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 박씨의 죽음/박지원
옛날 높은 벼슬에 오른 형제가 어느날 집에 돌아와서 다른 사람의 벼슬자리의 승진을 막자고 의논하였다. 그들의 어머니가 이야기를 듣고 말을 거들었다.
“얘들아!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의 승진을 막으려고 하느냐?”
‘그 어머니가 과부인데 행실에 대한 소문이 좋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놀란 듯이 말하였다.
‘아니, 안방 안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고 떠든다더냐?”
“풍문이란 글자 그대로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이다. 바람이라는 것은 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모양이 없으므로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는 것이다. 바람은 공중에서 일어나 만물을 흔든다. 마찬가지로 풍문도 아무 근거 없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흔들어 움직이게 한다. 그렇거늘 너희는 왜 근거도 없는 풍문을 가지고 그 사람의 앞길을 막으려고 하느냐? 게다가 너희는 과부인 나의 자식들이 아니냐? 과부의 자식이 과부의 처지를 왜 그렇게 몰라주느냐?”
그리고 그 여자는 품속에서 동전 한닢을 꺼내어놓았다.
“이 동전의 테두리무늬가 보이느냐?”
“안보입니다.”
“거기 새겨진 문자는 보이느냐?”
“안보입니다.”
어머니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이 무느니는 내가 지난 십년 동안 하도 만져서 닳아 없어진 것이다. 너희 어미를 죽음의 충동으로부터 지켜준 물건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혈기는 음양의 이치에 의하여 타고난 것이며, 감정과 욕망은 그 혈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생각은 홀로 있을 때 많아지고 고민은 그러한 생각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혈기가 왕성 할 때면 과부라고 어찌 감정이 없겠느냐? 등불의 그림자만 바라보며 밤을 지새울 때 처마 끝에 처량하게 들려오는 빗방울 소리나 달 밝은 창가에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들어보아라. 게다가 저 멀리 하늘가에 외로운 기러기가 끼룩끼룩 울고 지나가면 처량한 신세를 누구한테 하소연하겠느냐? 곁에 누워 자는 어린 계집종이 속도 모르고 코 골며 잠에 곯아떨어져 있을 때,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 동전을 꺼내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렸단다.
그러면 그 동전은 평평한 방바닥을 잘도 굴러가다가 구석진 곳을 만나면 쓰러지지, 나는 그 동전을 어둠 속에서 더듬어 찾아서 다시 굴린단다. 하룻밤 사이에 대여섯 번을 굴리고 나면 날이 새지.
이렇게 십년을 지나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동전 굴리는 횟수가 점점 적어지더구나. 나중에는 오일에 한번 또는 십일에 한번 굴렸는데 이제 나이 먹고 노쇠하여지니 동전 굴리는 일이 더 이상 없어졌단다. 그러나 나는 이 동전을 싸고 또 싸서 수십년 동안을 깊이 갈무리해두었다. 이 동전의 공로를 잊지 않고 때때로 반성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말을 들은 아들들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조면희<황소에게 보내는 격문 외> 현암사 2001
이 글에 현대성, 현장성을 부여하는 건 인간이라는 존재에 영원히 따라붙는 외로움입니다. 과부의 개가를 나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 과부의 외로움은 더했을 것이고 사람과의 만남과 소통이 자유롭지 않은 사회에서 홀로 있는 것을 견디기란 더욱 어려웠겠지요. 그 고통이 하늘에 닿고 땅을 울려 비로소 한 작가의 붓끝을 통해 이 글이 만들어졌을 겁니다.
풍문을 바람에 비유하고 코 고는 계집종을 등장시켜 사람 사이의 외로움을 현실감 있게 만들며, 테두리와 문자가 닳아 없어진 동전으로 인고의 세월을 더없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솜씨를 감상해보십시오. 한동안 외롭지 않으실 겁니다.p194
내 아들의 연인/정미경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꺼내는데 전표를 건너다보던 도란이 카운터 아가씨에게 묻는다. 짜장면 구천원 아니었어요?카운터 아가시가 친절하게도 대답을 했다. 부가세하고 봉사료가 붙었거든요. 아니, 짜장면 주제에 무슨 봉사료예요? 도란이 영 불편한 표정으로 묻는다. 도란이를 내 차에 태우고 근처의 백화점으로 간건 짜장면에 무슨 봉사료냐고 묻는 도란이를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카운터 아가시의 태도에서 뭔가 내 속을 건드리는 게 있었기 때문일까. 어린 사람에게 먼저 선물을 받으니 좀 그렇네, 하며 여성복 매장의 엘리베이터를 내려서며 옷을 하나 사주고 싶다고 했을 때도 도란이는 아까 카운터 앞에서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저 , 이런데서 온을 안 사입었거든요?한다. 어른이 해주겠다면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게 예븐거야, 하며 나는 앞장서서 걸었다.
