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P42부터 노자

다림영 2008. 7. 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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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려라. 시비를 가려 안다고 하면 얼마를 더 알것인가! 사람과 사람끼리 명지를 놓고 다툴것은 없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자신의 속을 들여다 보라. 캄캄하면 빛을 밝혀 밝게 하고 더러우

면 씻어서 깨끗이 하라. 그러면 인간은 성인과 멀리 떨어져 사는 존재가 아니다. 성인은 누구 일까?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시비를 일삼지 않는 사람이 성인의 이웃이 된다. 왜 그러하단

말인가? 다음과 같은 노자의 말을 들어 보라.

아는 자는 말하지 않으면, 말하는 자는 모른다. 앎의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아라. 앎의 예리함을 무디게 하고 그 분란을 풀어라. 앎의 빛남을 흐리게 하여 먼지를 묻혀 같게 하라. 이를 일러 알수 없지만 신비로

운 같음이라고 한다.

 

원효스님이 대일 스님을 찾아갔다.

승방에 앉아 원효스님이 말을 하고 대일스님은 듣고 만 있었다.  원효스님의 말을 듣는둥 마는 둥 하

면서 한나절을 다음 대일 스님이 냇가로 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청했다.

냇물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안주를 삼아 두 스님은 실컷 술을 마셨다.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었으니 이제 싸야 할 것이 아니냐고 대일 스님이 원효스님에게 말을 걸었다.

원효스님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물가운데 있는 바위에 올라가 똥을 싸자는 대일 스님의 말에 원효스님도 그렇게 하자 고 하였다.

물 가운데 올라가 두 스님은 꽁무니를 까고 뒤를 보면서 대일 스님이 원효스님의 항문에서 쏟아지는

똥을 보았다. 대일 스님이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기를 누고 그대는 똥을 눈다'

변을 보고 있던 ?스님이 대일스님의 뒤를 보았다.대일 스님의 꽁무니에서 물고기가 살아서 그대로 물속으로 줄줄이 떨어지고 있었다.

왜 이런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까? 갖는 것과 가진 것이 없는 것을 밝히려는 것 때문이다.

원효스님은 고기를 먹고 똥을 쌌으니 고기를 먹은 것이고 대일 스님은 고기를 먹었지만 고기를 그대로

누어 버렷으니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다. 먹어서 살로 가게 한 것은 소유가 아닌가!

한나절 동안 절간에서 원효스님은 말을 했고 대일 스님은 들어주기만 햇다는 것을 吾魚汝屎라고 풀이

해도 된다. 불가에서는 말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것을 똥을 싸는 짓이나 같다고 보았다. 그래서 가진

것을 없앤다는 것과 항상 똥을 쳐내는 것은 같다. 대일 스님의 항문으로 쏟아졌다는 물고기는 불언이요.

원효스님이 눈 똥은 언자인 셈이다. 대일 스님은 무소유를 깨우쳐 말이 없었고 원효 스님은 아직 무소

유의 경지에 들어가지 못해 말이 많았던 셈이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이 선맥에서 말하는 글로, 세우지 않는 다는 것과 서로 통한다.

문자르 써서 논하지 않는다 함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머리에다 머리를 더하면 입에다 입을 더하게 된다. 시비를 따지게 되면 머리속은 바삐 돌아가야 하고 입

은  쉴 틈없이 놀려대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머리에다 머리를 더하면 입에다 입을 더하게 된다. 시비를 따지게 되면 머리속은 바삐 돌아가

야 하고 입은 쉴 틈없이 놀려대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머리에다 머리를 더하지 마라. 부리에다 부리

를 더하지도 마라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해 변론이나 이론을 앞세워 말짓들을 격파해 버린다.

텅 비어 맑고 밝은 마음이라면 무엇을 말해 치장을 할 것인가! 말하지 않아도 맑고 말하지 않아도 밝다.

변명도 구차하고 변론도 딱한 것이닌가! 이것은 원효스님이 똥을 싼 것이나 같다. 대일과 원효의 옛이야

기가 노자의 지자 불언과 언자부지를 이해하게 된다.

 

지자 불언의 지자는 마음이 곧 도인 인 것을 아는 것이요. 불언은 마음과 도가 이미 함께 그 자체가 참

다운데 무엇을 더해 말할 것이 있느냐는 경지?.

도는 무엇이든 하나로 안아 사랑하라고 한다. 마음이 그 도를 닮아 있다면 우주 만물을 하나로 터득한

다.  그러므로 지자는 포일과 득일의 만남이나 같은 셈이다.

참이면 입을 열 필요가 없다. 거짓이 말을 낳는다. 거짓말은 입을 바쁘게 한다고 하지 않는가!

