에서 보낸 이이의 편지에는 '불교 서적의 중독'에서 벗어나 ‘대학’ ‘중용’ ‘심경’에 천착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가 보인다. 이황은 편지를 받고 궁리(窮理)와 거경(居敬)의 주자학적 학문 방법을 권했다.
평소 이황은 제자들에게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거 공부와 명예를 낚으려는 문장 연마를 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젊은이가 삶에 대한 깊은 반추없이 입신양명에 급급한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그의 문하에서 처사형 지식인, 철학자가 다수 배출 된 것은 이런 교육관의 영향이다.
이에 반해 이이는 선비가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현실정치권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과거공부의 현실적 필요성, 불가피성도 인정했다. 이황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이이는 그 해 겨울 명문장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別試)에서 장원을 거머쥐었다. 자신의 길을 선택해 간 것이다.
달밤에 옷깃에는 매화 향기 가득
문장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을 경계했지만 이황 자신도 대단한 문학애호가였다.
그는 제자 정유일에게 보낸 시에서 ‘시가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 스스로 그릇된다(詩不誤人人自誤)’고 하면서 흥과 정이 오가는 상황에서는 시심을 억누르기 어렵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황은 시 창작에 있어 한 구, 한 자를 신중히 생각하고 가다듬어 발표하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사유의 깊이에 대응하여 심미적 완성도도 높다. 이황은 문학을 통해 작가와 독자의 내면이 순화되는 온유돈후(溫柔敦厚)의 효용을 추구했다. 그의 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청정(淸淨), 고아(高雅)의 이미지는 주리(主理)철학의 시적 대응으로 인욕을 초탈한 정신의 절대 자유이며 종교적 열락의 경지이다.
‘뜨락을 거니니 달이 나를 따라오네(步中庭月人)/ 매화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梅邊行幾回巡)/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길 잊었더니(夜深坐久渾忘起)/ 옷깃에 향기 머물고 달그림자는 몸에 가득해라(香滿衣巾影滿身)’ (‘퇴계집 권5’에서).
달밤에 매화 주변을 거닐면서 달빛과 매화 향에 심취한 이황의 모습이 선연하다. 이황과 매화와의 관계는 감상 주체와 완상물의 수준이 아니었다. ‘고종기(考終記)’에 의하면 이황은 임종을 앞두고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여 마치 오랜 친구와 영결하듯 했다.
이황은 매화를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하고 자신은 도선(陶仙)이라 칭하여 둘의 사이를 지기(知己)로 표현했다. 고졸하고 청아한 매화에 완벽한 인격을 갖춘 이상적 인간의 이미지를 투사한 것이다. 도연명의 국화, 주렴계의 연꽃처럼 이황에게는 매화가 정신적 높이의 형상물이었다.
연잎 위에 구슬 서너 개 구를 무렵
이이의 시에는 이황에 비해 도학적 분위기가 옅다. 그 대신 일상 생활에서 부딪치는 주변의 경물을 대상으로 감정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표출한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이이의 시는 관념적이라기보다는 서경적, 즉물적 경향이 강하다.
이이는 문학의 최고 경지를 ‘선명(善鳴)’이라 했다. 그는 독자보다 작자의 측면에서 접근해 기(氣)의 작용으로 나오는 소리 중에서 올바름에 부합하는 대목을 골라 문장으로 표현했다. 그는 38세에 편찬한 중국 시선집 ‘정언묘선(精言妙選)’의 제1권을 충담소산(沖澹蕭散)의 풍격을 지닌 고시를 중심으로 묶었다. 가식과 기교에 힘쓰지 않고 작가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담박한 작품을 추구한 것이다.
‘구름이 푸른 산 둘러 반쯤 삼켰다가 뱉더니(雲鎖靑山半吐含)/ 갑자기 비가 흩날려 서남쪽을 씻어 주네(驀然飛雨灑西南)/ 어느 때 가장 시상을 재촉하던가(何時最見催詩意)/ 연잎 위의 구슬 두서너 개 구를 무렵(荷上明珠走兩三)’ (율곡전서 권1’ 에서.
