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가만히 거닐다/전소연/북노마드

다림영 2012. 8. 1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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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최고의 매력은 이곳이 아닌 그곳에 놓여 있다는 낯설음이다. 익숙하던 풍경들과 잠시 이별하고 평생의 한번 올법한 풍경들을 대하는 일. 그것은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자극적인 것이기에 이따금식 배낭을 꾸리는 것이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 때문에 그 낯설음은 온몸으로 느끼고자 지도에 갈 곳을 찍어두고 오늘은 여기-여기-여기-저기를 가야지하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덕분에 수많은 우연을 만나고 여기부터 저기가지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 교토에서는 마음을 조금 달리했다.

마치 일상처럼 익숙하고 잔잔하고 사소하게 머물리라.’

 

머무는 방법은 개인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고, 100가지의 방법이 있다면 나는 그중에서 59번에 해당하는 마치 일상처럼 익숙하고 잔잔하고 사소하게 머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내가 택한 59번의 매뉴얼에는 단 한 문장이 쓰여 있다.

 

당신에게는 단지 사소한 시선 하나 주어집니다.”

사소한 시선 하나로 여행이 아니 일상이 충만해지는 법을 터득한다면 이보다 더 큰 소득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고베에는 왜가니?”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빵먹으러 가. 고베는 빵으로 유명한 도시거든.” 그래서 고베 여행 컨셉을 굳이 밝히자면 먹자 여행이었다. 어떤 곳을 갈 땐, 그곳에 가는 명확한 이유를 달아보는 것도 나름 목적의식이 생기고 여행을 유익하게 만들 수 있는 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밤 잠 안자고 고베에 온 나에게 오길 참 잘했어, 네가 언제 또 고베 빵을 먹어보겠어?“ 라고 위로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첫 번재 방문자는 프리인도리브Freundlieb였다. 가이드북에서 이렇게 설명한 곳이다.

 

고베를 대표하는 빵집, 1982년 독일 사람이 열었다. 교회를 개조한 카페는 성스러운 느낌이 난다. 데미그라 소스와 마요네즈의 조화도 훌륭하고 로스트비프 자체가 맛있는 오리지널 로스트비프 자체가 맛있는 오리지널 로스트비프 샌드위치가 있다. 갓구운 방과 호두, 그리고 햄의 연출이 환상급이다. 무엇보다 마요네즈의 맛과 전혀 다르며 얇게 썬 양파를 비롯해 무공해 채소는 싱싱함 그 자체라는 페퍼 햄 샌드위치를 추천한다.

 

나는 계절 특선(아포카도)샌드위치를 시켰다. 1260엔 가격이 착하다고는 말 못하겠다. 게다가 아직 세포 하나하나가 잠에서 덜 깬 상태라 씹고 있는 게 갓 구운 빵인지 무공해 신선한 야채인지 맛을 느끼지 못했다. 미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운 고베의 첫 방문지였다.

 

 

그대는 살아가고 싶어서 눈이 눈물처럼 빛나던 사람이다. 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대 부디 안녕하라. 미칠 것 같으나 사랑은 결코 치명적이지 않으니, 다만 어느 순간에도 부디 그대가 그대이기를 포기하지마라. 나는 이 물결 위에 너를 띄워 보내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 아니 그런 체 하며 살아가리. 멀리 돌아도 너의 무덤은 다시 나일 것이지만, 나는 감히 그 끝을 말하지도 떠올리지도 않으리.’

 

 

책을 읽으며 먹먹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창밖에서 옅은 빗소리가 들렸다. 이제나 저제나 내려주기만을 바라던 비가 내리니 눈물이 나오기는커녕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감정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새어 나오는 웃음을 굳이 막을 필요는 없었다. 매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일이었고 여행에서 나를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방안에 그대로 앉아 빗소리를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빗소리의 울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바깥으로 나가야만 했다. 평소에는 비오는 날이면 밖으로 나가 비를 맞기보다는 실내에서 비오는 날 자체를 즐겼었는데 내가 이곳 교토에서 어지간히 비를 기다리긴 했는가 보다. 우산과 카메라 그리고 들어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야식을 살 약간의 돈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뛰쳐나갔다라는 표현이 이때만큼 적확한 경우도 없었다.

 

 

동네를 거닐었다. 가야할 곳도, 가고 싶은 곳도 달리 없었기에 늘 다니던 골목을 거닐었다. 거리에 가로등 불빛이 빗물에 번져 아른거렸고, 빗물을 가르는 자동차 바퀴 소리는 시원스레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나는 비가 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만해져 있었다. “비오는 게 왜 좋으니?”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만난 호주 친구 앤드류가 빗소리를 듣고 흥분하던 나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갑작스레 비가 내린 밤이었는데 우리가 함게 머물던 도미토리가 꼭대기층이라 비오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었다. 그 친구의 질문에 그냥이라고 대답하고는 밤늦도록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기억이 난다. 아무 이유가 없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그 당시에는 비를 좋아하는데 굳이 이유를 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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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길을 걷고 싶었다. 주변은 언제나 보았던 풍경들이어도 그저 가만히 특별한 고민없이 걷고 싶다.

여행이란 내게있어 큰 사치임을 알기에 큰 꿈은 꾸지 않는다. 가끔 상상을 해 볼 뿐이다. 아침 산책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요즘에 나는 배낭을 매고 운동화를 신고 출퇴근을 한다.집에 돌아갈 때 역에서 버스를 타지 않고 집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삼십분 남짓 걸리는데 늦은밤 이곳 저곳 도시의 풍경들을 살피며 걷는 것이다. 아침처럼 상쾌하고 신선한 느낌을 받지는 못해도 가로등 밑을 걸으며 불켜진 가게속을 기웃대며 시장 통으로 큰 도로 옆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을 표정도 살피며 걷는것도 작은 재미가 있다. 흐트러진 모습이 많은 밤길 , 사람들의 즐겁고 가벼운 모습들을 허름한 곱창집 창 너머로 발견할 때면 부러운 시선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며 하하호호 웃던 때가 언제였던가 한다.

 

부쩍 할 일이 많아져 아침마다 하던 산책을 접은 요즘, 가끔 숲속의 향기가 그리워져 엊그제 휴일에는 짬을 내어 동네 버드나무 길을 걸으며 좋아라 했다.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다. 큰 것은 아니어도 지금 이 순간 누릴 수 있는 것에 마음을 한껏 주고 사랑해야 하겠다. 내일일은 아무도 모르기에.

 

큰 비가 내린다더니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했다. 빗길 걷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나는 오늘 맘껏 걸을 수 있겠다. 비오는 밤거리를 걸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운치가 제법일 것이다. 큰 비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날의 가로등과 상점과 도로변은 다른 날과는 사뭇 다른모습으로 다가오며 내게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가던 길에 시장통으로 들어가 어제 사둔 천도복숭아 쨈을 만들 재료를 사 가야 하겠다. 레몬 한 개와 올리고당만 사면 될 것 같다. 맛나게 만들어 아이들에게 달콤한 순간을 선물해야 하겠다.

 

 

언젠가 읽었던 책, 가만히 앉아 일본의 조용하고 오래된 풍경과 함께 작가의 길을 따랐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둘째녀석과 함께 오붓하게 좁다란 일본의 뒷 골목을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 수 있을까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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