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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을 맺고 푸는 일 ㅣ이기주

다림영 2024. 3. 5.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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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타인과 인연을 맺고 푸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이야기의 총합이다. 인연이 이어지고 끊어질 때까지  기억속에 숱한 사연이 쌓인다. 

관계의 물결 속을 헤엄치며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다보면 깨닫게 된다. 나와 좋아하는 게 비슷한 사람과는 빨리 친해질 수 있지만 정작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싫어하는 게 비슷한 사람임을.

 

또한 친한 사이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불편하지 않은 관계가 아니라 때론 이야기를 전혀 나누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관계라는 것을. 

 

가끔은 그릇되게 말하는 사람에게서 배운다

"당신같은 사람을 세상이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구제불능, 민폐, 걸림돌이라고 하지, 그리고 난 이렇게 불러주고 싶어, 똥 덩어리!"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 강마에는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오켓트라 지회자다. 그는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깊은 산속 폭포아래에서 피나는 연습으로 득음의 경지에 오른 명창의 시원한 발성으로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너희는 내 악기야, 내가 시키는 대로 짖으란 말이야!"

"인간의 본성이 선과 불선不善으로 나뉘어 있지 않은 것은 마치 물이 동서로 나뉘어 있지않은 것과 같다" 면서 사람은 본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한 고자告子도 "아차, 강마에는 예외입니다"라고 말하며 두 손 두발 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들었다.

 

한때 내가 다니던 회사에도 강마에처럼 타인의 단점을 발견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간이 입으로 쏟아낼 수 잇는 추잡한 표현의 한계를 거뜬히 초월하는 그들의 저열한 화법을 면전에서 받아낼 때마다 나는 마음이 더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나는 직접 그런 일을 겪거나 목격함으로써 그들의 내면 세계를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아 이 사람은 작은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불안 요인이 생기면 그것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도망치기 바쁘구나. 남을 헐뜯고 공격하는 행위를 통해 불안함에서 벗어나려 하는구나, 어쩌면 이들은 사악한 사람이 아니라 나약한 사람인지도 몰라.'

 

물론 밥벌이를 하면서 싫어하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는 건 욕심인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우린 강마에 같은 사람과 부단히 부대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 그저 백해무익한 사람들일까?

글쎄다.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때로 그들은 내게 깊은 가르침을 주었다. 실로 그랬다. 

 

현명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릇된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이 내 스스이 되어 주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저 사람이야말로 어디가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이 시대의 참스승이야, 참스승!'

 

 

용기는 참기름 같은 것이 아닐까

존웰스 감독의 영화 [더세프]의까칠한 요리사 애덤존스는 여느 영화속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겉으론 강해보이지만 속으론 아물지 않은 상처를 꼭꼭 숨긴 채 살아가는 사람이다. 

과거에 저지른 과오로 괴로워하는 그는 "모든 요리는 완벽해야 해, 완벽하지 않은 요리는 버려!" 라고 외치며 식당을 차리고 재기를 노리지만, 독선적인 태도와 과격한 언행으로 동료와 사사건건 충돌한다. 일이 뜻대로 풀릴리가 없다. 

 

 

뭔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시름만 깊어가던 어느날, 로스 힐드라는 상담사가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두려워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세요.어쩌면 용기있는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

 

옳다. 어려움과 맞닥뜨릴 때 도망가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것만이 용기는 아니다.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때 타인에게 적절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용기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직면한 문제와 현실의 한계를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며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기란 무엇일까. 우린 왜 중요한 순간에 용기를 내지 못해 두려움 속을 정처없이 표류하는 걸까.용기의 사전적 의미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를 뜻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용기란 참기름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에 식욕을 돋우기 위해 참기름 몇방울을 떨어트리면 고소한 향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퍼져나가 밥그릇 전체를 휘감는다. 

 

용기야말로 그렇다. 커다란 일을 해결하는 데 꼭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두 방울의 용기만으로 마음을 진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 용기가 스며든 마음으로 두려움의 문턱을 넘어갈 수 있다면 ,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책 이기주 [마음의주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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