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9/24/금
정민의 世設新語
안정복安鼎福이 권철신權哲身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 "독서는 모름지기 의심이 있어야 합니다. 의심이 있은뒤라야 학업에 나아갈 수가 있지요. 주자께서는 '책을 읽으면서 크게 의심하면 크게 진보한다'고 하셨고, 또 '처음 읽을 때는 의심이 없다가 그다음에 점점 의심이 생기고, 중간에는 구절마다 의심이 들게 된다.
이런 것을 한 차례 거친 뒤에야 의심이 점차 풀어지고 두루 꿰어 하나로 통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독서의 일대 단안斷案이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대저 성현의 말씀은 모두 평이명백平易明白하므로, 깊이 탐구하려다 스스로 의심과 혼란 속에 얽혀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퇴계선생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책을 읽을 때는 별다른 뜻을 구할 필요없이 마땅히 본문에서 드러나 있는 뜻을 구해야 한다'고요."
성현의 말씀이 '평이명백'한 것은 공부가 크기 때문이다. 소인의 말은 배배 꼬여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거창하게 말하는 버릇과.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은 다르다. 모르면 말이 꼬여 어려워지고, 알면 명백해서 석연하다. 논문도 그렇다. 초짜들은 각주가 많고 사설이 길다. 읽고 나도 무슨말인지 알 수가 없다. 고수는 다르다. 관절과 관절 사이로 포정庖 丁이 소를 잡듯 힘들이지 않고 핵심을 찌른다.
그도 처음부터 그랬겠는가? 자꾸 보고 오래 겪어 모호하던 것이 분명해질 때까지 따지고 살피다 보니 평이명백해진 것이다. 안보일 때는 걸음마다 망설여지고 오리무중이더니, 보이기 시작하자 백리 밖의 일도 손바닥 위에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어제 일처럼 분명하다. 명명백백하다. 모를 일이 없다.
심입천출深入淺出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깊이 들어가 얕게 나온다. 어려울 수록 쉽고 , 모를 수록 어렵다. 세게 공부해서 쉽게 풀어낸다. 공부가 깊어야 설명이 간결하다. 자기가 잘 알아야 남도 쉽게 이해한다. 말이 현란한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한 번 들어 알기 어려운 말은 옳은 말이 아니다. 제 속이 빈 것이 남들이 알까봐 말이 많아진다. 남이 나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려고 허세를 부린다. 하지만 두드려보면 빈깡통이요 알곡 없는 쭉정이다. 마음으로 읽고 뜻으로 보면 진짜와 가짜는 금세 구별된다. 속임수로 쓴 글과 진정이 담긴 글은 금방 알 수가 있다. -한양대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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