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한국의 명수필 2/법정외 지음 /을유문화사

다림영 2012. 5. 1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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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비밀/안도현

 

 

삶이란 무엇인가?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를 때 저기 저 고갯마루까지만 오르면 내리막길도 있다고 생각하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보자, 자기자신을 달래면서 스스로를 때리며 페달을 밟는 발목에 한 번 더 힘을 주는것.
읽어도 읽어도 읽어야 할 책이 쌓이는 것.
오래 전에 받은 편지의 답장은 쓰지 못하고 있으면서 또 편지가 오지 않았나 궁금해서 우편함을 열어 보는 것.
무심코 손에 들고 온 섬진강 작은 돌맹이 하나한테 용서를 빌며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살짝 가져다 놓는 것.
온몸이 꼬이고 꼬인 뒤에 제 집 처마에다 등꽃을 내다 거는 등나무를 보며, 그대와 나의 관계도 꼬이고 고인 뒤에라야 저렇듯 차랑차랑하게 꽃을 피울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


사과나무에 매달린 사과는 향기가 없으나 사과를 칼로 깎을 때 비로소 진한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텃밭에 심어 놓은 마늘은 매운 냄새를 풍기지 않으나 도마에 놓고 다질 때 마침 내 그 매운 냄새를 퍼뜨리고야 마는 것처럼, 누구든 죽음을 목전에 두면 지울 수 없는 향기와 냄새를 남긴다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알게 되는것. 그리하여 나의 맨 마지막 향기는 과연 어떤 것일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보는 것.

 

꼬리 한 쪽을 떼어 주고도 나뒹굴지 않는 도마뱀과 집게발을 잃고도 울지 않고 제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바닷게를 보며 언젠가 돋아날 희망의 새 살을 떠올리는 것.

지푸라기에 닿았다 하면 금세 물처럼 몸이 흐물흐물해지는 해삼을 보며, 나는 누구에게 지푸라기이고 해삼인지 반성해 보는것.

 

넥타이 하나 제대로 맬 줄 몰라 열 번, 스무 번도 넘게 풀었다가 다시 매면서 아내에게 수없이 눈총을 받으면서도 넥타이를 맬 때마다 번번이 쩔쩔매는 것.

식당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도 음식을 날라다 주는 아주머니한테 택시비 하시라고 5000원을 주어야 할지, 만 원을 주어야 할지 망설이다가 한 번도 은근하고 멋있게 주지 못해 그 식당에 갈 때마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술값 계산을 하고 나서도 소주 한 병 값을 더 내지 않았나 싶어 이리저리 머리로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것.

 

공중전화기에 50원이 남으면 괜히 알고 있는 전화번호 하나를 일없이 누르는 것.
공중전화 부스에 말끔한 전화카드 한 장이 놓여 있으면 혹시라도 새 것인가 싶어 카드 투입구에 속는 셈치고 한번 밀어넣어 보는 것.

평생 시내버스만 타던 사람은 택시 기본요금이 얼마인지 몰라서 택시 한 번 타기가 머뭇거려지고, 평생 택시만 타던 사람은 시내버스 요금이 얼마인지 몰라서 시내버스 한번 타기가 머뭇거려지는 것.


날마다 물을 주고 보살피며 들여다보던 꽃나무가 곷을 화들짝 피워 올렸을 때 마치 자신이 곷을 피운 것처럼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
초등학교 앞을 지나갈 때 운동장에서 체육복을 입고 정구공처럼 통통 튀는 아이들을 보며 가슴이 통통 뛰는 것.


할머니가 IMF를 '아임프'라고 발음하는 것을 듣고 빙그레 웃다가, 어쩌다가 늙으신 할머니까지 IMF를!하고 생각하면서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쓰레기봉투로도 써먹지 못하고, 시원한 물 한 동이 퍼 담을 수 없는 몸뚱어리 하나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며 개고기를 뜯는것.

물구나무를 서야 바로 보이는 세상이 있는 것처럼 뒤집어 놓았을 때 진실이 보이기도 하는것.


내가 한바가지의 물을 쓰면 나 아닌 남이 그 한 바가지의 물을 쓰지 못하게 됨을 아는것.
여름날 저녁에 온 식구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인 뒤에 첫눈이 오는 겨울저녁을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사는 것.
겨울 밤, 가끔씩 서로 가려운 등을 긁어 주는 것.


