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노자/인간은 버려진 신발짝과 같다/윤재근

다림영 2008. 7. 1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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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정신의 뼈대는 무엇인가.

불가의 선맥은 영가 스님의 중도가를 깨우침의 으뜸가는 길잡이로 친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배움이 끊어져 하릴없이

한가로운 도인을 이렇게 중도가는 시작되고 있다. 노자가 영가의 증도가를 들었다면 그 도인이 누구냐고 물었을 성 싶다.

성인은 누구나 도인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성인도 도인이고 불가에서 말하는 성인도 도인이며 도가에서 말하는 성인도

도인이다. 유가에서는 인의의 길을 트는 사람을 성인이라하고 , 불가에서는 법신의 길을 트는 사람을 성인이라 하며, 도가

에서는 도덕의 길을 트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한다.

인의 의 길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길이다.

법신의 길은 망상을 없애 버리라는 길이다.

도덕의 길은 만물을 사랑하라는 길이다.

이처럼 동양의 성현들은 세 갈래의 길을 터주고 있는 셈이다. 이 세갈래 길중에서 가장 걸림이 없는 길은 어느 길일까?

불가의 길은 마음밖의 모든 것은 허깨비나 같다고 본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마음 씀씀이를 잊어버리는 것이 부처의 도일 뿐

분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마구니의 짓이라고 단언한다. 마음 씀씀이가 없는 경지를 천진자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자성을

텅 빈 것으로 비유한다

불가의 자성은 노자가 비유한 갓난아이를 생각하게 하고 조금의 꾸밈도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불가의 선맥에서 말하는

것을 듣다보면 도가의 생각을 듣고 있는 것처럼 들리게 된다.

'텅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므로 허공에는 본래 크다는 것도 없고 작다는 것도 없으며, 허물도 없고 조작도 없으며,

유혹에 걸려든 것도 없고 깨우친 것도 없다.

불가의 전심법요에서는 마음 그 자체를 위와 같이 말하고 있다. 마음은 허공과 같다고 한다. 마음을 왜 그렇게 말하는가?

마음 그 자체를 알게되면 나도 없고 남도 없게 된다고 밝힌다. 이것이 불이다고 할 때 그 불은 허공과 같은 마음 그 자체를

말하는 셈이다.

 

불가의 불은 도가의 도를 연상하게 한다. 물론 같지는 않다. 불은 생사를 떠난다지만 도는 생사를 관장하는 까닭이다. 불가

에서는 삶의 인연을 끊어버리리라고 하지만 도가에서는 그것을 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소중히 하라고 한다. 이처럼 다르다.

그러나 그 불에 이르는 길을 밟는 걸음걸이를 보면 도가의 걸음걸이와 닮아 있다.

 

선정이란 무엇인가 바깥 것을 떠나는 것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는 것이 정이다. 불가의 이러한 선정은 도가의 무기의

걸음걸이를 닮았다.  이처럼 불가나 도가는 모두 인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유가와 다른다. 말하자면 불가와 도가는

인간의 욕심이나 욕망을 없애라고 하지만 유가는 절제하라고 한다.

불가는 인간과 만물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므로 우주의 삼라만상은 허깨비와 같다. 여기서는 존재의 생사도 없고 인간

의 문화도 없다. 도가는 만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 같은 것으로 긍정하므로 우주의 삼라만상은 서로 더불어 함께 존재해야한다.

여기서는 존재의 생사만이 긍정되고 인간의 문화는 무시해 버린다.

유가는 만물과 인간의 관계를 인간을 중심에 두고 있으므로 인간의 인간 답게 되어야 한다. 인간은 선택된 존재로 인정되고 세상

을 다스릴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한다. 인간의 능력을 문화라고 하고 문화를 긍정한다.

이처럼 불가에서는 생존의 의미를 부정하고 . 도가에서는 생존을 그대로 두라고 하며, 유가에서는 인생의 의미를 긍정한다.

불가의 부정과 유가의 긍정을 도가는 치우침이 있다고 본다. 부정하는 것도 하나의 시비요, 긍정하는 것도 하나의 시비인 까닭

이다.  시비가 없는 경지가 곧 자연이다.

유가와 불가 그리고 도가는 동양정신의 삼대 줄기라고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신라의 최치원도 풍류에 이미 유불선이 잇었다고

했으니 동양의 사고는 어디나 삼가적이었던 셈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도와 불이 만나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까? 아마도 마음 속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이어질 것이다.