‘시를 재촉하는 비(催詩雨)’라는 멋진 제목이 붙은 작품이다. 푸른 산에 머물렀던 작가의 시선이 날리는 빗줄기를 따라 연 잎위의 빗방울로 옮겨지면서 시상이 구체화했다. 이이의 시에는 구체적 현실 상황에서 생성된 순간적 감흥의 포착과 감각적인 묘사가 많다. 경세지향적(經世指向的) 가치관에 대응해 그의 문학에는 현실의 다양한 인정세태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녹아있다.
이황이 깊은 사유와 결합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구도의 길을 표현했다면, 이이는 부딪치는 일상사를 창작의 계기로 삼고 실행의 과정을 시화한 것이다. 이황과 이이는 16세기를 대표하는 도학자로 그들 문학의 중심에는 도학적 감수성, 규범적 미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우주 만물과 인간에 내재된 이법(理法)을 형상화하는 길은 다양하다. 이황과 이이처럼 시안(詩眼)의 방향, 그 높낮이가 달라지면서 도학문학의 세계는 넓은 스펙트럼을 보인다.
황희 정승과 아들 버릇고치기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었던 횡희 정승은
18년 간이나 영의정을 지냈지만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 결백하여 청백리로 불렸다.
황희 정승의 아들 중에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황희 정승에게 그 아들은 근심거리었다.
여러 번 훈계도 하고 때로는 매도 들었지만
아들의 버룻은 고쳐지지 않았다.
황희 정승은 무언가 방법을 달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날 황희 정승은 술을 마시러 나간
아들을 밤늦게까지 마당에 서서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황희 정승의 어께에
밤이슬이 내려 옷이 축축해질 무렵,
술에 취한 아들이 비틀거리며 대문으로 들어섰다.
이것을 본 황희 정승은 아들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요." 술에 취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보던 아들이 인사를 건네는
사람을 자세히 들어다보다 순간 술이 확 깼다.
"아버님. 왜 이러십니까?"
황희는 여전히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아들에게 말햇다.
"무릇 자식이 아비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 집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이 아니라 내 집에 들어온
손님이나 마찬가지가 되지요.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중하게
맞이하는 것은 예의인즉. 지금 저는
손님을 맞고 있을 뿐입니다."
그 뒤로 황희 정승의 아들은 옳지 못한
버릇을 고치고 아버지 못지 않은
청백리 선비의 자세로 학문에 정진했다.
잊을까 걱정돼 이 책 저 책 뽑아 놓고서
흩어진 걸 도로 다 정리하자니,
해가 문득 서산으로 기울어지고,
가람엔 숲 그림자 흔들리누나.
막대 짚고 뜨락으로 내려가서
고개 들고 구름재를 바라보니,
아득히 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고,
으스스 산과 벌은 차가웁구나.
농삿집 가을걷이 가까워지니,
방앗간 우물터에 기쁜 빛 돌아.
갈가마귀 날아드니 절기 익어가고,
해오라비 우뚝 선 모습 훤칠쿠나.
그런데 내 인생은 홀로 무얼 하는 건지
숙원이 오래도록 풀리질 않네.
이 회포를 뉘에게 얘기할거나.
고요한 밤, 거문고만 둥둥 탄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저녁 산보(晩步)'
庭前兩株梅 뜰 앞의 두 그루 매화나무
秋葉多先悴 가을되니 다투어 시드네
谷中彼회蔚 산골짜기는 아직 울창해서 (회=艸+會)
亂雜如爭地 좁은 땅을 다투는 듯 한데
孤標未易保 뛰어난 풍채 보존키 어려운 것은
衆植增所恣 온갖 나무들의 제멋대로 때문이라
風霜一搖落 바람과 서리 호되게 몰아치면
貞脆疑無異 꼿꼿하든 약하든 무슨 차이 있으랴
芬芳自有時 저마다 꽃답고 향기로운 때
豈必人知貴 사람이 귀한 것 알아주어야
........ 秋懷 가을의 회포
高蹈非吾事 높은 벼슬은 내 하고자 하는 일이 아니네
居然在鄕里 흔들리지 않고 향리에 있고 싶어.
所願善人多 바라노니 착한 사람 많이 만드는 것,
是乃天地紀 이게 천지의 덕 갚는 도리 아닌가
..... 한서한에서 그해에 지은시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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