왜 거짓을 범하는 가? 참을 모르는 까닭이다. 포일과 득일의 그 하나를 모르면 말이 많게 된다.

이것이 곧 언자부지인 셈이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간다는 것을 팽개치고 모르는 길이면서 아는 척하고 가면 헤매게 된다. 헤매다 보면 샛길을 찾게 된다. 여기서 별의 별 꾀가 빚어진다. 잔 꾀는 빛 좋은 말을

만들어 낸다.

구멍을 막아라. 꾀의 구멍을 막아라. 거짓부렁의 구멍을 막아라 욕망과 탐욕과 허세. 허영의 구멍을

막아라. 이러한 구멍을 막게 되면 저절로 입은 닫혀질 것이 아닌가!

문을 닫아라. 꾀의 문을 닫아라. 거짓부렁의 문을 닫아라. 욕망과 탐욕의 허세, 허영의 문을 닫아라.

이러한 문을 닫게 되면 저절로 입은 닫혀지게 될 것이다.

 

예리한 것을 무디게 하라. 날카로운 송곳은 바위를 뚫지 못하지만 부드러운 물은 바위 속을 적신다.

예리하고 냉철한 지성은 명지의 어긋남을 범하기 쉽다. 공자의 수신이나 노자의 수지를 외면하고

바깥것만 알려고 하는 지성은 무섭다.

앎에도 두갈래가 있다. 내 자신을 아는 것이 명이요. 내 바깥을 아는 것이 지라고 노자는 밝혔다.

공자의 수신은 내 자신부터 알고 닦는 것이며 노자의 수지는 내 자신으로 하여금 덕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이 없고 지만 예리 하게 돋보이려는 지성은 무섭다.

분란을 풀어라. 헝클어진 실타래에서 실을 풀어내기는 어려운 것처럼 백인 백색의 이견을 드러내면

합의점을 찾을 수가 없다. 이론의 무장을 단단히 하고 투쟁에 나서는 것을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첨병

이라고 한다.  이 러한 첨병들 탓으로 세상은 전쟁을 치르고 인간의 생명은 헐값으로 죽어가야 했던

냉전의 시대를 생각해 보라. 흥정은 붙이되 싸움은 말린다는 마음이 곧 덕을 베푸는 심정이 아닌가.

빛나는 것을 흐리게 하라.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고 빛 좋은 개살구 에는 속살이 없다. 겉치장을

할 수록 속은 더럽고 주름살을 감추려고 화장한 얼굴은 추한 법이다. 남보다 잘낫다고 나설 것도 없으

며 남보다 뛰어 나다고 섬광처럼 번득일 필요가 없다. 모난 돌은 정을 ?는 법이며 잘난 척하는 사람은

만 사람의 눈총을 받는다.

먼지를 묻혀 같게 하라. 몫을 덜어내고 더하려는 짓에서 욕심이란 티끌이 일어난다.  그러한 티끌을 말

끔하게  없애는 것을 무소유라고 한다. 빗자루가 있으면 쓰레받기가 있게 마련이다. 비질만 하면 먼지

가 다시 날리게 된다. 쓰레받기로 끌어모아 버려야 한다. 마음속에 티끌처럼 치렁치렁 붙어 있는 욕심

을 쓸어서 쓰레 받기에 담아 버려라. 욕심을 부리면 나를 취하는 것이고 욕심을 떠나면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닌가 ! 욕심을 버려라.

왜 노자는 제 52장에서 한 말을 다시 제 56장에서 되풀이 했을까? 현동을 말하려고 그렇게 한 셈이다.

현동이란 무엇을 까? 부덕을 덕으로 옮겨주고 패거리를 어울림으로 옮겨 놓는 하나의 묶음이 아닐까

싶다. 현동은 포일이며 득일이라고 보아도 된다. 사람의 목숨이나 지렁이의 목숨은 다 같다고 생각하면

그러한 생각이 곧 현동이다.

어울리자면 패를 짓지마라. 이렇게 공자가 말했다. 그러나 노자는 패거리마저도 어울림이 되어야 도덕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씀이 곧 현동이다.

우주 만물이 서로 어울려 하나 같은 운명을 누리자면 어떻게 하면 될까. 이를 위하여 노자는 현동을

다음과 같이 풀어주고 있다.

무엇을 얻었다고 친하게 할 것도 아니고 , 무엇을 얻었다고 소흘하게 할 것도 아니다. 무엇을 얻었다고

이롭게 할 것도 아니며, 무엇을 얻었다고 해롭게 할것도 아니다. 무엇을 얻었다고 귀하게 할 것도 아니

며, 무엇을 얻었다고 천하게 할 것도 아니다.

