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노자..이어서

다림영 2008. 7. 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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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살며 더불어 살고 어울려 산다.

 

살아 있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내 몸과 마음이 없다면 난 살아 있을 수가 없다.내 몸과 마음은

천지가 없다면 있을 수가 없다.그러므로 나는 천지와 관계를 맺어야 산다.  천지는 만물이 있는 곳이다.

그 만물을 동양은 오행으로 나누어 생각했다.  모든 목숨은 오행과 관계를 맺고 산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목숨의 귀천을 따져

분별하지 마라는 노장의 생각은 옳다. 인간이나 지렁이는 다같이 오행과 관계를 맺고 산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목숨이나

지렁이의  목숨에는 다를 바가 없다.

유가는 오행을 오류에 맞추어 살자고 하지만 도가는 오행 그대로 살자고 한다. 오행은 만물의 추상이고 오류는 질서의 추상이다.

말하자면 도가는 땅이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유가는 땅을 임금으로 삼자고 한다. 왜냐하면 노장은 인간 역시 길가에 버려진

풀강아지 에 불과하다고 보는 까닭이고 공맹은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고 보는 까닭이다. 그래서 공자는 호학이라 했고 노자는 절학

하라 했다.

호학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절학이란 무엇인가 자연이 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나 공자가 향하는 목적지는 다를 바가 없다. 그 목적지는 어디인가. 목숨을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곳이다. 이러한 곳을

태평성대라고 했다.

노공은 단지 그곳을 찾아가는 길이 서로 다를 뿐이다. 공자는 인의 길을 걷자 하며 인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밝힌다.

노자는 덕의 길을 걸어가 우주 만물의 어머니를 찾아가자고 한다. 그리고 장자는 노자와 같은 길을 가면서 좀 쉬자고 한다음,

그렇게 쉴 수 있는 곳이 곧 어머니의 품안이라고 타일러 준다.

 

나비가 내가되고 내가 나비되고 이렇게 쉬면 곧장 어머니의 품속에서 단 꿈을 누린다고 장자는 말해준다. 나는 곧 나비요 나비가 곧

나라면 나비는 나비고 나는 나라고 갈라 놓을 것이 무어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없다고 하는 것이 장자의 말이다.

장자의 무기는 홀로 사는 순간을 맞아 보라는 말이나 같다. 나를 지키는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없애는 것을 누리기 위하여 홀

로 사는 순간을 만나라고 한 셈이다. 온 천지가 모두 나라면 나를 다로 떼어 놓고 생각할 것도 없다. 그렇게 되면 욕심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시비를 걸일이 무어 있을 것인가 이처럼 내가 무한히 확대되는 순간은 분명 나를 편케하고 밝게 하며 확 트이게 한다.

이를 장자가 밝히는 대의의 경지라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는가.

공자의 극기는 더불어 사는 것을 지키라고 한다. 나를 앞세우지 말고 남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라. 이것이 공자의 이순이 아닌

가. 공자도 70이 되어서야 이순을 알게 되었다고 했으니 극기는 참으로 어려운 경지인 셈이다. 극기의 요체는 바로 이순에 있다.

왜냐하면 공자의 극기는 곧 극기 복례이기 때문이다.

나를 이겨서 예로 돌아가라. 이는 사회생활을 인간답게 하라는 말씀이다.  공자는 왜 이렇게 외쳤을 까. 거짓말과 폭력이 횡행했고

신하가 제 임금을 죽이는 일이 있었고 자식이 제 애비를 죽이는 일이 있었다. 이렇게 맹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를 개탄했다.

거짓과 폭력이 난무한 것은 모두 자기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수작들이다. 나를ㅇ ㅟ해서라면 낳아준 부모까지 죽이는 세상을

향해 공자는 극기하라고 햇다. 나 혼자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더불어 살 줄을 몰랐다.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꼴이 되어 세상은 썩고 병들고 신음할 때 남을 사랑하기를

실천하게 하려고 맹자는 의를 주창했다. 의란 무엇인가. 남의 것을 빼앗지 마라함이다.

 

공자는 더불어 살것을 인의라 보고 인을 앞세웠지만 맹자는 의를 앞세웠다. 공자의 시대는 가의 시대였지만 맹자의 시대는 이미

국의 시대로 변햇던 까닭에 맹자는 의를 앞세웠다.

