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조선의 일곱 번 째 왕 세조는 1417년 세종의 둘째로 태어났고 이름은 유이다. 그는 왕자 시절에는 수양대군이라 불리웠다.
세조는 몸이 약했던 형 문종이 죽고 조카인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밀어내고 1455년 왕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세조는 자신에게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뒤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그는 법을 정비하고 조선 왕조의 시각으로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또 관리들에게 불필요하게 나가는 돈을 줄이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크게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이나 문종 시대와는 다르게 모든 조치들이 왕의 마음대로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세조는 자기와 가까운 사람만 높은 자리에 앉히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쫓아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학문과 법이 후퇴하고 강한 권력만 남았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세조가 강한 권력을 휘두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조카를 죽이고 임금의 자리에 앉았던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강한 권력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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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은 먼저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늦은 밤이었지만, 김종서는 아무 의심없이 수양대군을 맞았다. 수양대군은 그 틈을 노린 것이었다. 수양대군을 따라온 장사들이 갑작스레 김종서와 그의 아들을 철퇴로 내리쳤다. 김종서는 피를 토하며 거꾸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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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은 조선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되고, 권람, 한명회 등과 함께 제 마음대로 나라를 움직인다. 그리고 1455년 여름,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 낸 뒤 마침내 조선의 임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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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죽은 다음 날 밤이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있던 세조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죽은 사람이 어떻게....?”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형수였다. 자신의 형인 문종의 아내이자 단종의 어머니 권씨였다. 권씨는 눈을 치뜨며 말했다.
“너는 내 아들을 쫓아내고 왕의 자리를 도둑질하더니,그것도 모자라 내 아들의 목숨까지 끊어 놓았구나. 나와 무슨 원수를 졌단 말이냐?”
권씨의 입술이 심하게 떨렸다.
“오냐, 좋다.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여주마.”
권씨는 이렇게 말하고는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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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권씨의 능을 파내 불을 지르게 했다.
그런데 군사가 막 관에 불을 붙이려 할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치며 빗줄기가 쏟아져 군사가 든 불이 껴져버렸다.
세조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놈의 관을 당장 강에 던져 버려라.”
세조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궁궐에 다시 돌아온 세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자꾸 몸이 가려운 것이었다.
‘아니, 이 곳은 꿈에서 침을 맞은 곳이 아닌가!“
어느새 꿈에서 권씨가 침을 뱉은 곳에 벌겋게 종기가 나 있었다. 종기는 곧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세조의 온몸은 보기에도 흉한 종기투성이었다.
‘내 아들을 데려가더니, 이젠 종기까지!“
세조는 두렵기만 했다. 모든 것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권시의 복수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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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부름을 거절한 사람은 김시습만이 아니었다.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도 벼슬을 버리고 숨어 살거나 귀머거리, 소경 행세를 하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 뒤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며 평생을 살았’다.
김시습을 비롯한 이 여섯 사람을 생육신이라고 한다. 죽어서 단종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은 사육신과 비교해 단종에 대한 충성을 지키며 살아갔기 때문이다.
조선을 가장 태평스럽게 이끈 성종
성종은 1457년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와 소혜왕후 한씨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고 이름은 혈이다.
어린 시절 지을산군이라 불리웠던 성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 정희왕후9세조의 왕비>의 공이었다.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는 성종이 태어난 지 두 달이 안 되어 죽었는데, 이로 인해 그의 동생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었다. 그런데 예종은 스무살의 나이로 일찍 죽고 말았다. 그러자 정희왕후는 겨우 열세살이던 지을산군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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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자신이 다스리던 기간을 조선 왕조 최대의 태평성대로 이끌었다. 세종때도 태평 성대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는 아직 나라의 기틀이 굳건하게 서지 않았던 때였다. 그러나 성종이 다스리던 때는 이미 조선을 세운 지 100년 가까이 되어 세종 때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종은 이러한 안정을 바탕으로 나라의 법과 제도를 완성시키고 백성들을 보살폈다. 그래서 그의 묘호도 조선을 완성시켰다는 의미로 ‘성종’이 된 것이다.
광해군
왕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말했다. 그런데 그 중 한 왕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가장 맛있는 음식은 소금이옵니다.”
이말에 선조는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대답한 까닭을 물었다.
“소금이 없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맛을 낼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선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이 내 뒤를 이을만하구나.’
소금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 대답한 왕자가 바로 광해군이었다. 선조는 이러한 광해군의 총명함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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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비록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이긴 하나, 왕의 재목임은 틀림없어.’
광해군을 세자로 정한 선조는 이를 곧 명나라에 알렸다.
