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장자, 마음을 열어주는 위대한 우화/정용선

다림영 2011. 12. 2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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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이 개입될 수 없는 자연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필연을 우연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이 마음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깊은 계곡이 흐르는 물을 모두 차별 없이 받아들이듯, 바다가 여울을 오는 대로 받아들이듯,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허심'이요, 양생의 길이다. <중용中庸>의 군자君子가 바로 이런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불원천불원인不怨天不원人하며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 "군자는 자기 자리를 바탕으로 행하되, 그 밖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부귀에 처해서는 부귀대로 행하고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대로 행하며, 오랑캐 땅에서 처해서는 오랑캐대로 행하고 환난에 처하면 환난을 당한다. 군자는 어디를 가든 그곳에 맞게 처한다.

윗자리에 앉아서는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아랫자리에 앉아서는 윗사람을 헐뜯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고 남한테 얻고자 하지 않는다. 그래서 원망이 없으니, 위론ㄴ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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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사랑, 즉  대인大仁은 어떤 대상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 어떤 대상을 특별히 사랑한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대상과 사랑하지 않는 대상을 구별하고, 그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사랑은 대상들을 놓고 구별하지도 않을뿐더러,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객체조차도 구별하지 않는다. 마치 하늘의 태양처럼 차별없이 비추고, 모든 자연과 하나가 된다. 그런가 하면 참된 청렴은 재물이든 명예든 사사로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는 것이 만 가지 사물이 모두 허환虛幻한 것이요 확고한 실체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렴 그 자체도 소유하지 않는다. 즉 청렴을 의식하지도, 내세우지도 않는다.

 

 

최고의 앎<知>은 알지 못하는 바에서 멈추는 것이 지극한 것이다. 최고의 앎은 '알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처럼, 우리의 인색능력이 부분적이고 편파적임을, 우리의 지능과 지성과 분별적인 계산 능력으로는 존재의 실상을 '알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의 앎이 지닌ㄴ 한계를 아는것, 우리의 앎을 제약적으로 사용해야 함을 아는 것, 그리하여 진정으로 겸손해지는 것이다.

겸손한 자의 지혜와 오만한 자의 지식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그리하여 장자는 말한다. 자 , 누가 '말할 수 없는 말<不言之辯>'과 '말할 수 없는 도<不道之道>'를 알겠는가. 만일 능히 아는자가 있다면 그것을 일러 '천부天府'라고 한다. 천부란 자연을 담는 창고이다. 그러나 도를 말로 표현할 수 없듯이, 자연을 창고에 담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무한히 다가오는 자연을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텅 빈 거울 같은 마음을 일러 '허심虛心'이라 하는데, 천부란 곧 이 허심과 같아서 온갖 하천이 흘러들어 물을 대어도 차 넘치지 않고 아무리 잔으로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과 창조성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이다. 그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다. 주재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보광'이라고 한다. 보광이란 빛이 풀 더미에 가려 희미해진 상태를 가리키니, 분별하지 않는 서심, 즉 천부의 다른 표현이다. 허심에서 존재의 실상이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히 비치는 것이다.

 

 

산의 나무는 그 쓸모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고, 기름붙은 스스로를 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기에 베이고, 옻나무는 용도가 있기에 갈라진다. 사람은 모두 유용有用의 용 用은 알지만 무용無用의 용用은 모른다. 산의 나무와 등잔불, 계수나무와 옻나무는 모두 남에게 '쓸모'가 되는 탓에 제 몸을 지키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도 자신이 세상에 '쓸모'있기만을 바랄 뿐, 그 쓸모가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며, 나아가 그 쓸모로 인해 자신의 고유성과 삶이 훼손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즉 세상의 쓸모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가 문제 삼는 것은 계수나무와 옻나무처럼 인간 세상의 '쓸모'를 지녔다는 점  자체가 아니다. 인간세상의 부득이한 필요에 의해 일정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쓸모'의 기준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장자가 권하는 바는 그 '쓸모'에 농락당하거나,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잘 살피고 경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피상적인 욕망이나 완고한 당위에 사로잡혀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심지어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한 채 외부적인 기준에 휩쓸려 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나아가 그 결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지는 않은가? <논어>(술이述而)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처럼 나물먹고 물마시며 팔베개 베고 누워도 그 안에서 즐겁게 자적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양생의 큰 즐거움이다. 만약 지금 마음 편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면, 다시금 돌이켜볼 일이다. 내가 혹여 나 자신의 본성을 거스른 채 무언가에 휩쓸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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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흐릿해서 글자가 똑똑하게 보이질 않는다 . 안약을 넣고 인공눈물을 주입해도 신통치 않다. 밖에 나가 바람을 쐬면 금새 괜찮아지지만  책을 오래 들여다 보거나 하면 여지없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삶을 원하는 것이 아닌데 ,그저 어제의 내가 아니기 위해 들여다 보는 것인데 억지를 부릴필요는 없는데 이렇게 또 집중을 하고 무언가를 정리를 한다고  기를 쓰고 있다. 그것이 나의 눈에게 극심한 피로감을 가져다 줄뿐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나를 위한 일이 아닌 것인지...오늘까지 읽고 내일은 새로운 책과 만남을 가지기로 스스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기위해서인데 나는 왜 그런 제약을 만들어 편안해지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만 오늘이 마무리가 되는 것임을 ..

오늘을 잘 살아야 일주일을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일주일을 잘 살아야 한달을 또한 잘 살수 있으므로 , 한달을 잘 살아야 일년을 가득하게 보낼 수 있으므로....

 

일주일동안 장자의 말씀들을 들여다보면서  삶과 죽음이 자연현상임을 깨달아 모든 것에 욕심을 놓아둘 일인데 언제쯤이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것인지 아득하기만 하다. 그러나 어제보다 눈꼽만큼이라도 마음이 가벼워지고 있다면 나는 깨달음의 길로 움직이고 있는 것...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환한 모습으로 하루를 닫자. 기온이 빠르게 하강하고 있다. 따뜻한 우리집으로 얼른 돌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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