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62장 자연과학은 도를 모른다. P97

다림영 2008. 7. 30. 19:58
728x90
반응형

내 마음은 도의 속이다.

볼수 없는 것이 있다. 들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만져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맡거나 잴 수 없는 것이 있다.

이러한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은 드러나지 않으므로 속이라고도 한다.

율곡은 마음을 성정의라고 밝힌 적이 있다. 거품이 일면 물은 보이지 않고 거품만 보인다. 성이란 거품밑에 있는 물이나 같다. 드러나 보이는 거품 같은 것이 정이요, 의와 같은 것이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물만 있다면 거품이 일지 않는다. 물이 외부의 것들과 어떤 관계를 지녀야 물위에 거품이 인다.  마음밖의 것들을 사물이라고 한다. 마음이 사물과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을 정의라고 한다. 이러한 정의가 물위에인 거품 같다고 여겨도 된다.

 

 

 

마음에 거품이 일게 되면  여러 말들이 생겨난다. 말이 생겨나게 되면 여러 의미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떠오르는 의미들은 형형색색이고 수시로 변한다. 그러나 거품 밑의 물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변하지 않고있는 마음의 터를 성이라고 한다. 여기서 노자가 도를 영아에 비유한것을 알만하게 된다.

 

 

 

갓난아이를 핏덩이라고 부른다. 갓난아이의 마음에는 거품이 일지 않는다. 말하자면 갓난 아이는 마음속을 허라고 한다. 그 속에는 정의가 만들어 내는 사물과 맺은 아무런 의미들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갓난 아이를 살덩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목숨인 까닭이다. 목숨의 씨앗같은 것이 성이라고 새겨도 무방할 것이다.

 

 

성이란 씨앗이 돋아 정의를 피워 낸다. 이를 생명이라고 한다.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을 덕이라고한다.

덕의 손길이 생명에서 떠나는 것을 사라고 한다. 떠난 것은 어디로인가 다시 가야 한다. 사는 어디로 간단 말인가? 죽음은 도로 되돌아간다. 이처럼 존재하는 만물은 왔다가 간다.  말하자면 도는 만물로 하여금 생사의 길을 밟게 한다.  노자는 생사의 길밟기를 반자라고 했고 도의 움직임의 반자는 도가 풀무질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도의 풀무통은 허이다. 그 풀무통에서 나오면 생이고 들어가면 사이다. 우주만물은 그 생사의 길손일 뿐이다. 그 길손은 저마다 성을 지니고 있다. 맹자는 사람의 성과 개의 성이 다르다고 했지만  그 성을 부여한 자를 말하지 않았다. 인성과 견성이 다를 지라도 도의 것임에는 다름이 없다고 보는 것이 곧 노자의 포일이다. 그 하나를 성이라고 헤아려도 무방할 것이요. 기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일기를 도의 풀무통을 들고나게 하는 기운이라고 여겨도 될 것이다. 그 기운은 선한 사람이라고 편애하고 선하지 않는사람일고 해서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도를 떠날 수 없음을 말한다. 왜 노자는 자주 이러한 말을 되풀이 했을 까? 왜냐하면 인간은 한사코 도를 잊어버리고 살을 살기로 채우려는 착각을 범하기 때문

이다. 노자의 다음과 같은 절규를 들어보라.

 

 

도라는 것은 만물에 드러나지 않고 속에 있는 원자이다. 그것은 선한 사람의 보물이지만 선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간직하고는 있다. 착하고 아름다운 말은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며. 존경스러운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 그러하므로 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버릴 수 있을 것인가.

 

 

 

멀쩡하던 사람이 혈압 탓으로 중풍이 들면 불인 하다고 한다. 불인 이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그러나불인할 수록 소중히 하라고 한다. 천지가 불인 인 까닭이다.

어느 집이나 노인이 있으면 가족들을 노인이 중풍들까봐 걱정한다. 중풍든 인간은 오줌똥을 받아 주어야 하고 밥을 떠먹여 주어야 하는 까닭에 시중들기가 여간 어렵지 않게 된다. 그래서 중풍이란 병환이 효자를 판가름한다고 한다.

