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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상한 일도 하도 많으니 울기도 하면서 살아가세'

다림영 2013. 2. 1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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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7년 넘게 집에서 누워계시다가 요양원으로 가신지 팔 개월에 드는 강추위가 몰아치던 설밑의 어느 날이었다.

남편의 형제는 넷이고 그중 우리는 셋째다. 결혼한 날부터 지금껏 부모님과 함께 살아왔다. 남편의 사업이 잘 될 때는 형제의 우애가 좋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용했고 돈에 관한한 특별한 말을 형제들에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우리의 생활은 급락했다. 부모님에게 드는 돈을 우리의 힘으로만 해결 할 수 없었고 형제들에게 나눠 부담할 것을 전하곤 하던 터였다.

 

시동생은 아래지역에서 많은 일을 해 왔다. 요즘은 그들이 상당히 괜찮은 모습으로 비춰졌다. 이름도 널리 알려졌고 관에도 머무르고 해서 아버님의 거주지주소를 그쪽으로 옮겨다 놓은지 몇년 되었고 사후 모든 것을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아버님을 요양원으로 모신 첫 달째였다. 당시 어머님도 병환 중이었고 퇴원을 할 즈음이었다. 동서는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시동생이 모든 것을 다 부담하는 것 같은데 그와 이혼을 하겠다는 것이다. 경제관념이 없는 남편과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며 남편의 빚이 얼마니 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형제들도 형편대로 돈을 보내는 것으로 알고 나 또한 내가 보낼 수 있는 돈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도 그녀는 뭔가 미심쩍은 듯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와의 통화 후 생각했다. 우리가 넉넉하게 살 때는 그 누구에게도 이런 식의 전화를 한 적이 없었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당시 남편의 사업은 잘 나갔지만 빚도 그만큼 지니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십 육년을 부모님과 함께 살아왔고 아버님이 누워 계신지만 7년이 넘었어도 특별한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동서는 자신의 집안도 아니고 근처 요양원에 모셨는데 그런 말을 내게 전하며 이혼을 운운했다는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한동안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 아무런 문제도 아니고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다.

 

 

문제는 제일 큰 형에게 있었다. 장례를 치루며 우리 집 식구들에게 대못을 있는 대로 박아놓고 뒤도 안보고 돈 보따리를 들고 제 집으로 갔다. 요는 자신의 부조가 많이 들어왔다는 것, 비용을 제한 후의 금액 또한 예상외로 만만치 않았는데 형편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못난 동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동생과 함께 사는 어머님에게 통장을 만들어 주겠다더니 남은 돈은 자신들이 관리하겠다며 매달 그 돈에서 용돈과 제사비용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형님은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어머님 아버님 생신을 차린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생신날 어머님을 뵈러 온 역사도 없으며 명절에 그녀를 본 기억이 너무 오래 되어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 우리집에 드나들 때도 명절 아침 늦게 항상 이유를 달고 허둥대며 도착하곤 하거나 남편만 달랑 보내곤 했다.

형님과 아주버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강남에 살고 있고 두 사람 다 내노라 하는 최고의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다.

 

 

장례식장에 있을 때였다. 옆에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 장례를 치루는데 종일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껌뻑이며 감흥이 밀려온다는 얘기를 몇차례나 했다. 그녀의 종교이니 그럴 수 있겠다 했다. 나도 스님의 목탁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좋으니 말이다.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렇게 어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몸도 좋지 않고 기력 없는 어머님이 간신히 식장에 오셨는데, 같은 교회사람 몇을 데리고 와서 교회를 다니라며 긴시간 전도를 하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며.....

몸도 좋지 않고, 남편을 떠나 보내는 팔순의 노모에게,평생을 절에 다니던 노인에게 그런 행동은 옳은 것인가?

    

큰아주버님은 친구에게 억대의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아온다고 내 쫓김을 당했었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도 다 바꾸어 버렸고 옷도 경비실에 내 놓았다. 그는 어떤 연유로든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돈을 받기전에는.  딸이 둘이나 있었지만 모두 엄마와 같은 편이었다.

 

그는 며칠 찜질방을 떠돌았고 어느 해 명절 추석에 여행 가방을 들고 우리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식구가 많아 큰 집에 살고 있던 우리는 어떡하든 경비를 줄이려 작은집 전세로 가려고 계약을 해 놓은 상태였는데 때마침 그런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그때 살던 집보다 약간 작은 평수로 전세를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나 많은 월급을 받았다면서 월세 방 한 칸 얻을 돈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알고보니 월급은 고스란히 형님에게 다 갈 수 밖에 없는 사정들이 있었다. <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사무실로 딸들을 대동하고 찾아간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고  누구 말처럼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 하나  놓으면 되고, 더군다나 남편은 사업 실패 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거의 술로  연명했다. 그런 그에게 형이 한 가족이 되어 함께 살게 된 것이 어떤 의지가 되는지 그냥 보기에 행복해 보였다.

