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한시 미학 산책 /정민/휴머니스트

다림영 2013. 5. 1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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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거운 편지

함경도 안변 땅에 벼슬을 살러 가 있던 봉래 양사언 (1517~1584)이 서울의 백광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반가운 마음에 겉봉을 뜯어보니 , 딱 열두 자 한 줄의 사연이었다.

 

삼천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내고 있소

 

고작 이만 한 사연 전하자고 천릿길에 편지를 띄웠더란 말인가. 그러나 음미할수록 새록새록 정감이 넘쳐나는 뭉클한 사연이다. 한 조각 구름 속에 밝은 달이라 했으니, 달은 달이로되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달이다. ‘심친 이라 하여 그 밖에 다른 것에는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음을 보였다. ‘월인 천강 이랬거니, 달은 나 있는 안변이나 너 있는 한양이나 가뭇없이 비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널 보듯이 달을 보고, 달 보듯이 너를 생각한다는 사연이다.

그나마도 그 모습은 보일 듯 구름 사이로 숨기 일쑤이니 이 아니 안타가운가. 단지 열두 자의 편지가 심금을 울린다.

 

야릇할손 봉래의 편지여! 삼천 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빠끔히 내민 달과 친하다니 말이다. 그리움을, 보고싶단 말을 이리 전하는 마음. 삼천리 밖에서 보낸 편지 치고는 싱거워서 뭉클한 사연이다. 노산 이은상(1903~1982)의 시조에도 매화 꽃 졌다 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라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지 못하고라고 한 것이 있다.

 

서울 봄날 한 통의 편지를 받아드니

글 속에 적힌 것은 심친이란 말뿐이라.

그리는 맘 구름 달을 외려 선망하셨구려

삼천 리 밖 사람에게 나누어 비칠 테니.

 

앞 편지를 받고 쓴 백광훈의 답시이다. 편지를 손에 들고 그리움에 눈물이 글썽글썽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백광훈의 시를 한 수 더 감상해본다.

 

뜬 인생 백 년간을 홀로 괴로워하며

서로 좋은 얼굴로 처자식을 달래었지

금릉성 아래 와서 문득 올려다보니

흰 구름은 여태도 구봉산에 걸렸구나.

 

제목은 <집을 떠나며別家 >이다. ‘부생浮生 을 탄식하며 자고自苦 한다 헀으니, 떠나는 사연이나 짐작할 만하다. ..

 ..

왜 사냐건 웃지요.

옛글에는 야단스러움이 없다. 간결하게 할 말만 하고, 때로 아무말 않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은 글자 사이로 흘러, 행간에 고여 넘친다. 예전 중국의 곽휘원이란 이가 먼 데로 벼슬 나가 있다가 오랜만에 온 남편의 편지를 꺼내보니 달랑 백지 한 장 뿐이었다. 답시를 보냈다.

 

푸른 깁창 아래서 봉함을 뜯어보니

편지지엔 아무것도 써 있질 않더이다

아하! 우리 임이 이별의 한 품으시고

말 없는 가운데 그리는 맘 담으셨네.

 

청나라 원매의 <수원시화隨園詩話 >에 나오는 이야기다. ..

  ..

 추사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초서에 능했던 명필 이삼만(1770~1847)은 일생에 먹을 갈아 구멍을 낸 벼루가 여러개였다.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더니, 벼루 여러개가 밑창나도록 그는 열심히 먹을 갈고 또 섰다. 사광 은 전국시대의 유명한 악사였다. 그는 소리를 듣는데 방해가 된다며 자신의 눈을 찔러 소경이 되었다. 예술도 이쯤되면 이르러 간 경지를 측량할 길이 없게 된다. 최고의 경지에 오르려면 잗다란 기교쯤은 까맣게 잊어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영욕도 득실도 생사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

시마는 시인에게 제멋대로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훌쩍 떠나버리는 재미난 귀신이다. 일단 시마가 붙으면 잠시도 시를 떠나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다가 시마가 훌적 떠나가면 시를 짓고 싶은 마음도 없어질 뿐만 아니라, 제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없게 된다. ‘호사다마 란 말이 있다. 좋은 일에는 마 가 낀다는 말이다. 무슨 일이 이상스레 잘 안 될 때 우리는 마가 끼었다고 말한다. ‘란 일이 안되게 만드는 방해꾼이다. 하지만 이 시마란 녀석은 적어도 시인에게는 방해꾼이 아니라 언제고 환영해야 할 손님이다. 시마가 붙고 나면 그냥 하는 말도 모두 기가막힌 시가되지만, 시마가 떠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니 말이다.

백낙천은 일찍이 <취음 醉吟>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주광酒狂 에 더하여 시마까지 끌어와

한낮부터 슬피 읊다 저물녘이 되었네

 

술취한 그에게 시마까지 들러붙었다. 멀쩡히 환한 대낮부터 구슬픈 시를 읊다가 저녁까지 내처 시만 짓고 있다는 얘기다. 자신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이게 바로 시마의 장난이다.

..