 

 

 

늙은 부모 중에 한 분이 중풍에 걸려 몸져 눕게 되면 편히 돌아가시지 못하게 되었다고 자식들은 근심한다. 편하게 임종을 맞는것도 타고난 복이라고 한다. 그 복을 잃었으니 안타깝다는 심정보다 더 지극한 선은 없다. 천수를 탈없이 바라는 것은 사람의 욕심일 뿐 어차피 임종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므로노년의 죽음은 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식의 정은 지극한 선에서 나온다.

 

 

 

그러나 시중을 들다 보면 지치게 되어 어서 돌아가주기를 바라는 심정이 돋아나게 된다. 이러한 심사는분명 불선한 것이다. 선했던 것이 불선한 것으로 벼하는 것을 인정이라고 한다. 이처럼 인정에는 선과 불선이 얽혀 있다.

편안한 임종을 바라는 심정은 선하지만 임종을 재촉하는 것은 불선이다.  선한 것을 따지고 보면 무엇이나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며 불선한 것을 따지고 보면 무엇이나 하찮게 하며 싫어하는 마음이다.

 

 

 

무엇이든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곧 도로 통한다. 그러나 불선은 도에서 멀리 덜어져 나가려고 하지만 결국 그 길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심정으로 중풍이 든 노인을 간병하면서 인정이 선과 불선을넘나든다.

 

 

 

미언이란 어떤 것인가?<美言>

그것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속에서 우러나오는 참말이다. 참말은 상처를 낫게 하고 거짓말은 상처의 고름을 채운다. 행복을 나누면 두 배로 늘어나고 불행을 나누면 반으로 준다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심정으로 주고 받는 말이 곧 미언이다.

속셈을 하면서 말하지 마라. 그것은 거짓말이다.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지 마라. 그것은 말로 재주를 부리려는 것이다. 말로 재주를 부리면 거짓말의 공장이 된다. 거짓말은 항상 난장판을 만든다. 그러나 미언은 시골 장터처럼 훈훈하게 한다. 그래서 미언은 선하고 위언은 불선하다.

 

 

 

존행尊行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남을 먼저 위하려는 뜻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추행은 남을 무참하게 하여 자기를 더럽히는 것이고 폭행은 남을 아프게 하여 자기를 잔인하게 하는 짓이다. 앉을 자리 누울자리를 살펴서 행동하라. 이것이 곧 존행의 길이다. 그러나 자기만 앞세우고 챙겨서 염치없는 짓을 하면 그것은 자행恣行이다.

남에게 보탬을 주는 행이야 말로 존행이 아닌가!

 

 

 

남을 도와 보탬이 되게 하면 선이요, 남을 해쳐 손해를 입게 하면 불선이다. 불선함을 알고 뉘우치면 욱 선이 된다는 것을 알면 잃었던 길을 다시 찾은 셈이다. 그래서 선에만 도의 깊은 뜻이 보물처럼 있고 불선한 것에는 없다고 노자는 말하지 않았는가?선은 도의 뜻이 보물로 소중히 간직되어 있지만 불선에도 그 뜻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보관돼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살펴 들어야 한다. 입다 더 인생에 튼튼한 믿음은 없다. 왜냐하면 불선도 선으로 희귀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선도 지나치면 악이요, 미도 지나치면 추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말이다.

 

 

지나친 선은 불선을 증오하려고 하는 까닭에 선이 악을 짓게 되고 지나친 미는 추한 것을 증오하려고 하므로 더럽게 되는 수가 잇다. 노자는 불선한 것을 용서하는 선이야말로 가장 튼튼하다고 다음처럼 밝혀 주고 있다.

 

 

 

황제를 세우고 삼정승을 두고 수레를 타고 가 현자에게 보물을 주어 모시는 것일지라도, 가만히 앉아 이와 같은 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보다 못하다.

모든 사람이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세상에는 선, 불선을 분별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모두 선한 사람이라면 세상의 아픔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 아닌가! 도를 향해 나아간다 함은 말을 선이 되게 하는 것과 행동을 선이 되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함을 뜻하고 있는 셈이다. 이보다 더 정곡을 찌를 수는 없다.

