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좋은 글

사과이야기

다림영 2023. 5. 7.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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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사인회에 온 독자가 몇 년전에도 서점 행사에서 나를 만난 적 있다고 반가워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부탁이라며 여러권에 서명을 받아갔다. 그리고 일주일 후 도 다른 서점에서 열린 사인회에도 지인을 보내 몇 권을 더 구입했다. 알고 보니 지역 독서모임의 회원이었다. 

 

얼마후 뜻 밖에도 그녀가 사과를 한 상자 보내왓다. 아침마다 사과를 먹는 나로서는 고마움 선물이 아닐 수 없엇다. 사과의 명산지에서 보내온 것이어선지 먹을 때마다 아삭하는 소리가 싱그러웠다. 외국 영행지에서 먹는 푸석거리는 사과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다 먹어갈 때쯤 또 한 상자가 배달되었다 .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감사를 표시하고, 더 보내주지 않아도 된다고 사양했다. 그녀는 사과 농사짓는 농부와 잘 아는 사이이니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잠시 실랑이가 이어졌다. 나는 사과 맛을 인정하며 내가 직접 그 농부에게 주문해 먹겠다고 했고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에게 사과 정도는 보내 줄 수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매달 사과가 도착했다. 아삭하고 깨무는 소리가 아침 공간에 울려펴지면 하루의 시작이 상쾌했다. 어쩌다 사과가 떨어진 날에는 마음이 허전했다. 혹시 사과 농사짓는 농부의 아내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그녀는 한 번도 거른 적 없이 사과를 보내 주었다. 어느날 아침 사과를 먹던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더 이상 사과를 보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만약 언제부턴가 사과가 오지 않는다면?'

그 '만약'은 필연적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히 계속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엇ㅂ다.'라는 벅칙을 제외하고는 무엇도 불변하지 않는다고 붓다도 말했다. 

 

내 대문앞에 사과가 배달되는 일을 포함해 그 독자와 나의 관계까지 어떤 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 

사과의 중단이 필연적이라면, 그리고 그 필연적인 변화를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사과를 마지막 사과인 것처럼 최대한 맛있게 음미하는 일이다. 

싱그러운 그 깨묾, 내 손에 알맞은 그 둥긂이 언제 중단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일수록 더 쉽게 부서진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또 한개의 ㅁ사있는 사과가, 또 한 번의 동일한 기쁨이, 또 하루의 날이 어김없이 주어질 것이라는 믿음의 망므의 기대에 불과하다. 어느 것이나 생에 단 한번의 기회일 뿐, 다음 순간은 보장되지 않는다. 어찌보면 우리는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경험하고있는 셈이다. 이세상 역시 우리 각각의 존재를 마지막으로 경험하고 잇는 것처럼.

 

여행자들이 많이 하는 거짓말은 '다시 또 보자!'라는 말이다. 그 만남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허공에 손을 흔들며 말한다. 

"또 만나! 곧 다시 올 거야!"

그러나 그런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설령 다시 그 장소에 간다 할지라도 그 사람 그 게스트하우스는 달라져 있거나 과거의 당신은 그 자리에 없다. 기후마져 변해있다. '또 만나!'라고 외치면서 목이 메는 것은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한번은 누군가가 태국의 아잔 차 스님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변화하며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별과 상실은 우리 존재에 내재해 있습니다.그런데 어떻게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떤것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안전할 수 있습니까?"

 

아잔차는 따뜻한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 나서 탁자 옆에 놓인 유리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이 유리잔을 좋아한다. 이 유리잔으로 물을 마신다. 이 유리잔은 놀라울 만큼 훌륭하게 물을 담고 있으며 햇빛을 아름답게 반사한다. 두드리면 맑고 투명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나에게 이 유리잔은 이미 깨진 것과 같다. 언젠가는 반드시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선반에 올려놓았는데 바람이 불어 넘어지거나 내 팔꿈치에 맞아 탁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면 유리잔은 산산조각이 난다.

 

나는 그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여긴다. 이 유리잔의 속성안에 '필연적인 깨어짐'이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유리잔이 이미 깨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 임을 이해 할 때, 그것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해진다. 그것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하다."

그 유리잔처럼 나의 육체도 내 연인의 육체도 이미 부서진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때 삶의 매순간이 소중해진다. 소중함과 가치가 두려움보다 슬픔보다 앞선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덧없고 영원하지 않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음을 깨달음으로써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영원하지 않음'을 우리가 통제하려고 하지 않을 때 마음은 평화롭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크눌프]에서 주인공 크눌프가 친구에게 말한다.

"아름다운 소녀가 있다고 해 봐. 만약 지금이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가 늙을 것이고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면, 아마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을 거야. 어떤 아름다운 것이 그 모습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럴경우 난 그것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걸.

 

이것은 어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꼭 오늘 봐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야. 반대로 연약해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잇으면 난 느것을 바라보게 되지. 그러면서 기쁨만 느끼는 게 아니라 연민심도 함께 느낀다네.

 

난 밤에 어디선가 불곷놀이가 벌어지는 것을 가장 좋아해. 파란색과 녹색 조명탄들이 어둠 속으로 높이 올라가서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작은 곡선을 그리며 사라져 버리지. 그래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잇으면 즐거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것이 금세 다시 사라져 버릴 거라는 두려움도 느끼게 돼. 이 두 감정은 서로 연결 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지. "

 

어제도 대문앞에 도착한 사과가 내게 일깨운다. 사라지고 작별을 고할 것을 알면 무엇 하나 특별하지 ㅇ낳은 것이 없다고. 오히려 그 아슬아슬한 현존이 모든 것에 특별함을 부여한다고. 

 

당신이 지금 사과를 한입 깨물고 있다면, 당신은 마지막 사과를 먹고 있는 것이다. 만약 지금 차를 마시고 있다면, 마지막 차를 마시고 잇는 것이다. 만약 지금 차를 마시고 있다면, 마지막 차를 마시고있는 것이다. 

 

갠지스강에서 배를 타고 있다면 마지막 뱃놀이이고, 여행지의 어느길을 걷고 잇다면 마지막으로 그 불 켜진 상점들의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숨을 쉬고 있다면 ,  언제나 마지막으로 숨을 쉬고 잇는 것이다. 그렇지 않게 될 때까지는.

 

 

책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류시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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