가끔씩은 서로 사리나무 회초리가 되어 차륵차륵 소리가 나도록 때리기도 하는 것.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없고 머물고 싶을 때 머물 수 없으나, 늘 떠나고 싶어지고 늘 머물고 싶어지는 것.

바깥으로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안으로는 차갑고 단단한 것.

 

 


단칸방에 살다가, 아파트 12평에 살다가, 24평에 살다가, 32평에 살다가, 39평에 살다가, 45평에 살다가, 51평에 살다가, 63평에 살다가 82평에 살다가.... 문득 단칸방을 그리워하다가, 결국 한 평도 안 되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 눕는 것.

도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물어도 물어도 알 수 없어서 자꾸, 삶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되묻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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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으면서 친구들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

매번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성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터인데 하는 망상을 하는 것.

왜 어릴때 진작에 책과 가까이 하지 않았는지 있는대로 후회하고 후회하는 것.

 

가끔 나 혼자만 불행한 것처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짓다가 또 가끔은 도를 닦는 스님처럼 엷은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초월한듯 지내는 것.

말도 되지않는 연속극에 빠져있는 이들을 보며 혀를 차다가 정작 내가 빠져있을 땐 '불행한 현실을 잊고 또 위안받으려고, 웃으려고, 눈물을 흘려보려고...'웃기는 변명으로 나를 포장하는 것.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만나지 않으며 전화통화만 하는친구가 불현듯'자살을 해버릴까'..하는 얘기를 꺼냈을때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은 마음이 드는것.

 

분명 식사를 했음에도 자꾸만 허기가져서 무언가를 또 먹어야 할 것 같은 것.

올봄에는 아이들과 조금 멀리 여행을 떠나고 말거야 했는데 또 망설이고 바쁘다는 핑계로 돈얘기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

오랜옛날 추억의 사람에게  전화가 오지 않을까 하고 소설처럼 기다리는 것.

자기계발서를 끊임없이 읽으며 실행하고 또 실행하다가 포기도 하는 것.

 

 

나는 왜 아들을 셋이나 나았는지 전생에 무슨죄를 지었는지 하며  한탄하는 것.

혼자 살고싶은 유혹을 때마다 느끼고 꿈을 꾸는 것.
친정엄마가 막내동생을 결혼시키려고 별 별 생각을 다하고 있을 때 누나인 나는 그애가 혼자인것이 부럽기만 한 것.

 

며칠 시를 외우다가 또 며칠 영어단어를 부지런히 외우다가  접다가 다시 시작하다가 또 접는 것.

금요일까지 몸에 이롭지 않은 음식은 절대적으로 쳐다보지않다가  토요일 점심즈음부터는  먹고 싶은 인스턴트를 마구 접하며 아이처럼 더없이 행복해하는 것.
금요일까지 하루 한시간 근육운동을 하다가 토요일 일요일엔 해방되어 맘껏 자유를 누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것.

 

비가오려고 잔뜩 흐린 날엔 샹송같은 것을 종일 들으며 우수에 젖은척 하는 것.

똑 같은 음악을 며칠씩이나 들어도 질리지 않으며 듣는것.
젊을 때 잘 하지 않았던 일을 좋아하고 찾게 되는 것.<쑥뜯는 일 같은...>

 

아이와 함께 병원에 들렀다가 우연히 키를 재어보고 1센티 이상이 줄었다는 기막힌 사실을 발견하는 것.

아이들이 엄마인 내 말을 듣지 않을 땐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사실. 그후 어떤 잘못이 왔을 때 처절하게 후회하는 것을 보며 구태여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내가 느끼는 것.


기가막힌 행동을 하고 다니는 동반자에 대해 체념하는 것.전생의 업보라고 생각하는 것.

친구는 형편과 돈으로 사귄다는 생각이 점점 굳혀지는 것.

세상에는 영화처럼 소설처럼 마음이 지극히 아름다운 사람이 절대적으로 없다는 것, 어쩌면 진실하고 진정한 사람 하나 없다고 느끼는 것.

잘 나가는 사람을 보면 위태롭게 느껴지는 것.

작게 먹고 작은 울타리를 만들며 소박하게 살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때마다 하며 욕심을 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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