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을 머금은 흙집을 본 순간, 마음에 쏙 들었다. ‘마을 아래쪽은 번잡한 관광지로 변한지 오랭 니 동네에도 이런 곳이 남아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동네에서 적당히 벗어난 곳에 포근하게 자리잡은 집이었다. 처음부터 이곳에 터를 잡았다면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 고생은 안했어도 되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지바른 남향에 편안하게 솟은 뒷산, 아래로 겹겹이 겹쳐진 산줄기들, 그 끝에 자리한 섬진강 너머 백운산, 오래전에 지은 흙집과 툇마루, 집 뒤로 담처럼 둘러쳐진 차나무.... 무엇보다. 내 마음을 끈 것은 우물이었다. 집옆에 커다란 바위동굴이 있고, 그 입구에 우물이 있는데 우물 위 바위 틈에는 차나무가 자리잡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이것도 인여이라면 참 고마운 인연일 터이다.
일사천리로 집을 계약하고, 기범이 신학기에 만춰서 이사를 하여 집 수리에 들어갔다. 가능하면 있는그대로에서 최소한만 손을 보기로 하고 시작한 일이 구들을 뜯어서 다시 놓는 것이었다. 기존의 구들을 다 들어내어 그을음을 털어내고 다시 놓는 작업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일하는 분들이 얼마나 경건하게 일을 하는지 돕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가 경건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작은 돌 하나라도 생긴 그 상태에서 스임새가 있었다. 어떻게 생긴 돌이든지 그분 손에 들어가면 딱 맞는 공간이 어딘가에 꼭 있었다. 여러개의 돌들이 요술처럼 서로 어깨를 기대고, 틈새는 흙으로 메우며 아궁이와 방구들이 완성되었다. 그 분은 이동네에 사는 배인준 할아버지인데, 요즈음은 구들 놓는 살마이 많지 않아서 다른 일을 주로 한다고 하셨다. 오래 사시면서 다음에 구들을 다시 놓을 대도 또 해달라고 말씀드렸더니 먼지가 많이 생겨서 일이 힘들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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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에 불을 넣을 때면 얼마나 행복한지, 세상에 그 어떤 향수가 나무타는 냄새에 견줄 수 있을가 싶다. 여름에는 대문을 걸어 잠그기만 하면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 된다. 맨발로 마당을 서성이거나 아예 마당에 퍼질러 앉아서 땅기운을 그대로 받으며 풀을 뽑기도 하고, 더우면 시원한 우물물로 몸을 식힌다. 그리고는 그냥 발가벗은 채로 마당을 서성이며 몸을 말리기도 한다. 대문을 활짝 열어 두어도 들어올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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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인가. 봄을 맞은 이 집 나무들은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도 남았다. 집 앞의 매화나무는 내가 들어올 때 이미 꽃을 피우고 있었고, 대문 옆의 가죽나무와 엄마무는 그 특별한 향을 은근히 뿜어냈다. 집 서쪽에 늘 푸른 대나무와 봄에 돋아나는 죽순, 집을 감싸안은 차나무와 감나무들,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쓸모있는 나무들이다. 그 나무들 사이로 돌나물, 머위, 고들빼기, 달래 등이 도아나 행복하였다. 집 주변 곳곳에 난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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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절이 집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날부터 아이와 나는 매일 아침이면 백팔배를 하러 절에 갔다. 그러고 나서 아이는 학교로,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이른아침의 사찰 풍경은 백팔배와는 또 다른 감회였다. 매일 듣는 새소리도 새롭게 들리고 절 주변 풍경도 새롭게 다가왔다. 비오는 날은 빗소리가, 바람부는 날은 바람소리가 새롭고 경이로웠다.
백팔배를 하면서 ‘무엇 무엇을 바랍니다’라는 바람이 없지는 않았으나 ‘고맙습니다’라는 감사의 마음이 더 커졌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게 고마움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는 ‘어제는 무엇을 하였고 무슨 일이 있었다’라는 식의 보고(?)를 하면서 어제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아이는 오히려 나보다 더 백팔배를 즐거워했고 자랑스러워하였다. 이제 이른 아침의 사찰행은 우리 가족의 일상이 되었다. 아이는 그때부터 자기는 커서 스님이 되겠다고 한다. 나도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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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나무하러 가는 일 말고는 마루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마루에서 산천을 바라보거나 그냥 앉아 있거나 책을 보거나 차를 마시면서 보낸다. 시골에 겨울의 한가함이 없다면 좀 힘들지 않을까 싶다. 나무도, 땅도, 사람도 겨울에 쉬면서 봄을 준비하는 것이다. 겨울의 쉼이 봄을 더 찬란하게 할 것이다. "
남난희-1957년 울진생. 우리나라 대표 여성산악인. 1981년 한국등산학교 수료. 1984년 1월1일부터 76일동안 백두대간 단독 종주 성공. 1986년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 해발 7455미터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봉에 올랐고, 1989년에는 설악산 토왕성 빙벽폭포를 두 차례나 등반. 1991년 도시 생활 접고 강원도 ‘정선자연학교’교장을 지내기도 함. . 현재 지리산 화개골에서 차와 발효식품을 만들며 아들과 함께 살고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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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기반을 잡고 있는 곳에서 모든 것을 접고 산속 행으로 떠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요즘 예전과는 달리 떠나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나 또한 그러한 막연한 꿈을 지니고 있으나 가끔 그런 얘길 하면 친구들은 시골생활을 몰라서 그런다며 핀잔을 준다. 그럴 것이다. 정말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떠난 이 들의 넉넉하고 아름다운 삶을 보면 부럽기만 하고 금세라도 따르고 싶기만 한 것이다. 무엇이든 준비가 철저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마음에 품고 있다 보면 길이 열릴 수 있음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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