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밭을 전문으로 하는 자가 김노인을 찾아와 동사 너머 산자락에 있는 닷마지기 밭을 세 놓으라고 권
했다. 그는 김노인에게 세배의 도지를 해마다 주겠노라며 군침을 돌게했다.
김노인이 멀뚱하게 있자 그는 노인장의 아들과는 이미 합의가 됐지만 노인장의 승락엇이는 안된다 하기
에 찾아왔다고 했다.
김노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엇을 하려고 그렇게 비싼 도지를 내고 밭을 빌려쓰겟다는 것이요?"
"노인장의 밭을 빌려 인삼 농사를 했으면 합니다."
"도지를 후하게 받으면 이문을 낳을 터인데요"
이말을 들은 김노인은 화가 나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절대로 안되오. 곡식을 사서 먹는 농사꾼을 보았소?"
삼밭 꾼은 성사를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날 밤 김노인은 아들을 방으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 김노인은 다음 처럼 조용히 타일렀다.
"인삼밭으로 내놓으면 밭을 망치고 말아, 인삼재배는 농사가 아니야, 장삿속이지. 밭에다 인삼을 한번
심게 되면 6년동안 그 밭에는 아무런 곡식을 심을 수 없어. 인삼 뿌리가 땅의 진기를 모조리 빨아 먹어
밭을 망치고 말아. 땅을 밭으로 일구자면 얼마나 힘이 드는 줄 모르느냐? 대대로 그냥 지어먹은 밭이 아
니지 않느냐.밭에서 얻은 것 만큼 거름을 넣고 북을 주고 가꾸어 밭으로 일군거야. 농사꾼은 수확한 곡
식만 생각하면 안돼. 곡식을 많이 얻어 내자면 흙을 기름지게 해야 한단 말이야"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못햇다고 빌었다. 그러자 김노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인삼은 곡식이 아니야, 약초지. 인삼은 없어도 살지만 곡식이 없으면 못살아"
치자가 김노인 같은 농부를 닮는 다면 정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치자는 치인사
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요. 나아가 노자가 왜 치인사천을 농사짓는 일에 땀을 흘리며 검소
한 농부에데 비유했는 가를 헤아릴 수 있는 까닭이다.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치인은 농부가 땅을 밭으로 일구어 곡식을 심고 정성껏 길러 곡식을 거두어 먹고 살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농부처럼 정치를 하라는 셈이다. 말하자면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사람을 다스린
다는것을 헤아리면 정치는 백성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어느 농부가 심은 곡식을 시달리게 할 것인가.
백성을 시달리게 하지 마라. 이것이 선정의 첫걸음이 아닌가!
하늘을 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먹고 살게 하는 곡식을 주는 땅을 고맙게 여기고 거름을 넣어 흙을 기름지게 하는 것과 같다. 농부가 땅
을 고맙게 여기고 거름을 넣어 흙을 기름지게 하는 것과 같다. 농부가 땅을 고마워하는 것처럼 정치를
하면 그 정치는 사천의 정치이다. 땅추기를 조장한는 정치를 우리는 보았다. 그 따위 정치는 탐관오리를
숨겨 주는 도적의 소굴로 둔갑한다. 사천은 백성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라는 뜻으로 새기면 된다.
백성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지마라. 이것이 사천이색의 정치이며 선정의 목적지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김 노인과 같은 농부가 없는 것처럼 농사하는 심정으로 치인사천하는 치자도 없다.
이제는 곡식을 곡식으로 보지 않고 곡식을 돈으로 본다. 현대는 농없사회가 아니라 산업사회라고 호언
하면서 인간은 산다.
그러나 산업사회라고 해서 먹지 않고 사는 세상은 아니다. 여전히 밥을 먹어야 살고 물을 마셔야 산다.
산없사회는 천지를 양계장처럼 생각하고 만 물을 양계장이 암탉처럼 여긴다. 네모진 철창에 가두어 놓
고 매일 달걀을 낳게 진을 빼다 알 낳는 능력이 없어지면 사정없이 팽개쳐지는 양계장 닭처럼 만물을
남용하려고만 한다. 이보다 더한 인간의 방자함이란 없다. 왜 인간은 이렇게 방자해지는가?
물질과 기술만 믿고 자연과 조복을 망각한 까닭이다.
조복이란 무엇인가? 천지가 만물의 둥지요. 만물을 낳아준 어머니의 품안이란 것을 알고 그 품안으로
서슴없이 안기는 것이다 노자가 밝히는 도덕은 만물을 낳고 길러주고 거두어 가는 어머니이다. 조복은
그 품안으로 되돌아가 안기는 것이다.
