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좋은 글

햇빛에 대한 기억/손석희

다림영 2023. 5. 12.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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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켜온 가장 오랜 기억은 햇빛에 대한 것이다.

넓다란 신작로에 줄지어 선  포플러나무들, 그 나뭇잎들 사이로 부서지던 한낮의 햇빛, 끊어질 듯 말 듯 들려오던 골목길 안의 아이들소리... 그때 나는 세 살쯤이엇던가. 아스라하여 자꾸 도망가려는 그 기억의끝자락을 가까스로 붙들어 세상에 대한 첫 기억으로 남겨 놓았다. 

 

무엇이든 첫 기억으로 자리매김할 것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더구나 나의 첫 기억은 내 평화로운 시대의 한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무들과 바람, 아이들 소리, 신작로, 햇빛이 가져다준 밝은 세상, 아무도 세 살짜리 아이의 손을 잡아 끌어주지 않은 그 짧은 순간, 세상에 처음으로 홀로 마주 서 잇던 그 순간부터 햇빛에 대한 나만의 동경은 시작되었다.

 

일곱살 늦여름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전셋집을 구랗러 한나절씩이나 걸어다니셨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필동의 어느 골목집, 어머니는 집주인 아주머니와 부뚜막 위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얘기하고 계셨고 나는 부엌 뒤꼍 그늘진 곳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앉았다. 빨갛게 녹슨 양철 담장 너머 삐죽이 내밀어 오른 냏바라기, 검다시피 푸른 하늘에 판화처럼 선명히 찍힌 진노란색 해바라기 꽃잎위로 또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늘에 비켜서면 이번엔 내 미아위로 내려서는 햇빛, 내 두번째 햇빛에 대한 기억은 그런것이다.

그집에서 지낸 삼 년 반 동안, 나는 처음으로 그 집에 왔을 때 본 부엌 뒤안의 햇빛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똑같은 경우는 없으리란 믿음으로, 행여나 겪을지도 모를 실망을 피하기 위해 또다시 양철 담장 너머의 해바라기를 쳐다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열두 살의 초겨울이었으리라. 한옥집은 벌서부터 추웠다. 난로를 미처 들여놓지 않은 마룻바닥은 시리도록 찬 것이어서,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건넌방에서 다시 안방으로 우리 형제들은 발끝으로 동동거리며 다니곤 했다.

 

그 겨울의 어느 날 아침, 나는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햇빛에 대한 기억을 갖게 되엇다. 그날 햇빛은 낡아 바랜 창호지에 여과되어 우리들 건넌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온기를 위해 깔아놓은 자주색 이불 위로 감사듯 머물러 있던  그 햇빛의 단아함, 나는 한동안을 그앞에 서서 까닭을 알수 없는 우울함을 내 기억 속에 각인하고 있었다. 

 

햇빛과도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밝음으로, 또한 감내할 수 있는 우울함으로.... 그것이 나의 어릴 적 소망이엇다. 중간쯤에 와 되돌아본 나의 삶이 내가 소망했던 것과는 이만치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 해도 나는 내 바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제 겨우 세상에 눈을 뜬 내게 한 번쯤의 '관대함'은 가능하지 않을까. 삶이란 것이 늘 밝은 것독 ㅕㄴ뎌낼 만큼의 고통만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라면, 나는 내 절반의 삶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관대함'이 훗날에도 또 가능하리라 믿는 것은 아니다. 늦깎이 삶에 대한 치열함으로, 나는 어릴 적 햇빛에 대한 기억에서 얻은 소망을 지켜야만 할 것 같다.

 

책 [뭉클] 신경림 시인이 가려뽑은 인간적으로 좋은 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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