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 허실생백虛室生白 이라는 말이 있다. 텅 빈 방이면 밝은 빛이 절로 비친다는 말이다. 그처럼 마음을 비우면 희망의 빛이 보인다. 이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서서히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날이 개고 달이 떴다. 달이 드니 강물이 달빛을 받아 훤해진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기분도 달라진다. 이 구절을 두고 허균은 <국조시산>에서 옛사람이 이룩하지 못한 경지라고 칭찬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김부식의 <감로사에서 혜소의 시에 차운하다>에서 “산 모습은 가을에 더욱 좋고, 강물 빛은 밤에 오히려 밝네”를 가져온 것이다.
허균이 김부식의 이시를 몰랐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옛사람이 이룩하지 못한 경지라 한 것은 , 김부식의 시에서 표현을 빌렸으나 시간의 경과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고 , 달라진 풍경에 따라 시인의 감정이 변화한 것을 묘하게 그려낸 것을 칭찬한 것이라 하겠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풍경이 변화하고 그에 따라 어둡던 마음이 밝아졌다. 그래서 마지막 연에서 세상사에 대한 근심 걱정이 이제는 마음을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 했다. 농사를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지만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는 어떠한 일이든 상관이 없다. 되는 대로 밭을 갈고 낚시를 하며 살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정사룡은 풍경을 묘사하는데 뛰어났다. 위의 시에서 보듯이 감정 변화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고 달라진 풍경에 맞추어 마음의 사세가 바뀐다. 풍경을 시에 담기 위해 조탁을 거듭한 것이다. 특히 정사룡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바뀌는 풍경을 세밀하게 다루는 데 탁월했다.
산을 끼고 이루어진 성광이 소반과 비슷한데
노을이 막 잠기자마자 골짜기는 온통 텅 빈 듯.
멧부리에 별빛이 반작이며 이지러진 달과 다투니
나뭇가지 끝에 새가 움직여 깊은 숲으로 숨네.
맑은 여울소리 멀리서 들려 문득 빗발이 뿌리는 듯,
병든 나뭇잎 살짝 떨어지자 절로 산들바람 일어나네.
이 밤 시 읊조리는 침상 값을 함께 내겠지만
내일 아침이면 붉은 흙길에 말방울 소리 울리겠지.
...
정철의 오언절구가 호평을 받은 것은 그의 시에 소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당시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때 이르는 ‘시중유화 를 지향하면서 더 나아가 ’시중유성‘ 을 지향한다. 그림은 소리가 없지만 아름다운 시에는 자연의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산에 내리는 밤비가 대숲을 울리니
가을날 풀벌레 소리 침상에 다가오네.
흘러가는 세월을 어이 잡으랴?
자라는 백발은 금할 수 없는 것을 .
..
위의 작품에는 댓잎이 떨어지는 빗소리, 침상을 메우는 풀벌레 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넣었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목동의 피리소리가 울려 퍼저 절로 흥이 일게 한다.
안개낀 풀밭에서 소를 먹이고
지는 햇살 아래 피리를 부네.
촌스러워 가락이 맞지 않아도
손가락 까닥까닥 맑은 소리라네.
..
정철의 시는 아름다운 향기까지 맡을 수 있게 한다.
산속이라 비 만날까 겁나지만
깨끗한 벗 연꽃이야 요란하겠지
선가의 풍경을 새어 나가게 해서
맑은 향이 동구에 가득하다네.
정철의 오언절구를 읽는 재미는 이처럼 그림과 어우러져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는 데 있다. 다음 작품은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말소리가 잘 섞여 정철의 오언절구가 이룬 최고의 성과를 보여준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소리에
성긴 비 내리는 줄 잘못 알았네
중을 불러 문 밖에 나가 보라니
“시내 앞 숲에 달이 걸렸습니다.”
..
문학은 새로워야 한다. 어떻게 하면 새로움을 얻는가? 송나라의 황정견은 ‘이속위아以俗爲雅’와 ‘이고위신以故爲新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비속한 것을 이용하여 우아하게 하고 옛것을 사용하여 새롭게 하는 것은 손자와 오기의 병법처럼 백전백승이다”라 했다. 시를 짓는 사람들은 비속한 단어는 잘 쓰려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비속한 단어를 잘 구사하면 새로움을 얻을 수 있다.
18세기의 문인 성섭成涉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필원산어>筆苑散語 에서도 “대개 시인들이 용사用事 것이 비록 이어라 하더라도 점화點化를 잘하면 점철성금點鐵成金이 될 수 있다.” 라고 한 바 있다.
‘이어’는 우리말을 낮추어 이른 것이다. 점철성금은 고철을 녹여서 금덩이를 만든다는 뜻으로 도가에서 쓴 말인데 , 진부한 소재를 이용하여 참신한 표현을 만든 것에 이른다. ‘이고위신’역시 비슷한 의미다. 낡은 것도 잘 이용하면 새로운 맛을 낸다.
옛사람이 시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움을 얻기 위해 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구사했다. 고려의 큰 시인 이색이 이런 시도를 많이 했다. 이색은 시에 속담을 집어넣는 것을 즐겨했다. “참새가 낮에 한 말을 쥐가 밤에 전하니, 담에도 귀가 붙었다는 말이 예부터 한가지라.” “더해지는 것은 몰라도 주는 것은 아는 법, 예부터 인간사는 떨어져 나가는 것 겁낸다네”
“처음에는 가난해도 나중에는 부자된다 하였으니, 사람들의 이 말이 정말 빈 말이 아니구나” “전자 창 앞에 구자 뜰이 있는데, 밥 짓는 연기 아침저녁 빈 마루를 감싸네”라 한 것이 그러한 예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드러내는 데 주변에서 흔히 쓰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거니와 참심함까지 얻을 수 있었다.
책 우리 한시를 읽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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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와 사랑에 빠졌다. 정신없이 묻혀 들어 나를 잊는 요즘이다. 나의 생활 질서가 바뀌고 있고. 이번 주에는 도서관에서 한시 책만 빌렸다. 그림처럼 글을 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기만 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찌할까 늪에 빠지듯 점점 시조에 빠져 들어가 버리고 있으나 마음같이 뇌에서는 아무것도 생산해 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저 좋아 그에게 홀려있는 것이다.
한동안 글쓰기를 접어두고 그저 마음공부에 몰두하며 책만 뒤적였는데 시조가 나의 글쓰기에 도화선이 되고 있다. 수필쓰기에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관조하며 느리게 천천히 순하게 살기로 했는데 시간이 아까워서 어쩔 줄 모르는 나와 만난다.
책도 더욱 깊이 읽어야 하고 글도 가다듬어야 하고 할 일이 많아지니 운동에까지 소흘해 지며 마음만 부산하고 바쁜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끼니까지 거를 때도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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