집안은 핏줄로 더불어 사는 길을 열고, 나라는 권력으로 더불어 사는 길을 구축한다. 권력앞에 인간은 무엇보다 정직해야 한다.

그래서 이미 공자는 인간을 직이라고 햇으니 맹자는 이러한 곧음을 실천하기 위하여 의를 부르었던 셈이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영역은 점점 넓어갔지만 인간은 여전히 서로 정복하고 이익을 나누는 짓을 버리지 못한다. 현대인의 정복

의 야망과 이익의 야욕은 하늘을 찌를 지경인데 더불어 사는 영역은 이제 나라에서 세계로 드넓어�다.그래서 더불어 살기가

더 어려워지고 무섭게 되어가는 중이다. 그러나 인간들이여. 더불어 살라. 이러한 공맹의 외침은 변함없는 진실이다.

더불어 살자면 먼저 나를 닦고 남을 다스려라. 이것이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요체이다.

그러한 요체를 풀이해 주는 것이 내성외왕이 아닌가. 하늘을 본받는 것이 성잉. 마음을 트고 오고가는 것이 왕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늘을 무서워 할 줄 알고 남의 마음을 살펴 헤아려야 비로소 인간은 서로 더불어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맹의 말이 낡았단 말인가. 우리 모두는 다시 새겨들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자를 만나면 공맹의 말이 좁게 들린다. 노자는 사람이 천지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데서부터 온갖 탈이 생긴다고 보았다.

인간은 서로 더불어 산다고 만족되지 않는다. 인간은 천지와 어울려 살아야 한다. 인간은 서로 더불어 산다고 만족되지

않는다. 인간의 목숨은 귀하고 풀잎의 목숨은 천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사랑하려면 풀잎을 사랑할 줄 알라. 인간은 만물과 어울

려 살라. 그래서 노자는 자기라는 것을 먼저 버리라고 한다.

 

생명이 이루어지는 못�르 보라. 사람은 남녀가 짝을 지어 자녀를 낳는다. 돼지는 암수가 짝을 지어 새끼를 낳는다. 나팔꽃도 암수의

꽃가루가 섞여 나팔꽃 씨앗을 낳는다. 낳는것은 다 같다. 목숨을 낳게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 그래서 노자는 도를 만물의 어머니

라고 했다.

생명이 ㅅ라지는 못�르 보라. 목숨이 잇는 것이라면 죽지 않는 것은 없다. 늙지않고 죽지 않으려고 불사약을 찾는 것보다 어리석

음은 없다.  사람도 태어났으니 죽고 풀잎도 태어났으니 죽고 피래미도 태어났으니 죽는다. 목숨을 거두어 들이는 것을 또한 도라고

한다. 만물의 어머니는 텅 빈 골짜기라고 했다.

 

어머니의 품안은 아늑하다. 따뜻한 손길이 있고 감미로운 젖이 있다. 어머니의 품안이 곡신이요. 그 곡신을 따뜻하게 하고

감미롭게 하는 손길과 젖줄이 곧 상덕이 아닌가. 땅에서 얻는 곡식, 마시는 물, 숨쉬게 하는 바람, 이 모든 것들이 덕 아닌것이란

없다.

 

그러나 왜 오직 인간만이 천지를 탕진하고 약탈하며 사는가. 노자는 이를 제일 가슴 아파 했다.  전쟁을 하면서 모든 것을 노략질 해

자기의 배를 불리려고 하는 짓은 어머니의 가슴에 칼을 꽂는 짓이나 다를 바 없고 젖줄을 끊칼질에 불과 할 뿐이라고 노자는 설파한다.

그래서 노자는 절성기지하라고 했고 천지불인이라고 했다.

 

치자여 성인인 체하지 마라. 이것이 노자의 절성이다. 식자여 바깥 지식을 뽐내지 마라. 이것이 노자의 기지이다. 그리고 인간이여

천지를 소유하려고 덤비지 마라 천지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이것이 노자의 불인이다.