 

남편은 언젠가부터 아이들보다 더 단순한 사람이 되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의지도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했다. 그런 그에게 좋은 친구가 생긴 것, 매일 같이 운동을 다니며 재미있게 지내는 듯 보여  좋은쪽으로 생각했다.

 

 

남편의 형 때문에 작은집 전세로 가려던 우리는 다시 큰 집으로 이사해야 했고 관리비 낼 때마다 나는 숨을 죽여야 했고 식구들이 잠에 들면 보일러를 잠그고 다녔다. 그렇게 이년을 버텼다.

다시 전세계약 만료일이 돌아왔다. 전세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더 이상 그곳에 살 형편이 되지 않았다. 오래 전, 살던 큰 집을 정리하면서 사 두었던 재개발 승인이 난 이 십 평 대 작은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매일 누워있는 환자 한 명을 포함한 여덟식구가 그곳에 기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머리를 쓰고 또 써야 했다. 오래 된 집은 넓히면 춥다는 것을 익히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마다 이층침대를 들여 놓아야 했고 우리부부의 방은 가질 수가 없었다. 큰 방을 부모님께 드렸다 남편은 추운 거실에서 자고 나는 밑의 두아이들 방에서 기거했으며 우리의 옷들은 베란다에 나가 있어야 했고, 아주버님은 큰아이와 함께  했다. 그래도 남편은 형과 함께 있는것이 좋은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알아주는 큰 회사에 다녔고 연봉이 우리 같은 사람은 생각도 못하는 금액이었다.

아주버님은 매달 밥값 삼 십 만원을 냈다.

남편은 그 것은 큰돈이라며 가당치도 않은 위세를 부리곤 했다.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한 어떠한 미안함도 갖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거니 하고 말았다.

 

 

몇 년을 더 다닐 수 있을듯 하더니 아주버님은 회사의 권고로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우리는 상상도 못할 몇 억을 받을 수 있었고, 그는 집에 얘길 했는지 말없이 짐을 챙겼고 집 밖 몇년의 세월을 털 어 낼 수 있었다.

사정을 알고 있는  나의친구들은 저마다 물었다. 아주버님 돈도 많이 나왔다며 얼마 받지 않았느냐고....꼭 무엇을 바라는 마음은 없었지만 사람의 예의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나 같으면 다만 어떤 작은 인사라도 했을 것 같다. 인사말이라도 말이다. 친구들의 물음에 난 그냥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몇 년동안 걸음도 하지 않은 것은 미뤄두고, 그동안 자신의 남편을 동생집에 몇 년동안 머물게 한 것에 대해서 일언반구 달다 쓰다 한마디 언급도 없이 그런 일이 언제 있었냐는듯, 저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큰며느리임내 하고 수첩을 들고 다니며 음식이 들고 나는 것에 대한 싸인을 하는 것이다.

기본 상식으로,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 내게는 고사하고 어머님

께는 무슨 인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삼 오제가 끝나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어머님은 같이 사는 며느리에게 창피해서 한 번도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 하시며 큰아들에게 용돈 한번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손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아침마다 큰 소리로 곡을 하셨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생각으로 젖어 그러한 것이 아니라 큰아들 내외의 괘씸함으로 나에 대한 미안함으로 어머니의 곡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친구들이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맞는 듯 했다.

잘난 아들은 처갓집 아들이고 못난 아들만 내 아들이라는 ....

 

때마다 인척들에게 복을 받을 거라 인사를 듣는 난 그 복을 언제 받게 되는가도 생각해보지만 ,그런 것보다 그렇다고 해서 형과 맞서 너희가 맏형이니 어머님을 모셔가라는 등의 얘기를 하며 싸움을 해야 한다는데 그렇게까지 상스럽고 옳지 못한 모습을 아이들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으며, 그렇지 않아도 상심해서 밥도 제대로 못드시는 어머님에게 또 한 번의 대못을 박으며 형편없는 인격자로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어제는 49재에 대한 이야기를 찾다가 금강경을 듣게 되었다. 동생이 잠깐 들러 가게에서 그런 것을 그렇게 크게 들으면 어쩌냐 했지만 다시 소리를 작게 하고 퇴근할 때까지 들었다.

수면위로 떠서 어지럽고 분분하던 마음이 신기하게도 가라앉았다. 오늘은 또 어제보다 좋은마음이 들었고 그래 잘 된 것이다 하는 생각까지 들었고 가족들에게도 오히려 잘 되었다는 얘길 나누게 되었다.

큰 부자도  제아무리 잘난사람도 그 누구도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마는 것이 삶의 끝이건만 어쩌자고 서로 챙겨주고 살펴주질 못하며 욕심을 앞세워 상처를 내고 살아가는 것인지 알길이 없다. 또한 난만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은은하게 살고자 매일 좋은글을 옆에두며 평안하고자 노력했던 나는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속상한 일도 하도 많으니 울기도 하면서 살아가세~..진정을 다한들 소용있나~...'..태평가를 듣고 있다. 인생은 그런것이리라 한다.

창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눈부신 햇살이 나를 부른다.  다 두고 볕을 쬐러 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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