 

<원문의역>

도라는 것은 만물에 드러나지 않고 속에 잇는 원자이다. 그것은 선한 사람의 보물이지만, 선하지 못한사람일지라도 간직하고는 있다. 착하고 아름다운 말은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며, 존경스러운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 그러하므로 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버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황제를 세우고 삼정승을 두고 수레를 타고 가 현자에게 보물을 주어 모시는 것일지라도, 가만히 앉아 이와 같은 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보다 못하다.

옛부터 이러한 도를 소중히 해운것은 무슨 까닭인가? 매일 구하지 않아도 얻어지고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는 까닭이 아닌가! 그래서 천하에서 귀하게 된다.

 

 

 

도움말

제 62장은 도의 깊은 뜻을 잊지 말라고 한다. 온갖 사물을 대할 때 도를 잊지 마라는 것이 이 장의 경고이다. 도를 밝히기 위하여 고행할 것은 없다. 일상생활에서 선하게 되려고 하면 할 수록 도를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편한가!

만물지오의오는 드러나지 ㅇ낳고 숨어 있는 것이며 존재의 근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겨도 될것이다. 그러한 근원을 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이시의 시는 사고 팔고 하는 곳을 듯하며 여기서는 주고 받는다고 이해하면 된다. 말한 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고 하는 데서 미언의 시를 느낄 수 있다.

가이가인의 가는 남에게 보탬을 주고 도와주는 것을 뜻하고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백지장도 둘이맞들면 그만큼 가볍다는 속담에서 가의 참뜻을 헤아릴 수 있다.

공벽은 값 비싼 보물을 비친다는 듯이며 요즘말로 한다면 거금의 스카우트 비용을 들여 모셔오는 것을 암시한다.

 

 

 

사마는 네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생각하면 된다.좌진은 편안히 앉아서 정진하는 것이다.일구의 구는 고생스럽게 구하는 것, 즉 고행등을 연상하면 된다. 

 

 

제 63장 무위 무사는 태만이 아니다

 

맹물맛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다

무위를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해로운 짓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무위이고 더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또한 무위이다. 나를 취하면 더럽고 나를 버리면 깨끗하다고 불가에서는 말한다. 이 역시 무위를 말하는 셈이다. 욕심을 절제하면 무위의 절반은 되는 셈이고 욕심을 버리면 무위는 곧장 드러난다.무사를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무사는 자연을 뜻한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가만히 두면 그것이 곧 자연이다. 무사는 그렇게 하는것이다. 수작을 부리지 마라.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자연이다. 꾀를 부리거나 구실을 붙여 덧칠하지 마라. 그러면 자연은 저절로 된다.

 

 

 

일을 꾸며 어렵게 만들고 함정을 파 놓고 남이 빠지기를 도모하지 마라. 그러면 일은 자연스럽게 풀린다. 순리가 자연의 길이란 것을 헤아리면 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불가의 말도 자연을 뜻하는 셈이다. 자연스럽게 하라. 순리를 어기지 말라.

이것이 곧 무사요. 자연이다.

그러나 사람은 한사코 긁어 부스럼을 낸다. 이런 짓을 유위라고 한다.

혹은 인위라고도 한다. 노자가 절인기의 라고 한 것은 인을 잘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인을 앞세워非人의 짓을 하지 마라 함이요, 의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의인척하면서 불의를 일삼지 마라 함이다.

인간 중심으로 억지를 부리지 않으면 무위이다.

 

 

 

 

사람은 패를 짓고 편을 짜 서로 다툰다. 사랑에는 인색하면서 시샘은 많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이것은 모두 이기의 심술이다. 심술을 부리지 않으면 무사하다. 왜 세상일이 뜻대로 안되는가? 심술탓이라고 여기면 무사의 참뜻을 깨우친 셈이다. 실을 실패에 잘 감아 두면 실을 풀어 쓰기가 어렵다.

이것은 모사일 뿐이다. 일을 잘 풀어 가고 싶다면 실패에 실을 감는 마음으로 하라.

