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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이타적인 사물, 보자기

다림영 2024. 3. 17.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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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보자기엔 비밀이 숨어 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당장엔 알수 없다. 무명의 평범한 보자기건, 색색의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건, 공장에서 획일적으로 찍어낸 값싼 보자기건 상관없다. 모든 보자기는 알맹이를 숨기고 , 감싸며, 비밀을 발설하지 않을 임무를 가지고 태어난다.

 

보자기로 싼 한 꾸러미의 세계가 눈앞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자. 알맹이를 '짐작'하며 , 천천히 보자기의 매듭을 끌러보기 전에는 보자기 안의 세계를 알 수 없다. 보자기는 알맹이가 입은 최후의 보루, 불투명하고 단정한 옷, 안의 세계와 바깥 세계를 만나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문'이다. 

 

펼치고,덮고, 싸매고, 숨기고, 담고, 나르고,보관하고, 기다리고, 전하는 일로 보자기는 생을 보낸다. 무용한 보자기는 없다. 보자기는 쉬고 있을 때조차 대기 상태다. 혼자서는 무엇을 주장하지도, 부피를 차지하지도, 형태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이토록 이타적인 사물이 있을까?

 

가방이 제 형태를 고집한 채 내용물을 담는다면, 보자기는 형태도 고집도 줏대도 욕심도 없이 내용을 담는다. 보자기는 입체이자 평면을 동시에 추구한다. 손끝으로 잡으면 아래로 흘러내리고, 펼쳐놓으면 수평의 공간이 생긴다. 접으면 접히고, 구기면 구겨진다. 날리면 날아가고, 움켜쥐면 잡힌다. 언제나 힘을 뺀 상태로 유연하다. 가볍고 견고하다. 보자기는 무게를 잡는 법을 모른다.

 

펼친보자기는 열린 세계같고, 돌돌 말린 보자기는 잠자는 것 같다. 서랍에 착착 접어놓은 보자기는 무릎을 꿇고 기다리는 사람, 침묵으로 가득찬 시간, 먼 곳으로 이동을 기다리는 날개, 여백으로 가득찬 방 같다. 

 

보자기는 번역이 불가능하다. 보자기는 헝겊조각이 아니고 단순한 천이아니며, 수건이 아니다. 그 모든 것과 다르다. '보補'는 '포대기'라는 뜻이다. 포대기는 입는 것, 싸는 것, 안는 것이다. 구겨지고 펼쳐지고, 사용하는 것이다. 보자기는 사람이 하는일을 전부 흉내낼 수 있다. 사람과 닮아있다. 주먹을 편 사람, 욕심이 없어 무거운 바위를 이기는 사람, 뽀족한 가위에 져주는 사람.

 

 

무엇보다 보자기는 변신의 천재다. 원래 지닌 형태(사각형의 펼쳐진보)는 내용물에 따라 모양과 형태가 변한다. 보자기는 이름이 없거나 이름이 많다. 갓난아기를 감쌀 때는 아기가 생에 처음 입는 옷이 되고, 아기를 업을 때는 엄마와 아기를 이어주는 끈이 된다. 

 

이바지 음식을 싸맬대는 그릇이 되며, 물건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는 가방이 된다. 귀중품을 담아 장롱 안에 넣어 둘 때는 보관함이 되고, 식탁위에서는 음식물을 위생적으로 보존하는 방패가 된다. 책을 넣어 이동할 때는 책보가 되고 잡동사니 위에 덮어놓으면 가림막이 된다. 

 

나는 집에서 정돈되지 않은 곳을 보자기로 덮어두는 버릇이 있다. 부엌서랍을 열면 먹다 남은 약, 영양제, 식음료로 만든 홍삼 스틱, 영수증, 선물 포장지에서 딸려온 리본, 줄자, 용도를 알 수 없는 플라스틱 케이스, 볼펜 따위가 마구잡이로 엉켜있다. 이 잡동사니 위로 보자기를 탁 덮어주면 '마법'처럼 이 모든 게 사라진다. 혼돈 위로 내려앉은 침묵 한 장!

 

이때 보자기는 '혼돈을 잠재우는 얇은 껍질'이 된다. 부족한 내 정리 정돈솜씨를 숨겨주는 커튼이고,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승화시키는 버튼이며, 세상을 향해 내보이고 싶은 얼굴이 된다. 명절 선물세트를 포장했던 괘 근사한 보자기도 좋고, 출판사에서 기념일을 맞이하여 제작한 작고 예쁜 보자기도 좋다. 수중에 보자기가 들어오면 차곡차곡 개켜 서랍에 넣어둔다.

 

어린 시절, 혼자 집을 봐야 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할일이 없어 동화책을 보다 까무룩 잠들면 세상은 보자기가 되었다. 나는 보자기에 싸여 버려지거나 혼곤한 잠의 섹메로 달아나는 상상을 했다. 삶의 본질이 홀로 겪는 고요와 고독 속에 있음을,

 

나는 그 시간을 통해 배웠던 걸까? 잠에서 개면 아무도 없다는 사실과 함께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색'이 있었다. 발치에 놓인 앉은뱅이 상 위로 알록달록하며 까슬까슬한 소재의 보자기 ('상보'라 불리는) 가 덮여있었다. 

 

나를 위한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 선명한 사각형의 세계, 보자기로 덮어놓은 세계이기에, 그것은 나를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열면 시시한 반찬과 밥이 놓여 있었을 것이다.신기하게도 기억나는 것은 상위의 음식이 아닌 보자기다. 보자기의 색과 형태만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떤 음식이었을까? 아마도 밥과 깊, 콩나물국 따위의 평범한 끼니였으리라. 그 음식을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 기뻤는지 슬펐는지 그때 감정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선잠에서 개자마자 보았던 보자기, 혼자 맞이한 방 안의 풍경 중 가장 따듯하고 궁금한 얼굴을 하고 있던 보자기의 모습만 기억한다. 

 

보자기는 귀하지 않은 것, 싸맬 필요가 없는것, 궁극적으로 '당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아닌 것은 감싸지 않는다. 보자기가 담겨 내게 오는 것, 그것은 모두 순하고 귀한 것이다! 작은 보자기로 감싼 도시락을 누군가 꺼낼 때, 그 안에 알맞은 크기의 김밥이 가지런히 담겨 있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을 먹어보라고 그이가 내게 권할 때! , 악의 없는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음식을 담은 보자기 안이리라! 

 

우주 역시 커다란 보자기다. 그 안에 별과 은하와 블랙홀이 들어 있다. 그 안에 밤이 있고 아침이 있다. 아픈 사람이 있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이 있다. 잠든 사람과 깨어 있는 사람이 있다. 나는 지금도 종종, 잠과 깸의 경계에 있을 때 밤의 보자기에 싸여 흔들흔들 이동하는 상상을 한다. 그럴 땐 내가 가장 귀한 알맹이인 듯, 세상이 나를 토닥이는 듯 안심이 된다. 

 

 

책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박연준산문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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