백화점에 옷을 사러 갈 땐 동창회 갈 때만큼이나 공들여 화장을 하고 제대로 차려입고 나가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특히나 이 백화점은 분위기가 유난하다. 영캐주얼 매장에 들어가 도란이를 세워놓고서야 나는 그걸 새삼 깨닫는다. 똑같이 맨얼굴로 서 있어도 이 동네 사람과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의 피부는 때깔에서 차이가 난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와도 이 동네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다. 그게 걸치고 있는 입성의 차이에서 나오는 느낌만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뼛속 깊은 데서 나오는 다름, 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란이 나이는 남대문 좌판에서 산옷을 걸쳐도 깜찍하고 눈부실 나이지만, 여기,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졸지에 옷 하나 유행따라 차려입지 못하는, 보살핌 없이 자란 처녀티를 내며 무르춤해서 서 있는 도란이 대신 내가 몇가지 옷을 골라봤다.
이상했다. 커다란 인형처럼 현실성 없는 옷을 입혀놓은 마네킹 옆에서, 도란이는 어쩐지 눈에 안기는 구석이 없는 아이, 무얼 입혀도 때갈이 나지 않을 아이처럼 미워보였다. 싫다고도 좋다고도 않는 도란이 어느 순간 무언가를 견디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을 때, 매장에서 옷 파는 주제에 도란이를 업수이 여기는 듯한 턱의 표정을 판매원에게 읽었을 때, 나는 오기 같은 열심히 나서 행거를 뒤적이며 옷을 골라 이것 저것 입혀보았다.
몇 개를 갈아 입혀보았는데도 어째 착 붙는 느낌이 오지 않앗다. 노란색 계열이지만 지나치게 유아스럽진 않은 재킷을 골라 입어보라고 하자, 도란이는 거의 탈진한 듯한 표정으로 옷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고른 데님바지와 면재킷을 입혀놓으니 밉진 않았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를 타고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줄 때까지 도란이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내리면서 조그맣게 고맙습니다, 하고는 차문을 닫는다. 백미러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보인다. 한숨이 나왔다.
<내 아들의 연인> 문학동네 2008
서민의 딸과 부자의 아들이 연인이 됩니다. 그리고 서걱거림이 시작됩니다. 서걱거리는 소리는 빈부의 계층이 직접 맞부딪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양이 없는 것이겠지요. 오히려 부유층들의 문지기들이 ‘묘한’표정으로, 부유층이 아닌 사람들을 분별해내고 ‘업수이 여기는 듯한 턱의 표정’을 짓는데서 불화의 무늬가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이 불편함을 넘어서야만 빈부의 경계가 무너질가요? 한쪽은 오기같은 열심히 나서, 한쪽은 탈진하도록 ‘나지 않는 때깔’을 견딥니다.
한쪽은 조그많게,‘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고 한쪽은 보내고 나서 한숨을 쉬네요. 아마도 작게.
마음과 관계의 무늬를 따라가는 눈길, 손길이 섬세합니다. ‘애인이여/멀리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무제1)고 한 박재삼 시인의 시가 생각납니다.1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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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옆 지기가 뭐가 그리 뒤틀렸는지 속이 잔뜩 상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동호회가 갈라졌다는 것이다. 부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뉘어 졌다며 그런 얘긴 지들끼리 모였을 때나 하면 되지 모두 함께 있는데 그들만의 얘기를 긴 시간 했다고 욕을 하는 것이다.
부자들 몇이 무리지어 해외를 다녀온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이 새어 나옴을 막을 수 없었다. 돈 있는 사람들이 해외에 나갔다왔기로 그것이 왜 그렇게 마음에 상처를 받을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때 자신이 잘나갔던 사람이었고 이젠 그 반열의 근처에 서성이는 것조차 엄두에도 나지 않는 처지여서 그런 것인지 아이 같은 마음이 측은하기도 하고 어리석게도 보이기도 한 것이다.
몇 번이나 민주사회를 운운하며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인데 그것을 마음에 담고 상처를 받는 사람이 더 이상한 것이라 얘기해도 몇날 며칠 마음속에 그것을 품고 있었다.
그가 다시 평범한 기분으로 왔을 때 그런 것들이 보기 싫다면 어울릴 생각을 말라 하니 알았다며 섹소폰 연주나 들으러 갈 건데 함께 해 주겠냐고 묻는다. 언감생신 난 싫지만 당신을 위해서라면...하니 좋아라한다. 다시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나이가 그렇게 들어도 아이같은지 모를 일이다. 아니면 죽어라 열심히 벌어서 함께 어울리던지.. 그건 싫어하면서 그들의 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모양새라니...
아침마다 불경을 틀어놓고 있다. 나도 나지만 가끔 거칠고 모가 나게 되는 마음들을 둥글게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낮은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기도 하겠지만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고요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게 되니 지속적으로 행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얼마 전 친구가 며느리를 들이며 백화점에서 제일 비싼 옷을 사 입혔는데도 테가 안 난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 그 며느리 이것저것 입어보며 가시방석 같았을 마음이 보인다...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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