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십자가/전경린
“기차를 타기전에 캔맥주와 시사주간지를 샀다. Y역으로 실려 가는 동안 두 개의 캔 맥주를 마셨고 마치 조는 사람처럼 줄곧 주간지의 한 페이지에만 붙들려 있었다.
‘노동은 종말을 맞을 것이고, 이제 대중 복지 시대는 지나갔다... 세계화의 결과로 , 3분의 2 사회가 아니라 20대 80의 사회, 즉 20퍼센트는 유복해지고 80퍼센트는 불행해지는 5분의 1사회가 올 것이다. 거부와 하류층이 있을뿐, 중산층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빈곤과 실업... 우리의 후손들은, 아직도 세상이 온전하게 보이고 잘만 하면 세상을 제대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고 믿었던 황금같은 1990년대를 몹시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기차는 세시 오십분에 도착햇다. 어두운 역사를 지나 광장으로 나가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내가 미처 상상해본 적 없는 남자였다.
그가 고드름같이 얼어붙은 눈빛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다보니 커다란 새의 발처럼 야윈 손이었다. 손가락의 신경과 혈관과 뼈들이 모두 밖으로 드러난 손, 어쩐지 피부도 한 겹 벗겨진 것 같은 얄팍하고 투명한 분홍빛이었다. 근육도 체온도 부피감도 없는 손, 그 손을 쥐자 손 안에 커다라 장미꽃잎을 한 장 쥔 것 같았다.
그가 광장을 질러 걷기 시작했다. 빠르게 걷는 편이었다. 큰 키에도 불구하고 짚으로 만든 사람처럼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차를 마시겠어요?”
광장 끝에서 도로와 접한 횡단보도를 건널 때 그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그 고드름같이 얼어붙은 눈빛이 한순간 풀리며 맑은 물방울을 똑 떨어뜨린 느낌이었다. 남과는 조금 다른 옷을 골라 입고, 정돈을 잘하고, 미식가이고, 색채를 화려하게 사용했을 것 같은, 젊은 한 때는 아주 댄디했을 남자 같았다. 마치 바흐의 ;평균율‘처럼 단순선을 지향하며 갈등을 제압하는 능력을 키워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바람이 윤기 없는 긴 머리카락을 날리고 지나갔다. 작은 구름 몇 점이 떠 있는 맑은 날이었다.“
슬픈인어-유년의 환상2/손영목
“나보다 네 살이나 다섯 살 연상인 그녀에 관한 기억으로서 가장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물론 그 봄날 오후의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그 전인지 후인지는 불분명한 채, 바다를 바라보려고 대문간에 다가섰다가 그 집 마당이나 손바닥만한 오래뜰에 얼찐거리는 그녀를 발견하고 제풀에 얼른 물러서는 나를, 기억의 갈피 속에 두어 컷 바랜 색깔로 살아 있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 일이었다.
그렇다. 당시의 나는 매우 사색적인 소년이었고, 그래서 마을 앞에 펼쳐진 광활한 바다와 그 수평선 너머 미지의 세계를 이따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동경하곤 했다. 큰 배를 타고 그 바다를 건너가, 어느 크리스마스날 저녁 읍내 우리 초등학교 교정에서 미군이 상영해 준 영화 속의 다른 나라, 그 이국적인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내 모습을 꿈꾸며 가슴 설레는 것은 혼자만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그런 꿈에 취하는 것은 주로 학교에서 혼자 돌아오다가 가파른 산 고개턱에 막 올라서서 상쾌한 바닷바람을 가슴 가득 들이마실 때, 아니면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뜬금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싶어질 때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대문간에 설 때면 순이누나의 눈에 띌까 봐 공연히 신경을 스는 소심한 버릇이 들고 만 것이다. 왜 그런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제 이만 그 봄날의 사건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그날 아침 우리 식구들이 조반상 주위에 둘러 앉았을 때 어머니가 불쑥 꺼낸 말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소설을 읽는 나날이다. 내겐 쉽지 않은... 신기하게도 읽혀지는 글은 몇 번을 읽어도 읽혀지고 이상하게 앞으로 넘겨지지 않는 글이 있는 이유는 왜인지 도통 모르겠다. 읽어도 다시 뒤로 넘어가 읽어야 하는 그런...
전경린의 글을 좋아한다. 그녀의 글을 몇 번이나 읽는다. 글에도 맛 이 있다. 그녀의 글은 참 맛나다. 단편 소설 하나를 시작했는데...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모든 것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정말 힘든 이야기 만들기....앞으로 많은 책을 두루두루 읽어야 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들이다.
나의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 언제든 매듭지어지기를 기원해보며...
그해 여름/변숙희
은숙은 그날도 별 생각 없이 자재과 문을 열었다. 남자들만 근무하는 곳이어서인지 아니면 오래된 쇠붙이들만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어서인지 쾌쾌하고 육중한 어떤 냄새들이 한꺼번에 밖으로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냄새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미묘한 그런 냄새였다. 코를 한껏 찡그리며 가늘고 흰 손을 휘휘 내저으며 한 걸음 들여놓았다. 전등 스위치조차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누르면 튀어오르고 누르면 또 튀어 올랐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보여도 봐주지 않는, 너는 내 스타일이 아니니 너의 무엇도 궁금하지 않다 하고 처음부터 단단한 벽을 세워놓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돌아선 그런 사람 같았다.
족히 열 번도 더 누른 후에야 스위치는 결국 내려갔고 형광등은 몇 차례 깜박이더니 눈부신 빛을 쏟아내었다. 낮에도 그곳은 불을 켜야만 하는 곳이었다.
왜 이런 것들을 고치지 않고 내버려두는지 은숙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자들은 가벼운 것들은 뚝딱뚝딱 고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떤 열기로 은숙은 화끈 달아올랐다.
큰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작은 창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조차 잘 열리지 않았고 꽉 다문 입처럼 단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끼이익이익 끼익’
문은 절대로 열리기 싫다는 듯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은숙의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
..
키가 훤칠하고 희기만 해서 먼 거리에서도 그라는 것을 알게 되는 민 상무가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까만 상복을 입고 넥타이가 조금은 비뚜름한 모습에도 어쩌면 그렇게 맑은 모습인지 젊은 배우처럼 보였다. 흐려지기가 반복되는 상황에서도 은숙은 눈을 깜박이며 허리를 곧추세워 그를 바라보았다. 면도를 하지 않아 거뭇해진 그의 턱이 무척 남성적으로 느껴졌고 그림처럼 아름다워 손을 가져가 만져보고 싶었다. 입 꼬리 한쪽을 올리며 슬쩍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이 여전히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은숙은 누군가 따라준 소주 잔을 다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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