 

무위의 무사는 부드럽고 유연한 마음씨에서 그 싹이 튼다. 그런 마음은 넉넉하면서 성실하다. 성실하지 않으면 무위의 무사는 멀멀어진다. 꾀를 부릴수록 게을러 지고 게으름을 피울수록 도둑이 된다고하지 않는가!

탈이 나고 험이 되는 것은 모두 순리를 어겨 비롯되는 도심들이다.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훔치는 것만 도둑질이 아니다. 한탕주의도 도둑이고 기회주의도 도심이며 복부인이나 투기꾼. 졸부란 것은 도심의 졸개들이다. 인간이여! 이러한 졸개들로 타락하지 마라. 그래서 노자는 다음처럼 우리들에게 약이 될 말을 들려주고 있다.

 

 

무위하라. 무사를 받들어라. 맛없는 것을 맛보라. 큰것은 작은 것에서 비롯되고 많은 것은 적은 것에서 생긴다. 덕으로 원한을 갚아라. 어려운 일은 쉬운일에서 계획되고 큰일은 사소한 일에서 빚어진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일에서 도모되고 큰일은 반드시 사소한 일에서 꾸며진다.

 

알부자로 소문난 노파가 있었다. 그 노파는 큰 딜가에 빌딩을 갖고 있었다.  몇개의 점포와 목욕탕이 딸린 그 빌딩은 노파엑 달마다 많은 돈을 안겨 주었다.

노파에게는 친자식은 하나도 없었고 조카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노파는 조카를 멀리했다. 재산을 빼앗아갈 도둑으로 보았던 것이다. 노파는 조카에게 재산을 물려 주지 않을 것이므로 군침을 삼키지 마라고했다. 차라리 남을 입적시켜 자식으로 삼아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호언 하면서 호사스럽게 살았다.

 

 

 

그 노파의 이웃에 젊은 부부가 세를 들어 살았다. 부부가 노파의 자식노릇을 하겠노라 노파에게 공을 들였다. 그렇게 몇달이 가자 노파는 부부를 자식으로 삼았다.

입적을 마친 부부는 노파의 재산을 가로채려고 했다. 노파의 인감을 후려내 서류를 꾸며 법적으로 소유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뒤늦게 이를 안 노파는 분통이 터져 입적을 무효화 하려 할 즈음 뇌졸증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재산을 가로챈 부부는 노파의 살덩이를 어느 병원에 입원을 시켜 놓고 죽기만을 기다렸다. 조카가 이를알고 병문안을 갔지만 제지당했다는 진실이 진정서로 세상에 알려졌다. 조카는 노파가 살아나 입을 열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고 노파의 재산을 착복한 부부는 어서 그 노파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세상은 노파를 동정하지 않았다. 노파는 자기만 알고 살았기 때문에 끝이 망칙한 것이고, 양자로 입적한 부부는 처음부터 도둑이 틀림없으며 뒤늦게야 나타나 연고권을 찾자고 고소한 조카도 잿밥을 탐내는 얌체와 같다고 세상은 수군거렸다. 이런 사건은 무사하지 못해 빚어진 추태들이다.

무사하면 세상의 입질에 올라 눈총을 받지 않는다. 무사할 줄 몰라 탐욕이 더럽게 추해지는 것이 아닌가!

 

 

 

 

맛없는 것을 맛보라.

곧고 바른 것에는 냄새가 없다.달콤한 말을 멀리하고 쓴말을 귀담아 들으라고 한다. 그러나 쓰든 달든 말이 내는 냄새는 뒷내를 남기게 된다. 좋은 말도 잦으면 짜증난다고 하지 않는가! 침묵보다 더 좋은 말은 없다. 침묵은 냄새가 없는 말인 까닭이다. 입맛을 내자고 향료를 칠 것은 없다. 먹는 것이 편하면그만이다. 그래서 노자는 실기복이라고 했다.