왜 노자는 이렇게 절규했는가? 만물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함께 다같이 오손도손 사는 것을 합생이라고 한다. 이러한

합생을 화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한사코 불화를 일삼는다. 합생을 파괴하고 불화를 일삼는 나를 버리고 내가 나를 만나는 홀로

의 순간을 맞이하라고 장자는 무기를 설파했다.  그러므로 장자의 홀로 사는 삶의 만남은 결국 노자의 어울려 사는 삶으로 돌아

가려는 게다. 만물과 어울려 산다면 공자의 더불어 살라 함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 아닌가!

 

제 55장 덕은 그윽하게 품되 드러내지 마라

도타운 덕은 갓난아이 같다.

표범은 빛나는 털 무늬 때문에 표적이 되고, 원숭이는 나무 타는 재주 탓으로 동물원으로 잡혀 오고, 독사는 독이빨 때문에

삶의 눈에 보이는 족족 죽음을 당한다. 표범의 털 무늬나 원숭이의 재주나 독사의 독 이빨은 제 목숨들을 위해서는 다 부덕한

것들이아. 빛 좋은 개살구란 속담은 실곳이 없다는 말로 통하지만 실은 부덕함을 말해준다.

모란을 보라. 향기는 없지만 그 우람한 꽃 봉오리와 빛깔 때문에 산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뜨락에서

눈요기감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향기가 짙은 풀꽃들은 잎새 밑에 숨어서 핀다.  산천의 풀꽃들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므로 피고

싶은 곳에서 필 만큼 피고 거침없이 향기를 품고 꿀을 간직해 벌이나 나비를 불러 씨앗을 맺는다. 이처럼 드러내고 자랑하면 할

수록 덕은 줄어 들어 목숨에게 부덕이 된다.

성경에도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잇다. 덕을 쌓는 일은 이와 같다. 공치사를 않는 것이 곧 덕이라고

장자가 밝힌 것은 덕은 드러내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누구나 현대를 자기선전의 시대라고 서슴없이 밝힌다. 남들이 알아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자기를 먼저 알려라. 이것이 현대인

의 처세술이라고 자랑하낟. 염치 없는 것이 이제는 선이고 염치를 차리는 것은 악이 되어 있는 셈이다.

자기를 돋보이게 마음을 꾸미고 몸을 꾸며라. 무대에 선 배우처럼 분장하고 때와 곳에 따라 맞게끔 자기를 연출하라.

인생은 한판의 연극이며 그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라. 조연이 된다거나 엑스트라가 되면 주변 인물이 될 뿐 중심인물은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기를 최대한으로 과시하고 선전하라. 이것이 현대인의 처세심리가 아닌가

양보하지 마라. 쟁취하라. 하나만 안다고 하지 마라. 열을 알고 백을 알며,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라. 이것이 현대인의

의지요. 행동이다.

상대편은 항상 경쟁의 대상이다. 수비는 열등의식을 낳고 공격은 자신감을 준다. 수비는 오직 공격을 위한 수단이다.

경쟁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로 끝나야 우렁차고 찬란하다. 이러한 속셈을 숨겨두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현대인의 자기

중심이 아닌가.

그러나 덫에 걸려든 산 짐승은 앞으로 나아갈 줄 만 알고 뒤로 물러날 줄은 몰라 제명대로 못살고 죽는 다. 나아가는 것은 물

러 서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현대인은 모른다.

칼집에 들어 있는 칼이 뽑힌 칼보다 더 잘들고 둥근돌은 어디든 넘어지지 않고 서 있다.  모나게 과시하지 말거이요 방자하게

자랑할 것도 없다.백만대군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가는 항우보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안겨있는 갓난아이가 더 강한 존재임을 안

다면 덕을 품고 있다는 속뜻을 새겨들을 수 있는 일이다.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호들갑을 떠는 짓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노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으면 알 것이다.

품은 덕의 두터움은 갓난아이와 같다. 독이 있는 벌레도 갓난아이를 쏘지 않으며, 사나운 짐승도 갓난 아이를 할퀴지 않고

매서운 새도 갓난 아이를 채가지 ㅇ낳는다. 쥐는 뼈대는 약하고 근육은 부드럽지만 힘은 굳세다. 남녀의 성교를 모르지만

갓난아이의 고추가 서는 것은 조화의 힘이 지극한 것이며 온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ㅇ낳는 것은 조화의 어울림이 지극한 것

이다.