현대인이여! 천지를 보물창고로 여기지 마라 만물을 자언으로 여기지 마라. 자원은 자본이 되고 자본이
되고 자본이 세상을 좌우한다고 단언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어머니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것이나 다를
바락 없다.이렇게 노자는 절규하고 있는 셈이다. 이쯤 생각해 본다면 노자가 왜 조복이란 거듭거듭 덕을
쌓는 것과 같다고 했는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적덕이란 무엇인가.
적덕은 김 노인과 같은 농사군이 농사짓는 일과 같다. 땅에 퇴비를 넣어 기름지게 하면 흙도 살지고 곡
식도 살진다. 이것이 거듭 거듭 덕을 쌓는 것이다. 비료만 부리고 농약을 뿌려 곡식의 증산만 노리면 땅
은 메말라 간다. 양계장의 암탉이 폐계가 되는 것처럼 땅은 페지가 된다. 이익만 을 노리고 해로운 짓을
저질러 폐지로 만드는 것은 적덕이 아니다. 적덕이 아닌 것을 부덕이라고 한다.
목숨을 해롭게 하는 공해를 생각해 보라. 공해가 곧 부덕이다. 부덕은 목숨을 해롭게 하는 것이고 적덕
은 모든 목숨을 소중이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도덕심의 근본이 아닌가! 그래서 노자는 도덕정치를 설
파했다. 그러나 현대의 치자들이 도덕정치를 말로만 앞세울 뿐 실제로는 우습게 여기므로 세상은 물
질의 풍요를 누리면서도 병을 앓는다. 이러한 병은 첨단 과학이 첨단공학이 약속하는 물질문명으로 치
유 될 수 없다. 여전히 그 치유법은 다음과 같은 노자의 진언에 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듭해 덕을 쌓으면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으며,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다면 극단적으로 달릴 줄 모
르고 극단적으로 달릴 줄 모르면 나라는 망할 수가 없다. 나라를 망할 수 없게 하는 어머니는 능히 장
구하다. 이러한 것을 깊고 트는한 뿌리라고 한다.
욕망의 성취를 목표로 하면 결국 세상은 부덕의 소굴로 둔갑해 버린다. 그래서 현대는 적덕이 불가능한
세상으로 돌변해 가고 있는 중이다. 적덕은 무욕으로 쌓아진다. 그러므로 정치가 무욕으로 행해진다면
세상은 욕망을 극복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이것이 거듭해 덕을 쌓으면 극복이 안될 수 없다는 말의
속뜻이다.
서로 저마다 요깃ㅁ을 부리지 않는다면 제 몫다툼은 없어진다. 다툼이없어지면 시비도 없고 이념도 없
어져 패를 갈라 싸울 것도 없다. 이념의 냉정은 결국 물질주의 가 빚어낸 양극의 제몫다툼이 아니었는
가!그리고 물질주의는 사회를 갖가지 이익집단의 세포분열을 가열시켜 저마다 제몫찾기에 핏대를 올리
면서 나라는 벌집처럼 분열되지 않는가! 이 모든 아픔은 현대인들이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를 타고 사정
엇이 질주하려고만 덤벼드는 탓이다. 치자가 욕망을 극복할 줄 알면 백성도 덩달아 그렇게 하기 마련
이다. 그러면 나라는 망할 수가 없다.
결국 무엇이 나라를 튼튼히 하고 튼실하게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노자는 중적덕이라고 밝혀주고
이를 나라를 융성하게 하는 어머니라고 비유해 준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뿌리가 깊고 튼튼해 장구하다
고 밝힌다. 그 어머니는 무엇인가. 도덕이다.
노자는 도를 어머니라고 비유했다.그 품안을 곡신이라고 햇다. 그 품안에서 만물이 서로 어울려 살게 하
는 손길을 덕이라고 했다. 한날 한 시에 난 열손가락이 길고 짧지만 어느것 하나 물어 아프지 않는 것이
없다는 속담은 도덕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말해준다. 도의 사랑과 덕의 손길은 편애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를 무극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세상에서 무극이란 무엇일까 시비가 없게 하는 것이요. 제�다툼을 없게 하는 것이며, 이념으로
갈라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 아닌가
정치가 현실을 무극의 경지로 이끌어가자면 적덕의 정치 밖에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의 정
치는 적덕의 길을 팽개치고 이해상관의 길로만 치달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은 차츰 더 심하게 부덕
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는 셈이다. 어느날에나 노자의 당부를 귀담아 듣는 세상이 될까?아득하기
만 하다.
