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권을 읽으면..

문학시간에 옛글 읽기/전국국어교사 모임

다림영 2010. 4. 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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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흘러나와 바위에 부딪치며 사납게 흘러간다. 어지러운 파도와 성난 물결. 구슬피 원망하는 듯한 여울은 치솟고 뒤집히며 흐느기는 듯하다가 으르렁거리고 소리 지르니, 만리장성이라도 부술 기세다. 만 대의 전차와 만 명의 말 탄 병사, 만 대의 대포와 만개의 북으로도 그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표현 할 수가 없다.

 

 

모래톱 위에는 바위가 저만치 떨어져 우뚝 서 있다. 강둑의 버드나무는 멀리 있어 흐릿하게 보이는데, 마치 물귀신이 다투어 튀어나와 사람들을 속이는 듯하고 양옆에서는 이무기가 잡아 붙들려고 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곳이 엣날에 전쟁터였기 때문에 물이 우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그래서가 아니다. 물소리는 사람이 어떻게 듣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내 집은 산 속에 있는데 문 앞에 큰 시내가 있다. 매년 여름에 소낙비가 한차례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크게 불어나 전차나 말 탄 병사, 대포, 북 소리 같은 것을 늘 듣게 되어 마침내 귀에 익숙해져 버렸다. 나는 예전에 방문을 닫고 누워 이 소리들을 서고 견주어 듣곤 했다. 맑은 기운으로 들으면 깊은 소나무 숲에서 부는 퉁소 소리로 들렸고, 감정이 북받쳐 있을 때 들으면 산이 갈라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로 들렸다.

 

 

오만한 마음으로 들으면 개구리 떼가 다투어 우는 소리로 들렸으며, 성난 마음으로 들으면 수만 개의 비파를 번갈아 뜯는 듯한 소리로 들렸다. 놀랐을 때 들으면 우레와 벼락이 치는 소리로 들렸고, 여유를 즐기면서 들으면 찻물 끓이는 소리로 들렸다. 구슬픈 마음으로 들으면 거문고 타는 소리로 들렸다. 이렇게 달리 들리는 것은 마음속으로 이미 어떤 생각을 가지고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하룻밤 사이에 같은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넜다.강물은 성밖에서 흘러나와 장성을 뚫고 유하,조하,황하,진천 등 여러 물줄기와 합해져 밀운성 아래를 지나 백하白河가 된다. 나는 어제 배를 타고 백하 하류를 건넜다.

 

 

내가 미처 요동 땅에 들어서기도 전에 무더운 여름날 뙤약볕 아래에서 갑자기 큰 강물을 만났다. 붉은 강물이 산처럼 솟구치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 대개 천 리 밖에서 폭우가 내린 것이다. 물을 건널 때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하늘에 기도라도 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소용돌이치며 세차게 흐르는 물을 들여다보며 물을 건너면  제 몸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고, 눈은 물을 따라 내려가는 듯하여 어지러워서 물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본 것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기도할 틈이 어디 있으랴. 그렇게 위험한데도 사람들은 강물 소리를 듣지 못하고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요동 벌판이 넓고 넓으니 강물이 큰 소리로 울지 않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강물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강물이 어찌 울지 않았겠는가? 다만 밤에 강을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물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위태로움이 눈에만 쏠려 벌벌 떨면서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마당에 어떻게 물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내가 밤중에 강을 건너니 눈으로 위태로운 것을 볼 수 없어 위험이 오로지 귀에만 쏠렸다. 귀에 물소리가 들리자 벌벌 떨려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 이제야 그 이치를 알겠다.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귀와 눈만 믿는 사람은 자세히 보고 들을 수록 더욱 병이 되는 것이다.

 

 

오늘 마부가 말에게 발을 밟혀 걸을 수 없게 되자, 뒤따라오는 수레에 태웠다. 그러고 나서 나는 고삐를 늦추어 말을 물 위에 뜨게 한 다음 안장 위에 앉아 무릎을 오므리고 발을 모았다. 거기서 떨어지면 바로 물속이었다. 나는 강물을 땅으로 삼고, 옷으로, 몸으로 , 마음으로 삼기로 했다.

 

 

그러자 내 귓속에서는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는데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물을 건너는 것이 마치 평지에서 앉고 눕고 생활하는 것 같았다.

 

 

옛날 우임금이 강물을 건너는데 용이 배를 등에 지고 있어 매우 위태로웠다. 그러나 정신을 또렷하게 차리니 용이든 도마뱀이든, 크거나 작거나 따질 필요가 없었다.

소리와 빛깔은 바깥 세계의 것이다. 이것이 늘 귀와 눈에 탈이 되어 사람이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는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인생살이는 어떠하겠는가. 그 위태로움이 강물보다 더 크니 보고 듣는 것이 얼마나 탈이 되겠는가?

 

 

산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문 앞의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이것을 시험해 보리라. 그리고 약삭빠르게 살면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깨우치리라.

-원제.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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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흔들리는 것들이 흔들리게 보이는 것은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

참으로 좋은 말씀들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이다.

읽었던 것도 있고 처음 만나는 것들도 있으나 언제 읽어보아도 선인들의 말씀은 지금에 와서도 깊고 지당한 말씀 뿐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자 노력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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