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
여기 온 이래 생활 리듬이 깨져서 편지를 쓰지 못했어요.
몇 번을 써도 안 됩니다. 저는 소설가는 포기하고
이태리에서 우표팔이 아줌마를 해야겠어요. 돈 계산을 속이는 우표팔이가 되어
택시 운전기사를 하는 남편하고 둘이서 그날 수입을 계산하면서 살면 인생이 즐거울 것 같아요.
사람을 여럿 속이고는 낮잠을 자요. 그래도 신앙이 두터워서 교회에 가 얌전하게 고해를 하고
몇 번 기도하며 용서를 받은 다음에 상쾌한 기분으로 다시 장사를 할 거예요.
건강하신지요?
철학에서도 과학에서도 슬픔을 느끼는, 전기담요를 붙들고 사는 벗이여, 베를린에 계속있으면 당신은 갈수록 점점 스스로를 닮아버리겠지요.
당신을 접어서 속달우편으로 밀라노에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에게서 좀 멀어지고 전기담요에서 얻는 행복보다 좀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남쪽으로 갈 수록 행복한 것 같아서 나중에 남쪽으로 내려가서 장화 끝에 내달려 보려고 합니다.
역시 잘 써지지 않네요. 날씨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 바람에 슬펌프에 빠졌어요. 잘 쓰지도 못하는데 이제 종이마저 없어서 곤란해요.
천재도 이탈리아 기행을 쓰지 못해 붓을 꺾어 버리고 만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무래도 우표팔이 아줌마보다 야태가게 아줌마의 속임수가 더 만만치 않으니 저는 야채가게 아줌마가 될까 봐요.
여기서 저는 웃음을 참지 못할 만큼 기분이 좋아요.
먹고 자는 일에 전념하며 게으름배이로서의 참된 행복을 추구하기로 했어요. 낮잠을 네 시간이나 자는 사람은 출세하지
못하겠죠.
아, 정말 슬럼프네요. 글이 잘 안 써져요. 천재는 괴로워요. 너무 많이 자서 망한 것 같아요.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리스트를 받지 못해서 여동생에게 책 발송을 부탁햇습니다. 금방 보내 줄 거예요. 다른 책은 잘 몰라서 릴케 것만 부탁했어요. 늦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제가 뭘 먹고 있는지 알면 당신은 샘이 나서 끙끙거릴거예요.
1981
요코씨
제가 사는 본의 'Venusberg(비너스의 언덕?)는 "세시봉"입니다. '비너스의 언덕'이라는 이름이 요염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곳은 그런 장소는 절대로 아니에요.
라인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본에서도 가장 우아한 저택가예요.우리 집 옆에는 이혼한 빌리 브란트씨가 삼십대의 여자친구와 함께 시골에 이사하기 전에 살았던 집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베를린의 그루네발트 같은 동네예요. 제가 사는 곳은 에베르트재단의 게스트하우스로 창밖으로는 본대학 운동장의 아름다운 잔디밭이 보입니다.
그저께까지는 눈에 덮여서 새하얬는데 , 어제 (일요일)제가 유럽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날이 개서 낮에 눈이 좀 녹았습니다. 눈 밑으로 잔디밭의 푸른색이 보이는 게 무척 아름답습니다.
들리는 것은 교회의 종소리와 새 울음 소리뿐, 별천지 같습니다.
제가 좀 더 젊었더라며.
살인마들이 굼실거리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이런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저는, 그래도 제 고향과 고향 사람들을 싫어하지 못해요.
요코 씨 편지를 기다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C.H.Choe
.....
출판사 '남해의 봄날'이라는 이름이 너무 마음에 닿아 그곳에서 나오는 책들을 찾아보았다.
그중 편지글로 모아진 이책을 선뜻 주문했는데 난 이 출판사의 책과 가까이 지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해의 봄날' 너무 근사하지 않는가?.. 봄날 하고 맺는 순간.. 마음속엔 남해의 풍경이 들어차
환해지기만 한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고등학교 이학년때이다. 그땐 펜팔이 유행했었다. 난 대만 에 한 젊은 남자와
편지를 주고 받던 즐거운시절이 있었다.
'친애하는 미스터 최'를 읽다보니 그 오래전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노요코는 베를린조형대학에서 석판화를 공부했고 한국인 유학생 최정호를 만나게 되며 평생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나누게 된다. 각기 가정을 가지고도 좋은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아내와 한 여자의 남편이 인정해주는 관계였다.
남녀사이에 우정이 존재하는가 아닌가에 대해 세상은 분분하기만 하다.
지금도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도대체 몇년전인가?
이들이 평생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각기 가족을 사랑하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남녀사이의 우정이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생을 살고 갔다. 진정으로 나도 모르는 나까지 다 얘기 할 수 있는 그런 남자사람
친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일까싶다. 그들을 사모하며 존경하는 바이다. 그녀의 글은
참 재미있다. 읽다가 웃음이 새어나올정도로.. . ^^그녀의 수필을 사야 할 것 같다. 즐거운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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