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벚나무 길의 나뭇잎들이 하나 둘 노란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낙엽도 흩어져 날리고 있다. 가을풍경은 어디서든 각별한 느낌일 것이다. 화려한 지역은 아니지만 서서히 가을 물이 드는 것이 아름답기만 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거진 벚나무 길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인 탓이 크겠다. 잠시 눈을 감고 팔을 한껏 벌리고 걸어본다. 호젓하기만 한 길을 홀로 걸으며 소박한 자유를 누린다.
길 밑으로 자전거족들이 날아갈 듯 달린다. 휴일이 아님에도 그들은 그들만의 레이스를 즐기고 있다.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어쩌면 그들은 자전거로 출근을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촘촘한 시간을 쪼개어 선선한 가을공기를 가르며 생동감 있는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리라. 자전거족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람이 머물던 풍경은 언제 봐도 온기가 있다.
자전거 길 옆에는 몸집이 조금은 큰 냇물이 흐른다.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징검다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보면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튀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휴일이면 과자를 으깨어 던져주는 사람들이 많은데 물고기들은 그러한 것에 길이 들었나보다. 한주의 첫날부터 달콤한 세상의 맛이 그리워지는지 징검다리 근처로 마구 몰려든다. 어쩌면 내게 과자를 달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내 주머니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안하기도 하다.
문득 고개를 돌리는데 흰 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목과 다리가 늘씬하고 상위는 반듯하여 먼 어느 곳을 향한 모습이 우아하기 그지없다. 이아침에 무슨 생각으로 저리 고요할까 싶지만 나는 헤아릴 길이 없고 말할 수 없는 기품만은 닮고 싶어진다.
냇물의 고요가 순식간에 활기차게 바뀐다. 오리들이 떼를 지어 비상을 하다가 저 멀리 내려앉는 것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눈부신 풍경을 고스란히 안을 수 있음은 얼마나 고맙고 즐거운 일인가.
생활이 안정 되었다면 때마다 화구를 들고 지나가버릴 눈부신 풍경을 담느라 정신을 놓았으리라. 그러할 때 나는 더없는 풍경만을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길을 걷는 그 누군가도 그림 속에 머물게 하여 빈 듯 채워진 듯 짙은 가을을 남겨놓을 것이다.
조금은 차갑기도 한 한 줄기 바람이 인다. 나뭇잎 몇 장이 호르르 날리고 칠이 바래버린 초록색 버스가 출근하는 이들을 싣고 서둘러 시내로 떠났다. 약간의 매연이 날렸지만 가을엔 모든 것이 그림이다.
점퍼의 단추를 채우고 큰 산이 점점 앞으로 보이는 곳으로 향한다. 나뭇잎 하나가 얼굴에 떨어졌다. 노랗게 물이 들고 귀퉁이는 벌레가 먹은 것이다. 책갈피마다 나뭇잎을 끼워두던 소녀들이 있었는데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 듯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즘의 아이들은 눈을 씻고 봐도 어떤 운치를 찾을 길이 없다. 조그맣고 네모난 기계에 빠져 정신을 잃고 다니는 모습뿐이다. 그 속에 그들만의 무언가가 있기도 하겠지만 그런 모습들이 내겐 슬프게 느껴지고 아득한 옛 시절이 겹겹이 그리워만 지는 것이다.
물감을 뿌려놓은 듯 색색으로 물이 드는 가을이 오면 우리들은 은행잎, 단풍잎, 각기 다른 색깔과 모양의 잎을 주워 책갈피에 끼워 넣어 반듯하게 말렸다. 며칠을 기다린 후 그곳에 시를 옮겨 적기도 하고 편지와 함께 누군가에게 띄우고 그 기다림으로 하루가 저물곤 했다. 저마다 좋아하는 책을 지니고 다녔으며 때로 어설픈 시인이 되기도 했다. 차가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애틋한 사랑도 꿈꾸었고 소설속이든 영화든 누구의 이야기이든 그 관계와 이별을 슬퍼하며 한동안 가을을 앓았다.
세월은 언제 이렇게 아득히 흘러버린 것일까. 어쩌다가 나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고 고독에 묻혀드는 것일까. 마음은 언제나 청춘의 자리에 머물었으나 머리칼은 희끗해지고 주름은 곳곳에 서려있다. 맑았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멀리 유배되어 온 듯한 마음으로 느리게 살고 있다. 외딴 섬 같은 생활을 하니 친구들은 또 어찌 지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다정한 목소리로 차 한 잔 하자, 밥한 끼 하자하고 인사치레라도 묻는 사람이 없다. 변변치 않은 생활이어서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지도 못한다. 먼저 안부를 묻지 않으니 메아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침없는 세월 속에서 우리 너무나 소원해졌다. 찬란한 빛의 가을이 떠나기 전에 진한 커피 한잔 나누고 싶다. 가까운 어느 곳 수채화 같은 풍경 속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자리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막연한 서글픔이 폭풍처럼 휘 몰아친다. 아마도 모든 것은 낙엽 지는 憂愁의 가을인 탓이리라.
죽음에 이르렀다가 기사회생한 옛 친구는 하루하루 감사함으로 뜨겁게 보낸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친구의 얘기를 마음에 눌러 담는다. 짙게 새겨듣고 본받으련다.
다시 바람이 일고 떨어진 나뭇잎들은 사위로 흩어진다. 바다 빛이 저러할까 돛배 하나 없는 바다 같은 하늘이 아득하기만 하다. 냇가의 갈대들이 손을 흔들고 길을 나설 때 보이던 흰 새는 어디론가로 떠났다. 오리 떼가 힘차게 날아오르던 냇물이 보석을 뿌려놓은 듯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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