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좋은 글

살아 있는 것은 아프다

다림영 2023. 5. 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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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루두어를 사용하는 파키스탄과 인도 무슬림 문화권에서는 상대방에게 인사를 할 때 '캬 할 헤?'라고 묻는다. 

'너의 할이 어떠한가?'라는 뜻이다. 이때의 '할'은 흔히 '상태'를 의미하지만, 본래는 '현재 가슴의 상태'를 가리킨다. '지금 너의 가슴은 어떤 상태인가?'라고 안부를 묻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벌고, 얼마나 일이 많고, 얼마나 넉넉한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 존재가 다른 인간 존재에게 '지금 너의 가슴에 기쁨이 있는가? 너의 영혼에 생기가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북인도 바라나시의 뒷골목에 내가 종종 가는 찻집이 있다. 작고 허름하지만, 짜이 맛이 좋아서 현지인뿐 아니라 외국 여행자들도 북적인다. 두 살 터울의 형제가 운영하는데 그림 실력이 뛰어난 동생은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어느 날 아침 , 찻집 안쪽 나무 걸상에 앉아 지역 신문에 난 음악회 일정을 살펴보고 있는데 한 인도인 남자가 가게 앞에 나타났다. 얼핏 보기에도 짜이를 마시러 온 것은 아닌 듯 했다. 허름한 차림의 남자는 턱이 진 입구로 올라올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길에 서서 찻집 안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구걸을 하러 온 것도 아닌 듯 했다.

 

찻집앞 골목은 폭이 일 미터 정도밖에 안 되기 대문에 사람들과 오토바이와 소들이 지나갈 때마다 남자가 걸리적 거렸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찻집 안을 응시했다. 다들 그를 정신이상자쯤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아침마다 그 찻집에 들르는 웬만한 사람들을 알고 있는 나로서도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남자는 일주일이 넘도록 매일 8시 무렵 찻집앞에 나타나 등굣길의 아이들, 갠지스강으로 향하는 순례자들 , 가게  문 열러 가는 배 나온 남자, 채소시장가는 뚱뚱한 여인에게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우두커니 찻집 안을 바라보았다. 배고픈 표정 같기도 하고, 초점이 없지만 뭔가 갈구하는 눈동자였다.

 

마침내 내가 신문을 접고 남자에게 다가가 "캬 할 헤!" 하고 인사를 하자 그도 "캬 할 헤!" 하고 반응을 보였다.

내가 힌디어로 이름을 물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까 뜻밖에도 그는 영어로 대답을 했다. 어느정도는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동네 주민이 아니라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 흘러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짜이 한 잔을 건네며 날마다 그곳에 오는 이유를 물었다. 뜨거우 유리잔을 때묻은 손으로 감싸고서 남자는 턱으로 찻집안을 가리켜 보였다. 처음에는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그는 손가락으로 찻집 안 맞은 편 벽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그곳에 걸린 그림을 보게 되었다.

 

작은 액자에 담긴 그림이었다. 여러 번 그곳을 들른 나도 눈여겨본 적 없는 , 찻집 주인의 동생이 그린 평범한 작품이었다. 가느다란 선에 옅은 푸른색과 갈색 물감을 번지도록 칠한 그림 속에서 사리를 입은 여인이 두 팔로 갓난아이를 공중에 들어 올리며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을 응시하는 남자의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초점없는 눈처럼 보였던 것은 그 물기 때문이었다.

 

짜이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남자는 자신에게도 그림 속 여인 같은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가 과거형으로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내와 아이가 일년전 자동차 사고로 죽은 것이다. 충격을 받은 그는 떠돌며 살아갔고, 그러다가 우연히 찻집에 걸린 그 그림을 발견하고는 날마다 그곳에 와서 몇 시간이고 물기 맺힌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공중으로 들어올리며 행복하게 쳐다보는 모습을.... 

 

살이 있는 것은 아프다. 고통은 한계를 넘을 때 스스로 치유제가 된다고 하는데,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쩌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듬해 다시 갔을 때는 며칠을 기다려도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찻집 형제와 단골손님들에게 물어도 행방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그 그림만 변함없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내 인도인 친구 산자이가 즐겨 부르는 영화 주제곡에 이런 가사가 있다. 

"두니아 메 키트나 감 헤. 메라 감 키트나 캄 해."

'세상에  슬픔은 얼마나 많은가.내 슬픔은 얼마나 작은가.'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알고 나면 나의 슬픔이 작게 느껴진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는 딸 페르세포네가 지하의 신에게 납치당하자 상심한 나머지 곡물을 자라게 하는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하지 않고 울기만 한다. 그래서 온 대지에 기근이 퍼진다. 인도 신화와 라마 신도 아내와 헤어지자 견디지 못하고 오열한다.

이 세상 누구도, 신들조차 슬픔과 고난으로 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알 때 우리는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크게 동요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태풍이 멈췄는데도 계속 흔들리는 나무 처럼 된다.

 

속속들이 알기 전에는 모두가 평화로워 보인다.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의 우화가 있다. 한남자가 매일 밤 기도했다. '저의 부탁을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저보다 불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누구의 삶도 저보다 나을거예요. 저는 축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저의 인생을 다른 사람의 인생과 바꿀 기회를 주세요. 이것이 지나친 부탁인가요?"

 

남자가 밤마다 큰소리로 외쳤기 때문에 신은 평화로울수가 없었다. 마침내 하늘에서 큰 음성이 모든 사람에게 말했다. 

"그대들 각자가 겪은 불행한 일들을 보자기에 싸서 사원마당으로 가지고 오라."

잠이 깬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한 일들을 보자기에 싸기 시작했다. 남자는 매우 기뻤다. 

'이제 드디어 다른 삶을 선택할 기회가 왔군!'

그는 자신의 보자기를 들고 서둘러 사원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도 보자기를 들고 달려가고 있었다. 

 

사원이 가까워질 수록 남자는 겁이 났다. 사람들이 그의 것보다 더 큰 보자기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웃던 사람들 좋은 옷을 입고 항상 밝은 얘기만 하던 사람들이 더 큰 보자기를 어깨에 지고 가고 있었다.

 

남자는 망설였지만 평생 기도했기 때문에 사원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하늘의 음성이 말했다.

"그대들의 보자기를 모두 펼쳐 놓으라."

모두가 보자기를 펼쳐놓자 그 음성이 다시 말햇다. 

"이제 서로의 냉용물들을 살펴보고 각자 원하는 보자기를 선택하라."

 

다른 사람의 불행한 일들을 알게 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모두가 자신의 보자기를 향해 달려간 것이다. 이남자 역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불행을 고를까 봐 서둘러 자신의 보자기를 향해 뛰어갔다.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큰 고통이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적어도 자신의 불행에는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남자는 불평하는 기도를 멈췄다. 

 

책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류시화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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