금은 보화로 금고를 채우고 산해진미로 뱃속을 채우자고 아우성을 친다. 그런데 아우성을 물욕이라고 한다. 물욕의 맛이 꿀맛이라고 야단이지만 뒷끝에는 구린내가 난다.오죽하면 털어 먼지 안 날놈 어디 있느냐고 인간들은 삿대질을 하는가? 그래서 냉수 마시고 속차리라는 너스레가 나온것이다.

 

 

 

 

냉수는 맛이 없다. 그런데 왜 냉수맛이 천하일미라고 하는가?  보탠것이 없는 까닭이다. 맑고 깨끗한것이 물맛이다. 커피나 홍차는 매일 마시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반나절만 물을 못마시면 갈증이 나고갈증이 심하면 죽는다. 목숨을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맛은 무맛이 아닌가!

무위의 무사는 무미하다.

왜 큰 것은 작은 것에서 나오고 많은 것은 적은 것에서 나올까?

눈꼽보다 작은 씨앗에서 천년 거목이 된 느티나무가 나온 까닭이다. 어미는 가을 산천에 떨어지는 짐승의 털끝이 가장 크고 태산이 가장 작다고 했다. 물욕또한 그렇다. 좀도둑이 소도둑으로 되는 법이다.

무위의 무사는 큰것을 탐하고 작은 것을 팽개치지 않는다. 자라게 할 뿐 망하게 하지 않는 까닭이다.

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은것이 크게 된다는 것이고 적은 것이 많아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촌이논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다면 대소다소를 알것이고 자랏 불어나는 것이 길고 선하며 오래 간다는 장을헤아릴 것이다. 대리가 계장이 되고 계장이 과장이 되는 것이 아닌가! 큰 것은 크고 작은 것은 작다는단정에서 음해도 나오고 음모도 꾸며진다.

 

 

 

원한으로 덕을 갚아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다.가시방석에 앉아 쓰디쓴 쓸개를 씹으며 복수의 칼을 갈자. 이렇게 하지마라는 것이다. 칼은 칼을 부르고 피는 피를 부른다. 이것이 원한의 분이다.

소인은 앙갚음을 하고 대인은 용서한다. 남의 심정을 모를 때 강팍해지고 남의 심정을 헤아릴 때는 넉넉해 진다. 넉넉한 것이 옹색한 것을 끌어안아 주어야 한다. 원한을 용서하면 우정이 된다. 우정보다 더큰 덕의 샘물은 없다. 그래서 공자도 패거리를 짓지 말고 어울릴 줄 알라고 했다. 패거리를 지으면 내편네편이 생기고 편이 갈라지면 원한을 짓게 된다. 편싸움이란 언제나 몫을 놓고 다투기 때문이다. 남을

아프게 하지 말고 보살펴 주라. 이것이 보원이덕이다.

 

 

 

쉬운일부터 소중히 하라.

패망한 나라나 무너진 정권을 보면 하나같이 백성의 원을 무시하거나 탄압한다. 원은 옳고 그름을가려 시비를 풀자는 데서 그 싹이 튼다. 정치가 그 싹을 보살펴 새순을 돋게 하기는 커녕 싹뚝 잘라내 버리는 짓을 하면 강권이 발동된다.

강권은 호미로 막을 구멍을 가래로도 못 막게 탈을 낸다. 백성의 가려운 데를 찾아 긁어주면 될 일을 팽개쳐 두고 강권으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믿는 정치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다.

 

강권은 굳고 강해 보이고 백성은 약해 보인다. 그러나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노자의 말은 틀리지 않는다. 못된 정권이 백성을 이긴 적은 없다. 그러므로 정치는 백성의 사소한 불편도 소중히 할 줄 알아야 한다. 백성에게 골탕을 먹이면 난리가 일어난다. 이러한 이치는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게으름을 피우며 놀아나고 기생충처럼 붙어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어려움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들이 도란어기이이고 위대어기세이다.

 

성인은 후회하지 않는다.

 

동양에서는 인생의 선생을 성인이라고 한다. 도가에서는 무위로 사는 사람을 성인이라 하고, 유가에서는 인의의 화신을 성인이라고 하며, 불가에서는 견성한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른다.