친소를 따져 분별하고  차별하지 마라. 보태서 대접할 것도 아니고 덜어서 대접할 것도 아니다. 친하다

고 후하게 하고 소흘하다고 박하게 하지 마라. 한결같이 대하라. 그러면 우군이 따로 없고 적군이 따로

없다.  우주만물이 다 벗인 것이다. 봄볕에 며느리를 내놓고 가을 볕에 딸을 내놓는 시어미의 심술을

부리지 마라. 이것이 불가득이친이요, 불가득이소이다. 이렇게 한다면 현동의 이웃은 된다.

이해를 따져 분별하고 차별하지 마라. 달다고 삼킬것도 아니며 쓰다고 뱉을 것도 아니다. 이익이 낫다

고 기뻐하지 말것이며 손해를 보았다고 슬퍼하지 말 것이다. 한 번 이로우면 한 번 해로운 것이 이해의

상관이다. 그러므로 이해를 따지면 항상 틈이 생긴다. 천지를 시장으로 보지 말고 만물을 상품으로

보지마라. 이것이 불가득이리요, 불가득이해이다. 이렇게 한다면 현동의 이웃은 된다.

귀천을 따져 분별하고 차별하지 마라. 양반은 귀하고 상것은 천하다는 것보다 망할 짓은 없다. 귀하다

고 높이 받들고 천하다고 멸시하는 것은 원한의 앙금을 짓는다. 금이 귀하고 흙이 천하다고 하지마라.

흙이 없다면 만물은 어디에도 있을 곳이 없다. 따지고 보면 귀한 것이 따로 있고 천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개똥 옆에 핀 민들레꽃은 천하고 궁궐의 뜨락에 핀 모란은 귀하다고 할 것은 없다. 이것이

불가득이귀요, 불가득이천이다. 이렇게 한다면 현동의 이웃은 된다.

현동이란 무엇인가 천지는 도가 마련한 둥지이고 만물은 그 둥지에 있는 새끼나 같다. 한배의 새끼들은

모두가 형제가 아닌가. 현동은 어머니의 품안과 같고 어머니의 손길과 같다. 그래서 노자는 도를 어머

니 라고 비유했고 어머니의 품안을 덕의 손길이라고 했다.

인간은 왜 시비를 하고 다투다 싸움을 거는가. 친소를 따져 패를 가르고 이해를 따져 속셈을 하며,  귀

천을 따져 허세를 부리는 까닭이다. 현동은 친소의 분별을 떠난다. 그래서 벗과 적이 따로 없다. 만물의

관계는 다 같고 하나이다. 현동은 이해의 분별을 떠난다. 그래서 손익의 계산서를 만들지 않는다.

만물의 값은 다 같고 하나이다.

현동은 귀천의 분별을 떠난다.  그래서 손익의 계산서를 만들지 않는다. 만물의 값은 다 같고 하나이다.

현동의 귀천의 분별을 떠난다. 그래서 양반도 없고 상것도 없다. 그래서 만물의 존재는 다 같고 하나이다.현동은 포일이며 득일이다. 도가 하나를 낳는다고 노자는 밝혔다. 그 하나가 만물에 두루 통하는 기인 셈이다. 그 기를 받아 모든 것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의 자궁에서 나온 새끼들인 셈이다.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패를 갈라 시비를 걸고 차별을 하며 다투고 싸울 것은 없다.

노자가 말하는 지자는 이러한 이치를 아는 자이다. 포일의 현동을 앎으로 더 말 할 것이 없다. 이것을

노자는 지자불언 이라고 단언한 셈이다.

<원문의역>

아는 자는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자는 모른다.

앎의 구멍을 막고 그문을 닫아라. 앎의 예리함을 무디게 하고 그 분란을 풀어라. 앎의 빛남을 흐리게 하

며, 먼지를 묻혀 같게 하라. 이를 일러 알 수 없지만 신비로운 같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무엇을 얻었다고 친하게 할 것도 아니고 ,무엇을 얻었다고 소흘하게 할 것도 아니다. 무엇을

얻엇다고 이롭게 할 것도 아니며 무엇을 얻었다고 해롭게 할 것도 아니다. 무엇을 얻었다고 귀하게 할 것도 아니며, 무엇을 얻었다고 천하게 할 것도 아니다. 그래서 천하는 귀히게 된다.

<도움말>

제 56장은 처세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살피게 한다. 현동이 왜 천하를 귀하게 하는가를 헤아리게 한다.

현실의 아픔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가를 알수 있게 하는 장이다. 생존의 고통을 극복하자면 도를 아는 것

에 있다.  노자의 말을 다시 듣게 된다. 이미 제 52장에서 밝혀진 바가 있다.