<원문의역>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것은 농부의 농사와 같다. 무릇 심고 길러 내 거두는 것은 서슴지 않
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서슴지 않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듭 거듭 덕을 쌓는 것이
라고 한다.
거듭해 덕을 쌓으면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으며,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다면 극단적으로 달릴 줄 모르
고 극단적으로 달릴 줄 모르면 나라는 망할 수가 없다. 나라를 망할 수 없게 하는 어머니는 능히 장구하
다. 이러 한 것을 깊고 튼튼한 뿌리라고 하며,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도라고 한다.
<도움말>
제 59장은 말단에 매달리지 말고 근본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고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근본을 다라 사는 것을 적덕이라고 생각해 보게 한다.
색은 검소하고 수수한 농부를 뜻한다.
조복의 조는 멀지 않음이요, 복은 근본으로 되돌아감이라고 파악하면 조복은 도덕에 서슴없이 안기는
뜻이 된다. 도덕에 되돌아가 서슴없이 안기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면 그것이 곧 적덕이다.
무불극의 불극은 욕망의 극복을 못하는 것을 뜻한다. 막지기극의 기극은 사심의욕망탓으로 분열이 극
심 한 것을 뜻한다.
유국은 나라가 융성해 망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유국지모으 모는 근본이요,도덕의 비유이다. 노자가 도를 현빈이라고 비유한 것을 생각하면 된다. 빈은
새끼를 낳아 기르는 암컷을 뜻한다. 빈모는 자웅을 뜻하고. 부모 역시 자웅이요, 음양이며 천지이다. 그
러나 유국지모의 모는 부모의 모같다고 보지마라고 노자는 현빈이라고 했다. 도는 홀로 우주만물을 낳
았기 때문에 신비로운 어머니인 셈이다.
제 60장 작은 생선으로 국을 끓이듯 다스려라
무엇이 백성을 상하게 하는가
나라는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지 백성이 나라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백성이 나라를 사랑
하는 것은 아니다.ㅇ ㅐ국심을 백성에게 강요하는 나라는 망하고 만다. 백성이 떠났기 때문이다.백성
이 없으면 나라는 없다 . 나라에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토와 국민이 함께 해야 나라가 된다.
유태족이 2천년이나 민족으로만 있었다는 것을 앉을 자리를 잃어서 서있기만 했던 것이고 못난 조선
이 나라를 팔아먹어 우리가 36년동안 일제의 탄압을 받았던 것은 집을 팔아먹고 행랑채에 나앉아 종
살이를 했던 것이나 같았다.
머슴살이를 하면 새경이나 받지만 종살이를 하면 개밥만 얻어 먹는다. 그래서 일제시대 살다 못한 백
성들이 정든 땅을 떠나 북간도 등지로 가서 버려진 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들었던 것이다. 왜 이 지경
으로 백성을 아프게 했던가? 조선조의 치자들이 입으로는 군자를 외치면서 뒤로는 패거리를 지어 백성
을 사냥감처럼 여겼기 때문이었다.
조선조에서는 벌열들이 사냥꾼노릇을 햇다. 벌열이란 집권세력의 패거리를 말한다. 그러한 패거리에 들
어갈 수 잇는 후보를 양반이라고 한다. 벌열에 든 양반은 상민을 종으로 삼았고 밀려난 양반은 상민을
머슴처럼 부렸다. 양반들은 서로 벌열이 되려고 피나게 싸움질을 했고 죄없는 백성들은 굶주려야 했다.
서계박세당은 조선조의 양반이었지만 유별 났었다. 그는 조선은 주자학때문에 망한다고 말했고 사서
와 더불어 노자의 도덕경을 독자적으로 연구했었다. 그의 사변록으로 보면 선자였다.
공자 말씀을 들어야지 그 말씀을 주석한 것에 매달리지 말라고도 했다. 이러한 주장은 다산의 경전의
말씀 그 자체를 통해 그릇됨을 터득한다는 생각과 서로 통한다. 이는 실학사상이며 조선의 주체사상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서계도 귀양을 가야 했었고 다산도 귀양살이를 해야 했었다. 옳은말이 팽개쳐지고
틀린 말이 통하는 세상은 썩고 병들어 망하게 마련이다.