 

젊은 풀꾼들이 한 노인과 함께 보리 밑거름을 장만하려고 늦여름 산을 올랐다. 젊은 풀꾼들은 모두 풀을 먹여 빳빳해진 삼베수건

을 차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지게에 낫 두자루만 얹고 산에 올랐다.

삼베 수건은 땀을 닦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독사를 잡는 보신용으로 삼배수건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풀꾼들은 독사를

한마리 잡는 것이 열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나 같다고 여겼다.

풀무더기 밑에는 더위를 피해 사리고 있는 독사들이 많은데 왜 노인장은 삼베수건이 없느냐고 젊은 풀꾼이 물었다.

노인은 웃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젊은 풀꾼은 독사가 무섭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햇다.

"먼저 풀을 벨 자리를 잡게, 그리고 여기저기로 쏘다니며 풀을 베지 말고 밑에서부터 한짐이 될 대까지 쉬엄쉬엄 베어 올라

가게. 그러면 풀섶에 숨어 있던 독사가 먼저 자네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갈 것이네."

그러나 젊은 풀꾼들은 짧은 시간안에 풀짐을 채우려고 여기저기 풀섶이 무성한 곳만 골라 바쁘게 돌아다니며 풀을 베었다.

풀섶에 숨어 있는 독사는 필하지 않으면 낫에 베기 때문에 풀꾼의 손목을 물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풀꾼들은 독

사를 만나면 하던일을 제쳐두고 독을 품고 있는 독사를 향해 빳빳한 삼베수건으로 독사의 주둥이를 툭툭 친다. 그러면

독사는 그 삼베 수건을 문다. 그 순간 수건을 채올리면 독사의 독이빨은 질긴 삼베 올에 걸려 빠져 버린다. 독이빨을 뽑힌

독사는 죽은 것 이나 같다. 풀쭌들이 마음놓고 독사를 후리쳐 죽인다음 나뭇가지에 걸어 두어 산 까마귀의 밥이 되게 하는 까닭

이다.

한젊은 풀꾼이 독사를 발견하고 고함을 질럿다. 풀꾼들은 그곳으로 몰려가 법석을떨었다. 그러나 노인은 잠자코 풀질을 계속

했다. 풀꾼들이 독사를 잡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놓고 와서 노인에게 조심하시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이렇게 타일렀다.

풀을 한곳에서 죽 베어 올라가면 독사가 먼저 피한다네.독사는 제 몸을 건드리지 않으면 무는 법이 없어. 살아남으려고 겁이 나서

무는 거야. 살려고 있는 것인데 찾아서 죽일 것은 뭐 있나. 땅벌도 제집을 건드리지 않으면 쏘지 않는 법이네. 화가 난 땅벌이

쏘다닐 때는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쏘지 ㅇ낳는다는 법이네.  화가 난 땅벌이 쏘다닐 때는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않은가. 독사도 그렇다네. 풀베는 일을 제쳐두고 독사 한마리 잡자고 풀짐을 망쳐서야 되겠나?

풀섶에 숨어있는 독사가 물려고 기다리지 도망가느냐고 한 젊은이가 핀잔을 늘어 놓았다.

그러자 노인은 다시 타일러 주었다.

풀을 베면서 간간이 침을 뱉게 친처럼 독한 독은 없다네. 독사도 도망가고 다른 벌레들도 도망간다네. 특히 독사에게는 더 독해 멀

리 도망가고 다른 벨레들도 도망간다네. 특히  독사에게는 더 독해 멀리 도망을 가지. 그러면 삼베 수건으로 독사를 찾아 죽일 것끼ㅏ지는 없지 않은가. 침을 간간이 뱉으며 풀을 베게. 독사에 물릴 걱정은 없다네.

 

살아 있는 것을 찾아서 죽일 것은 없다고 말하는 노인은 함덕지후가 어떤 것인가를 헤아리게 한다. 고아를 돌보는 고아원은 드물

고 고아를 파는 고아원은 많다는 말이 있다. 덕을 행하는 척하면서 덕을 팔아 실속을 차리는 인간들이 세상에는 많다. 덕을 파는

것을 악덕이라고 한다. 악덕이란 독사를 잡겠다고 차고 다니는 삼베수건이나 같다.

남을 불리하게 하면 그 남이 나를 불리하게 한다. 독사가 물려고 하는 것이나 같다. 서로 부덕하면 악덕의 앙갚음이 그치지 않는다.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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