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던 아침이었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부황을 떴다. 걷는 데는 이상이 없으나 자세를 바꾸면 기분 나쁜 아픔이 잠깐씩 스치는 것이다. 놓아두면 안 될 것 같아 치료를 받는데 아침산책도 거르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며칠 만나지 못했던 나의 버드나무 산책길은 조금씩 나뭇잎이 떨어지고 노랗게 물이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길조차 걷지 못하니 요즘 나의 일기는 안개와 흐림의 연속이다.
오늘의 날씨 또한 온통 회색빛이다. 무언가 시작하기에도 끝을 맺기에도 애매한 늦은 오후의 시간, 베드타운의 느낌이 다분한 이곳의 거리는 텅 비었고 버스는 사람도 태우지 않은 채 빈차로 내달린다. 내달리는 버스를 보자 불현 듯 오래전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오르며 엷은 미소가 퍼져간다.
가을 수학여행을 앞둔 때였을 것이다. 키가 크고 부쩍 말랐고 전혀 웃음이 없으실 것 같던 분이었다. 꿈에 젖어 잠 못 이루던 우리에게 어떤 장난기를 숨기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속버스를 타고 어디만큼 가면 큰 바다가 나온다. 강원도의 파도는 얼마나 높은지 버스 위를 파도가 넘나드는데 그때 오징어나 기타 생선들이 하늘에 오르기도 하지. 동작이 재빠르면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오징어 한 마리쯤 손에....”
나도 모르게 턱을 괴고 빠져들던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웃음을 쏟아내며 꺅꺅 소리를 지르며 책상을 두드리던 우리들의 오래된 교실이 환하게 떠오른다.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하던 강원도의 풍경에 사로잡히던 날들은 이맘때였다.
찬란한 단풍이 세상을 천천히 점거하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한계령, 우리는 구름 위에 있었고 난생처음 경험하던 강원도,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아득하고 차가운 공기에 휩싸였다. 물감을 풀어놓은듯한 설악의 고운 단풍, 깊고 깊어 문득 고요해지던 월정사, 어떤 전설의 얘기로 흔들거리던 흔들바위, 듣도 보도 못했던 야릇한 물맛의 오색약수터....
그리고 한 열 명이나 되는 친구들과 한방에서 지내며 장난칠 생각으로 반짝이며 궁리하던 우리들....
일찍 꿈나라로 떠난 친구들의 바지를 함께 실로 꿰어놓았고, 즐겨먹던 과자의 크림을 핥아먹은 후 과자와 과자 사이에 치약을 듬뿍 넣어 선생님께 장난을 쳤다. 야단을 맞았는지는 기억에 없고 친구들의 장난기 서린 얼굴만 떠오른다.
가을향기로 뒤덮인 험한 산 속에서 구름다리를 건너고 있었던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행여라도 누구하나 미끄러지기라도 할세라 선생님들은 일일이 다리의 시작과 끝에서 손을 잡아주셨다. 선생님들의 남다른 마음은 아랑곳 않고 재잘거리며 정신없이 가을에 취하고 설악에 몰두하며 정신을 놓고 걷던 철없던 우리들이었다.
오래된 이야기의 흔적은 몇 장의 사진으로만 남았고 풋풋하기만 하던 우리들의 시절은 먼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인생의 가을이 찾아왔는지 변해가는 나뭇잎처럼 몸도 삐끗거리며 괜찮은가 하면 또 병원행이다. 매일 걷던 산책길조차 제대로 걸어보지 못하니 마음이 무겁다. 전철로 출퇴근을 하는데 조금씩 변해가는 풍경이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계절이 조금 더 깊어지면 수채화 같은 날들이 펼쳐질 것이다. 이른 가을, 아직은 물들지 않은 도심 속에서 가을음악으로 위안을 받으며 나는 벌써부터 가을의 물이 들어 아득하고 좁다란 추억의 길을 거슬러 오르며 지난날을 그리워한다.
오래되고 오래된 아주 희미한 영상이 또 떠오른다. 먼지 풀풀 날리던 버스 꽁무니를 동네 아이들과 팔을 마구 휘두르며 달려가던 또 다른 어린아이가 보인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비가 쏟아지고....세찬 비면 더 좋아라 춤을 추듯 뛰어다녔지....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새어나온다.
음악은 지속적으로 추억을 물어 나르고 가을은 회상의 계절인가. 흑백의 시절들이 나를 사로잡으며 놓아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