백성을 양반과 상놈으로 갈라놓고,양반은 군자이므로 세상을 다스리고 상놈은 일꾼이므로 일만 해야
한다는 치세의 길을 닦았던 조선은 노자의 입장에서 보면 무도하기 짝이 없던 나라였다. 그래서 조선조
는 조나 장자를 불온문서로 몰았었다.
적덕의 정치에는 신분차별이란 없다. 양반의목숨은 귀하고 상놈의 목숨은 천하다는 것을 천지는 용서하
지 않는다. 도덕은 천지를 만물의 부모가 되게 하며 만물의 천지가 자녀가 되게 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정치 사상이 곧 도덕정치의 골격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군자가 세상을 다스린다고 말하지 않았다.
도가 세상을 다스리며 성인은 그러한 것을 따른다고 보았다.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면 그 참뜻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으로 생선국을 끓이는 것과 같다. 도로써 세상에 임하면 귀신이 서로 뒤
바뀌지 않는다. 귀신이 서로 뒤바뀌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하늘이 백성을 상해하지 않는다. 하늘이 백
성을 상해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성인도 또한 백성을 상해하지 않는다.
농고를 졸업하고 농대에 들어간 손자가 마늘 밭을 손질하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드릴 새참을 들고 나갔
다. 새참을 맛있게 먹은 노인이 손자를 대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는 대학생인 손자의 손을 쓰다듬
어 주었다. 손자는 더덕처러 되어버린 조부의 손을 바라보며 측은 한 생각이 들었다.
밭가에 앉아 둘은 주변의 산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손자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일터에 나와 할아버
지 옆에서 놀았었다. 손자는 과학이 힘들지 않게 농사를 짓는 방법을 앞으로 찾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말을 듣고 노인은 빙긋이 웃으며 그럴수 있느냐는 눈치를 보였다.
"뿌리에는 감자가 달리고 줄기에는 토마토가 달리는 새로운 식물이 개발된답니다"
"그럴것이 뭐 있나? 귀신잡는 짓은 안하는 것이 좋지"
"할아버지! 달나라에 가는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요?"
"하늘은 신이고 땅은 귀라는 것을 잊었느냐?"
"할아버지! 세상이 달라졌어여. 이제 주역의 시대가 아니라 과학의 시대라는 것을 할아버지는 몰라요."
응성받이였던 손자가 장성해 이상한 말을 하지만 할아버지의 눈에는 손자가 대견해 보였다.
"야야, 집에 가거라. 나머지 일을 다하면 점심 짬에 가마"
"제가 할 터이니 할아버지는 앉아 쉬시지요?"
"안된다. 마늘밭 고랑의 북은 돋우던 사람이 해야 한다. 이 사람 저사람 손이가면마늘이 삐쳐. 삐치면
마늘 쪽이 작아져. 내가 북을 줘 왔으니 내가 주어야 한다. 어서 돌아가거라."
어쩔수 없다는 것을 아는 손자는 빈그릇을 들고 돌아갔다. 혼자 남은 노인은 손자의 뒤를 보면서 혼
자 중얼거렸다.
"뿌리는 마늘이 되고 줄기는 파가 되는 것을 개발한다고 말하지 않아 고맙다"
과학은 천지를 물질로 보고 주역은 천지를 귀신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과학은 에너지를 말하고
주역은 기를 말한다. 같은 것을 주역은 생명의 힘으로 보았고 과학은 물질의 힘으로만 보고 있을 뿐
이다. 노인은 그 기의 덕으로 마늘도 자라고 보리도 자라며 벼도 자란다고 믿는다.
땅의 기운은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의 기운은 땅으로 내려와 만물이 서로 어울려 산다는 주역의 발상
은 미신일까? 저마다 생명의 기운을 받아 누리는 것을 인간의 요망에 따라 개조하고 변질 시켜도 괜찮
단 말인가. 주역은 안된다 했고 과학은 된다고 한다.
북을 정성껏 돋우면서 노인은 손자의 말을 알수 없었지만 손자가 다른 생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리고 주역이나 과학이냐를 놓고 손자아 논전을 벌일만큼 지식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농사를 짓는 뜻에 노인은 손자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날밤 노인은 손자를 사랑으로 불러내, 자신이 평생 들추어 너덜너덜하게 낡아 버린 주역책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얘야, 틈이 있거든 이것도 종종 읽으면서 과학을 공부해라. 한가지만 먹으면 몸에 좋지가 않아. 이것
저것 골고루 먹어야 몸이 튼튼해지지"P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