유도 없고 무도 없다고 말할 것이 어찌 있을 것인가? 태어남이 있고 사라짐이 있다는 것을 어이하란 말인가! 불이여! 생사를

고라고 말할 것은 없다네. 인간이 고를 짓고 만들 뿐 천지에 고락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세.  생사의 인연을 떠나라고 할 것도

없다네. 생사를 사랑하면 그만일세. 그리고 구하는 것이 있으면 고통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게. 인간이 물질을 구하면

고통스럽지만 자연을 구하면 낙이 된다네.

이렇게 도는 불에게 말할 게다.

불가의 도인도 배움을 끊고 수작을 부리지 않아 한가롭고 도가의 도인도 그러하다. 그러나 불가의 도인은천하의 것에서 벗어

나라 하지만 , 도가의 도인은 천하의 모든것을 하나로 끌어안으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가의 절학과 무위는 해탈하라는 말이지만 도가의 절학과 무위는 포일하라는 말이다. 불은 증오와 사랑을 동시에

다 떠나라고 하지만 도는 증오는 없고 사랑만 있다고 한다. 그래서 노자는 도를 우주의 자궁이르모 만물의 어미니라 했고

그 현빈의 손길을 덕이라 햇다.

도가의 덕이 유가의 인을 만나면 우리의 마음 속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갈까? 아마도 다음 처럼 될 것이다.

인이여! 남을 먼저 사랑하라고 하는데 그 남이 어디 인간만이어서 될 것인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안되네.

만물이 서로 더불어 어울려 생사를 누려야 하네. 인간만 소중하고 인간 아닌것은 모두 인간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나?  소유하려고 하므로 욕심이 생기고 물욕을 낳는 것이 아닌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단언하지 말게.

학문으 학문을 만들어 내고 학문의 문화는 학문이 만들어 내는 문명에 끌려가게 마련일세. 인이여! 문명은 지금 물욕의 난장을

이루고 있다네. 물욕의 난자에서는 나만 있고 남은 없어진다네. 이것이 바로 자기 중심의 병이란 말일세

이렇게 덕은 인에게 말할 게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를 맞지 못하고 산다.현대인은 산성비를 맞으며 산다.

이제는 땅에서 솟는 물을 그냥 그대로 마실 수가 없다. 수돗물을 돈을 주고 사서 마셔야 한다. 점점 수돗물마저 의심하고 더

많은 돈을 내고 수백길 땅속에 묻혀 있는 지하수를 억지로 퍼올려 마셔야 되는 지경에서 허덕이는 중이다.

왜 이제 인간은 흐르는 물을 그냥 그대로 마실 수 없는가?

땅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물질로 된 까닭이다. 인간이요 즐겁게 누리고 더불어 살려고 한다면 소유하지 마라. 이것이 동양정

신의 요체이다. 그래서 천하를 물질의 창고로 보지 말 것이요. 자원의 보고라고 여기지 말것이며. 자본의 금고로 생각하지 마

락 했다.

우리를 썩게 하는 것을 무어라 할까. 물질은 자원이 되고 자원은 자본이 된다는 물욕의 푸닥거리가 아닌가! 동양정신은 처음

부터 이러한 푸닥거리를 무서워했다.  도가의 도덕이 그랬고 불가의 법신이 그랬으며 유가의 인의가 그랬다.

그러나 동양정신은 이미 낡은 것처럼 되어 버렸고, 서양정신만이 우리를 틀어잡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어느날엔가는, 동양

정신은 싱싱한 샘물을 그냥 마시게 하고 서양정신은 가공한 수돗물을 돈을 내고 마시게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될 것이요,

뉘우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정신은 물욕의 노예해방을 시켜 주지 못할 것이지만 동양정신은 물욕의 노예를 가두어 둔 수용소의 철책을 허물

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헛소리로 들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천지를 버리고 어느 목숨이 산단 말인가 이렇게 반문해 보라.

천지는 훔쳐먹을 곳간이 아니다 만물이 살아야 하는 둥지가 아닌가! 천지는 자원의 보고가 아니다. 온갖 것들이 제목숨을 누리는

보금자리가 아닌가 생존의 보금자리를 자연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노자는 눈물 겹도록 말해준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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