시귀는 일회적으로 시인의 입을 빌려 대신 노래하게 하거나, 스스로 직접 나타나 시를 읊기도 하는 귀신이다. 이 시귀가 지은 시가 귀시다.

광주 교외에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김덕령(1567~1596)을 모신 사당 충장사와 취가정이란 정자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조직하여 나라를 위해 싸웠으나 간신배의 모함을 입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시인 권필이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 꿈속에서 김덕령의 시집을 얻었다.

시집을 펼쳐보니 첫머리에 <취시가 >란 작품이 실려 있었다.

 

취했을 때의 노래

 

이 노래 아무도 듣는이 없네.

꽃 달에 취함도 내 바라잖코

공훈을 세움도 내 원치 않네

공훈을 세우는 것 뜬구름 뿐이요

꽃달에 취하는 것 그 또한 뜬구름.

취했을 때의 노래

아무도 모른다네

내마음 긴 칼들고 밝은 임금 받들기 원할 뿐.

 

세상에 김덕령의 시집이란 것은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권필이 꿈속에 본 김덕령의 시는 김덕령의 것인가, 아니면 권필의 것인가? 취가정에는 권필이 꿈에서 보았다는 시가 현판에 새겨져 걸려 있다.

권필의 문집에는 이 시말고도 꿈속에서 지은 시가 여러편 실려 있다. 어느 날 밤 꿈에 그는 빈 집에 들어갔다. 때는 저물녘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낙엽이 뜰에 가득했다. 문득 이별을 이별을 원망하고 시절을 상심하는 느낌이 일어 꿈 속에서 시를 지었다.

 

텅 빈 마을 적막하여 사립도 닫혔는데

낯선 땅에 머물자니 옛 벗도 볼 수 없네.

저녁 해 다지도록 아무도 오질 않고

뜰 가득 붉은 잎에 부슬부슬 비 내린다.

 

시상이 처량해서 자못 귀기 가 감돈다. 평소 얼마나 시로 마음 졸였으면 꿈속에서 시를 짓겠는가. 요즘 시인들에게도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다.

권필에게는 이런 일화도 있다. 심씨 성을 가진 선비가 종암동 어귀에서 말을 쉬고 있었다. 한 서생이 다가오더니 절구 한 수를 읊조리곤 홀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읊었다는 시다.

 

봄물은 아득하고 버들개지 날리는데

들바람 비를 불어 정의 에 점을 찍네

들머리 옛무덤엔 청명이 가까워

지는 해에 갈까마귀 울면서 가질 않네.

 

심생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돌아와 권필에게 자신이 지은것이라며 자랑하였다. 시를 본 권필이 말했다. “이건 귀신의 작품이로군. 결코 그대의 솜씨가 아닐세.” 심생이 크게 놀라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시평보유詩評補遺 >에 나온다.

..

 

시마가 떠난 시인들은 시 짓기를 그만두는 것이 옳다. 젊은 시절 날카로운 표현과 치열한 시정신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던 시인들이 어느 순간 침묵의 나락 속으로 빠져드는 경우를 지금도 흔히 본다.

침묵은 그래도 보기에 아름답다. 이미 시마가 떠나버린 현실을 인정치 못하고 , 이전에 벌어놓은 점수까지 죄 까먹는 조악한 시를 발표하는 모습은 보기에 민망하다. 시마가 떠나가면 넋두리조차 구부하지 못하게 된다....

 

청나라의 유희재가 <예기>에서 말했다. “시 혹 경이 앞서고 정이 뒤따르거나, 혹 정이먼저고 경이 나중한다. 정과 경이 나란히 이르기도 하는데, 서로 떨어진 듯 융합하니 각기 그 묘가 있다고 했다. 그 미묘한 저울질에 대해 김시습은 <학시學詩 >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객은 시를 배울 수 있다하지만

시의 법은 차가운 샘물과 같네

바위에 부딪히면 목 메 울다가

연못에 가득 차면 고요하다네

굴원 장자 강개함 많았다지만

위진에 이르러선 번다해졌지

심상한 격조야 없앤다 해도

묘한 이치 말로는 전키 어렵네

 

시는 찬 샘물이다. 시를 잘 쓰려면 물의 선변善變  을 배워야 한다.

굴원의 시와 장자의 산문에는 강개의 비분이 담겨 잇다. 그러나 그 강개는 어디까지나 돌에 부딪혀 난 여울의 소리였지. 악악대며 떠드는 왜가리 소리가 아니었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시의 법은 점차 시끄럽고 번다해서 옛사람의 정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다스럽게 말하고 아프다고 끙끙대는 소리가 시의 내용이 되고 말았다. 심상 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라. 그러나 진정한 시법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 이 있다. 그 현관 앞에 서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여는 법은 아무도 일러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제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한시 한자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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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가 오기는커녕 그 뒷 꽁지 그림자도 볼수 없으니 옛 글 읽으며  취합니다.

취할 수 있는 감성이라도 지녔으니 얼마나 다행일까 합니다. 오늘이 그로 하여 벅차오릅니다.

 

한 여름이 전쟁처럼 몰려옵니다. 지나는 아이들의 종알거림이 새 소린가 합니다. -그늘진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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