동기진은 제 52장의 도움말 참조.

현동의 현은 신비롭고 알 수 없는 것을 뜻하고 동은 한무리를 지어 패를 짓는 것을 뜻한다. 벗과 동료

의 차이점을 생각하면 된다. 동료는 이해상관으로 맺어지는 관계이며 벗은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다.

동료의 동을 벗으로 옮겨 놓으면 현동의 경지가 될 것이다.

 

제 57장 밥을 짓되 먼저 먹지 마라.

일내지 말고 정치를 하라.

하늘을 믿지 궁궐은 믿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백성들은 왜 이렇게 말했을 까? 궁궐의 벼슬아치들은 해주는 밥을 먹을 줄만 알았지 밥을 지어 먹을 줄은 몰랐던 까닭이다.

정부의 말을 듣다가는 망한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왜 이렇게 말하는가. 정부의 관료들이 입으로만

국민의 머슴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들 편의대로 국민을 부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정치는 한 가정의 부엌살이와 같으면 족하다. 권부를 하나의 식당처럼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대통령은 주방장인 셈이고 고급 관료들은 요리사들이며 일반관리들은 상차림을 하는 종업원이고 국민

은 그 식당의 단골손님으로 생각하면서 정치를 한다면 족할 것이다.

주방장은 단골들의 구미에 맞는 식단을 마련하려고 정성을 쏟고 요리사들은 제대로 요리를 하려고 열

중하며, 종업원들은 친절하게 상을 차려 손님을 접대한다면 그런 식당은 망하는 법도 없고 적자를 보

는 경우도 없다. 나의 나라도 이와 같다.

국민의 나라에 내는 세금은 식당에서 내는 밥값이나 같다. 나라의 정치는 국민이 먹을 밥을 잘 짓고 잘 나누어 골고루 먹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 나라가 국민을 위해 짓는 밥을 정치라고 한다. 보리밥값 만큼

의 세금을 거두엇으면 보리밥을 지어주고 쌀밥값만큼 세금을 거두었으면 쌀밥을 을 지어준다면 국민

은 투덜대지 않는다. 배고프면 다 같이 배고프고 배부르면 다같이 배부른 것을 국민은 좋아하고 바란다.

진실한 동고동락을 국민은 마다하지 않는다.

밥을 지을 예산 중에서 주방의 사람들이 각각 제몫으로 잘라 챙겨두고 보리죽이나 쌀죽을 끓여주면 어느 국민이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 것인가! 정부라는 식당을 향해 철따라 시위와 구호가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은 주방에서 먼저 먹어치우는 일들이 빈번한 까닭이 아닌가.

내 배만 부를 터이니 너는 굶으라고 한다면 어느 백성이 핏대를 내지 않을 것인가. 국민의 혈압을 올리

게 하는 것을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한다. 국민의 고혈압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정치가 특권층의눈치를 보며 요리할 때 발병한다.

국민을 부려먹고 호령하면서 군림하는 정치를 정치라고 한다.  정치가 정복자의 손아귀에 들린 것처럼 될 때 치자는 지배자인 것처럼 군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권력은 전리품쯤으로 여겨지고 국민이 내는

세금은 노획물처럼 보이게 된다. 본래 전리품이란 전공에 따라 나누어 먹게 되지만 노획물은 임자가 따

로 없고 먼저 본 놈이 감추고 숨기면 제것이 된다. 정치의 부정부패는 이렇게 해서 생긴다. 이러한 지경

으로 몰린 정치를 장자는 썩은 양고기 덩어리 같다고 했다. 고깃덩이가 썩게 되면 갖은 벌레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썩은 정치에 붙어먹는 벌레들을 탐관오리라고 한다. 고깃덩이가 싱싱하면 벌레들이 먹을 수가 없다. 싱싱한 고깃더이를 썩게 해야 하는 것이 부패한 관리들이 하는 짓거리들이 아닌가!

착취와 강탈, 음모와 흉계, 모략과 음해, 협잡과 협박 등이 썩게 하는 균들이다. 정치의 주방에 이러한 균들이 창궐할 때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신음한다. 노자는 군림하려고 수작을 부리고 노략질하는 정치를 하지마라고 한다.

말하자면 정치를 제발 하지 마라고 한다.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하는 세상을 서로 등지게 한다면 그러한

정치는 없는 것만 못한 법이다. 그래서 노자는 征이 아니라 正으로 나라를 다스리라고 한다. 노자의 다음같은 말을 들으면 이 땅의 치자들은 쥐구멍을 찾을 것이다.

바르게 나라를 다스려라. 계략으로 병사를 써라. 그리고 일을 내지 말고 천하를 취하라.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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