무위이 성인이든, 인의의 성인이든, 견성의 성인이든 모두 다 한결같이 무심한 선생이다. 왜 성인을마음이 없는 사라이라고 할까?  성인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까닭이다.

불가의 해탈은 자리로 부터 벗어나라는 것이고, 도가의 사기 또한 자기를 버리라는 것이며, 유가의 극기도 자기를 이겨내라는 말이다. 그러나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긍정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현대인은 이를 오해하고 사기나 극기를 멀리한다.

 

 

 

현대인은 마음 속이 넓지 못하다. 마음속에 빈곳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별의 별 생각과 느낌들로 마음속을 가득 채운다. 의식하므로 나는 실존한다고 단언한다. 바야흐로 정보의 시대가 아닌가! 지식이 모

자라면 살아남지 못하고 지식에서 뒤지면 도태된다며 자기는 실존한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현대인은 마치 뱀을 만난 풍선개구리와 같은 셈이다.

도전할 거리를 쉴 새없이 만들어야 생활이 윤택해진다고 자신한다. 생활의 윤택정도를 따져 자기의 실존을 확인하려는 것이 현대인의 물질화 이다. 물질의 풍요가 곧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보증수표라고 믿는 것이 또한 인간의 물질화가 아닌가! 그러나 성인은 물질화를 떠나 생명화를 누리는 장본인이다.

 

 

 

현대인은 생활의 윤택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고통스럽게 하고 잇는 줄을 모른다. 물질의 풍요와 정비례해서 갖가지 범죄가 난무하는 것을 보라. 살인은 남의 목숨만 해치는 것이 아니라 제목숨도 해친다. 못된짓을 범하고 쇠고랑을 차는 인간드은 모두 제목숨을 스스로 짓밟는 셈이다. 목숨이 소중한 줄 모르고 물질이 소중한 줄 알았다가 당하는 환란이다.  목숨을 돈과 바꾸려는 짓이야 말로 현대인이 앓고 있

는 가장 큰 착각이며, 현대 문명이 인간을 현혹하는 장난이다. 그러나 성인은 그런 장난에 말려들지 않고 덕으로 어울리는 것을 따른다.

 

 

 

셍활을 위해 목숨이 있는가 아니면 목숨을 위해 생활이 있는가! 이렇게 자문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 아닌가! 먹기위해 사는가아니면 살기위해 먹는가? 이렇게 자문해 도 답은 나올 것이다. 생활 때문에 목숨

을 해치지 마라. 그러면 덕이란 것을 당장 체험할 수가 있다. 욕망은 생활의 윤택을 끊임없이 부채질하고 덕은 편안한 생명을 즐기라고 한다. 욕망이 탐하느 생활의 윤택은 언제나 다툼을 겪게 되고 목숨을 해치는 마약처럼 되려고 한다. 그러나 성인은 욕망이란 마약에 중독되지 않는다. 성인은 생명을 해치는것이라면 차라리 빈궁한 생활을 즐긴다.

 

 

 

물질화 의 장난은 결국 욕망이 ㅁ나들어 놓은 덫이거나 함정이다. 이러한 덫에 걸려들지 않고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자는 자기를 버려라 했고 공자는 자기를 이겨내라했다. 노자의 성인 은 사기하고 공자의 성인은 극기한다. 말은 서로 다르지만 무엇보다 생명이 소중하다는 관점에 일치하고 있다.

무위 무사한 성인은 자기라는 것을 버리고 산다. 그렇게 사는 성인의 모습은 어떤가? 다음과 같은 노자의 말을 들어보면 성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은 끝끝내 크게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큰 일을 이룰 수가 있다. 무릇 경솔한 약속은 신빙성이 적은 것이고 너무 쉽사리 처리된 것은 반드시 일을 어렵게 한다. 이와 같으므로 성인은 쉬워도 어렵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성인에게는 끝내 어려움이 없다. P111

 

 

반응형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P116부터  (0) 2008.08.01
그 다음부터  (0) 2008.07.31
그 다음부터  (0) 2008.07.29
P81부터 노자  (0) 2008.07.28
P70부터  (0) 2008.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