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다림영 2011. 4. 2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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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그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며, 그래서 자기가 그녀에게 주고 싶은 것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며 뽐므를 몰아세웠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받고 싶어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하고 저녁 내내 그녀 앞에서 입을 꼭 다물고 있어 보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냉랭함에 마음이 흔들리는 통에 먼저 굴복하고 마는 것은 언제나 그였으며, 그런데도 뽐므는 불평을 하지도, 그에게 뭘 요구 하지도 않았다. 그때마다 그를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뽐므의 그런 참을성이었다. 그는 필터 달린 지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 그의 그리고 다시 그녀의 그런 침묵 때문에 이제 그는 그녀와 함께 보내는 한가한 시간을 되도록 줄이려고 애썼다. 짧은 저녁 식사가 끝나면 그는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들을 잡고 오후에 하던 독서를 다시 시작했다. 뽐므는 시간 꽤 걸리는 설거지를 하느라 바브게 움직였다. 그 앞에서 아무 일도 안하고 빈둥거리는 게 두렵다는 듯 . 그리고 설거지나 속옷 발래를 마치고 나면 극 읽으라고 한 갈리마르 출판사의 책들을 조심스럽게 흝어보곤 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는 파이크 시트롱<레몬 향기가 나는 접시 싯는 용액-옮긴이> 냄새가 났다.

 

일요일들이 있었다. 에므리는 때대로 그의 가족이 있는 집에 가서 일요일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뽐므를 자기 뒤에<마치 깜빡 잊는 바람에 닫지 않은 창문처럼> 남겨 두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거의 대부분 시간을 그녀와 함께 잇었다. 그 덕분에 어쨌든 그는 지루해할 능력조차 없지만 그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찮은 일거리에 매달려 바삐 지내는 그 외로운 젊은 여자를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다.

 

 

<레이스 뜨는 여자>에서 소통의 어려움은 개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 그 양상은 다르지만 모두 말의 불구자라는 사실이다. 미용실에서 일하는 장 피에르, 시골에 간 뽐므에게 엉큼한 눈길을 던지는 사내애, 러시아 출신 집주인 할머니, 길바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 자동차 운전자, 결혼식 뒤풀이 자리의 부부, 미용실에 온 늙은 부인 등 잠깐 나오고 마는 인물들까지 모두 어느 순간이 되면 소통의 문제와 맞닥뜨린다. 이런 장애는 소설에서 여러 양상으로 나타난다.

 

가장 명백한 경우는 말이 거의 없는 경우일 것이다. 이를 테면 필요한 말밖에 하지 않거나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침묵하는 뽐므의 아버지가 그렇다. 그의 역마살 비슷한 것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 너무 제한 되어 있어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사유를 담아 낼 수 없는 조잡한 도구일 뿐인 언어가 이 인물에서 벌써 문제시 된다. 우리는 에므리가 뽐므의 침묵을 해석하려고 애쓰는 대목에서 이런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소설가 차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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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 자아를 바치려는 '흔해빠진 여자'는 잠자기 전에 불 끄는 걸 잊는 남자의 수만큼이나 드물다. 흔한 것은 그 여자를 '흔해 빠진 여자'라고 믿는 해석의 오류다. 우연히 만난 처녀를 남자가 '흔해 빠진 여자'로 묶을 때 여자는 끝내 남자의 이방, 바깥에 머문다. 여자를 제 삶의  가치 영역에서 밀어낼 때 남자 또한 여자의 이방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불러오는 것 가운데 하나가 소통 부재 또는 불능이다. 때로는 침묵이 두 사람의 소통을 가로막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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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것 없는 집안에서 나고 자란 한 여자, 초라한 운명을 타고난 그 여자 뽐므는 마침내 자기에게 그토록 조금밖에 주지 않는 세상에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러고는 스스로 세상에 등을 돌린다. 남자의 일방성에 치이고 이해할 길 없는 세상의 벌판에서 감수성, 평온함, 아름다움이 지워지며 비참한 자아로 떨어진 여자, 때로는 금 간 벽에서, 돌 틈에서 자신에게 잘 맞는 흙을 찾아내는 작은 떨기나무 같은 존재이기도 하던 그녀가 문득 자신의 삶에서 고개를 돌려 버린 것이다. 신경성 식욕 부진 도는 거식증은 그 단절 의지가, 이해할 길 없는 세상과의 단절 의지가 몸의 증상으로 나타난 결과다.

 

 

<레이스 뜨는 여자>는 문학이 씨줄로, 사회학과 철학과 심리학이 날줄로 얽힌 독특하면서 작품성 높은 소설이다. 한 여자와 남자의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흔해 빠진 이야기로 가면 뒤에 숨겨진 현실세계의 민얼굴을 이만큼 생생히 보여주는 소설 텍스트는 달리 찾기 어려울 터다. 이 소설의 또 한가지 놀라운 점은 내용만이 아니라 서술기법이나 형식 측면에서도 그 새로움이 여전히 돋보인다는 것이다. 작가 파스칼 레네의 날카로우면서도 폭넓은 현실인식이 독특한 문학형식 속에 어우러져 완성도 높은 예술로 맺힌 소설 텍스트가 바로 <레이스 뜨는 여자>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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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잘 읽혔는데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다!..훗..배움이 짧아서...

빌린 책이 아니라면 두어번 더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가지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소설에 심취하지 못하는 나인데 말이다.  조금더 집중해서 한 번 더 읽을까... 다음빌린책을 보아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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