그러나 명나라는 광해군을 조선의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후궁에게서 난 자식인데다, 광해군 위로 형인 임해군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광해군은 전쟁중에 세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그로 인해 신하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의인왕후가 죽어 선조가 인목왕후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4년뒤에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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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빼앗은 임금은 광해군만이 아니었다. 태종도 그랬고, 세조도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왜 광해군을 폭군이라고 했을까? 이는 광해군이 명나라를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전부터 명나라는 힘을 잃고 있었다. 대신 북쪽의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후금(나중에 청나라로 이름을 바꿈) 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1619년 후금과 싸움을 벌이고 있던 명나라는 조선에 급하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명나라를 돕고 싶지 않았다.
“명은 망해가는 나라이다. 하지만 후금은 날이 갈수록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다. 이 때 명을 돕는다면 후금이 가만있을 리 없다. 잘못하다가는 또 한 번 조선에 전쟁의 회오리가 몰아칠 수도 있는 일.”
게다가 광해군은 중국의 어지러운 상황이 조선에게는 좋은 기회를 가져다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우리 조선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신하의 나라로 지내왔다. 하지만 명과 후금의 싸움을 잘 이용한다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후금과 좋은관계를 가진다면 이후 우리는 후금과 대등한 나라로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 끝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몰래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강홍립에게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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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강홍립을 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말을듣지 않았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더 많은 적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의리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당시 신하들의 눈에 광해군은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를 따르는 배신자였다. 그러한 배신자를 임금으로 섬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광해군을 누구보다도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능양군(뒤에 인조가 되는 사람으로 선조의 손자)이었다. 능양군은 1615년 역모를 꾀한 죄로 죽은 능창군의 형이었다. 그래서 능양군은 동생을 죽인 광해군을 쓰러뜨리기 위한 계획을 비밀스럽게 진행시키고 있었다.
능양군은 김류, 이귀, 김자점 등 광해군 반대 세력을 모아 1623년 반정(임금을 물러나게 하고 새 임금을 새우는 일)을 일으켰다.
이를 인조반정이라 한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16년 만에 죄인이 되어 아내와 세자 질, 그리고 빈궁과 함께 강화도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 때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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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어머니 발치에 묻어주시오”
이것이 광해군의 마지막 말이었다. 한때 조선의 왕이었으며 만백성들의 어버이였던 광해군이 갈 곳은 세 살 때 세상을 뜬 어머니 곁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 때가 1641년으로 광해군의 나이 67세였다.
광해군은 허준에게 상을 내리고 허준이 만든 의학책을 인쇄하라고 명했다. 이 책이 바로 <동의보감>이다.
동의보감은 당시까지 나온 의학책을 총망라한 책이었다. 그래서 다른 책은 보지 않아도 그 동안 나온 의학책을 두루 보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 또한 오랜 실험을 바탕으로 증상에 따라 어떻게 약을 만들어야 하는지, 약을 만들 때 약재의 양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등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게다가 일반 사람들이 부르는 약재의 이름을 모두 한글로 표기해 백성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의 보감은 그 뒤 중국과 일본으로까지 전해졌다. 우리 나라 사람이 지은 책으로 동의보감만큼 중국과 일본 사람들이 많이 읽은 책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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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재방을 하는 ‘공주의 남자’를 보고 있다. 드라마의 배경은 수양대군 , 세조때의 일이고 김종서의 아들과 수양대군 큰 딸과의 사랑이야기가 들어있다.
찾아보니 어느 야사에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 딸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흥미진진하여 매일 극이 방영될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나의 요즘 큰 행복이다.
극에서 수양대군이 직접 김종서를 찾아가 그를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사람을 죽일수 있을까 했다. 그러나 책에 그 내용이 고스란히 나온다. 제아무리 임금이 되고 싶었다 해도 사람의 탈을 쓰고 그렇게 잔악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얼마 전 큰 녀석과 함께 광해에 대한 영화도 보았다. 큰 녀석 하는 얘기가 승정원일기 중에 십오일가량이 빠져 있는데 그것을 추리해 만든 영화가 광해.. 라 한다. 배우의 연기에 빠져 재미있게 보았지만 드라마로 엮어졌다면 더 많은 이야기들로 가득차 역사의 뒤안길을 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쉬웠다.
시대배경과 기타 전해지는 얘기가 궁금해져 책을 빌렸다.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역사적 사실만이 들어 있는 조선왕조 오 백년사, 한 왕 마다 어찌 그리 특별한 사연 속에 탄생하는지 참으로 소설이 따로 없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어 물어보니 모두 시큰둥 한다. 근래 들어 정말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도서관 책인데 너덜너덜 하다못해 줄로 단단히 엮어 놓았다.
아이들이 굉장히 많이 보는 모양이다. 상당히 두꺼운데 다음 권이 있는지 알아보고 천고마비의 계절, 역사 속 이야기에 푹 빠지는 가을이 되셔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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