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배우다

제심징려(齊心澄慮)

다림영 2013. 3. 2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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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313일 수요일

 

정민의 世說新語

제심징려

 

연암 박지원이 열하에서 요술 구경을 했다. 요술쟁이는 콩알만 하던 환약을 점점 키워 달걀만 하고 거위알만 하게 만들더니 장구만 하고 큰 동이만 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놀라 반히 보는 중에 그것을 쓰다듬고 어루만져 잠깐 사이 손안에 넣고 손바닥을 비비니 그마저도 없어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는 기둥에 제 손을 뒤로 묶게 했다. 피가 안 통하는지 손가락 색이 검게 변했다. 요술쟁이는 순식간에 기둥에서 떨어져 섯다. 손은 어느새 가슴앞에 와 있고, 끈은 애초에 묶인 그대로였다. 일행 중 하나가 성을 내면서 돈을 주고 한 번 더 해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제 채찍으로 직접 요술쟁이의 손을 꽁꽁 묶었다. 절대로 속지 않겠다고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하지만 요술쟁이는 벌써 기둥을 벗어났고, 묶은 채찍은 그대로였다.

 

이런 수십 가지 요술을 구경한 후 연암이 말했다. “눈이 시비를 분별 못하고 참과 거짓을 못 살핀다면 눈이 없다 해도 괜찮겠다. 요술쟁이에게 속는 것은 눈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 똑똑히 보려다가 도리어 탈이 된 것이다. ”곁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아무리 요술을 잘하는 자도 소경은 못 속일테니,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환희기(幻戱記)’에 나온다.

 

주자가 늘 눈병을 앓았다. 말년에 어떤 학자에게 준 편지에서 좀 더 일찍이 눈이 멀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고 썼다. 눈을 감고 지내자 마음이 안정되고 전일(專一)해져서 지켜 보존하는 공부에 큰 도움이 됨을 느꼈던 것이다.

 

조선후기 조희룡(趙 熙龍1789~1866)이 누군가에게 보낸 짧은 편지는 또 이렇다. ‘눈에 낀 백태가 나아지지 않으신다니 걱정입니다. 이런저런 약을 잡다하게 시험하지 마시고, 다만 제심징려(齊心澄慮),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생각을 맑게 한다는 네 글자를 처방으로 삼으시지요, 약을 안쓰고도 절로 효험이 있을겁니다.’ ‘우봉척독(又峰尺牘)’에 보인다.

 

눈을 똑바로 뜰수록 더 속는다. 제심징려! 마음의 끝자락을 가지런히 모으고, 생각의 찌꺼기를 걷어내라.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은 헛것이 더 많다. 이소리 듣고 옳다 하다가 저 말을 듣고는 침을 뱉는다. 진실을 무엇인가. 외물에 현혹되어 우왕좌왕 몰려다닌 마음만 부끄럽다.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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